[전쟁과 사람] 나는 회색인일까? 아니다 양다리다

[김갑수 한국전쟁 역사팩션 15] 제4장 '양다리'

등록 2009.03.07 13:40수정 2009.03.07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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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가 끝나갈 무렵, 아까 왔던 인민군이 김00을 데리고 나타났다. 그가 무사한 것을 보자 일단 마음이 놓였다. 인민군 병사는 백발이 성성한 노교수들에게 다그치듯이 말했다.

"교원 동무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말하시오. 죽여야 마땅한지 아닌지 동무들의 여론을 들으러 왔소. 우리 인민공화국은 이렇게 인민의 의향을 물어 법을 집행한답니다."

인민군 병사는 어깨를 으스대며 교수들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인민군 병사는 좌중을 훑어보더니 김00을 옆방으로 보냈다. 교수들이 김00과의 안면 때문에 말을 하지 못한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병사는 총 끝으로 옆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람은 반동분자라고 어떤 학생이 고발했습니다. 동무들은 한 학교에 있어 잘 알 터인데 어찌 말이 없는 거요?"

누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김00씨는 우리 학교에서 중국어와 중국문학을 맡아 가르치는 선생입니다. 그 외의 것은 잘 모릅니다."
"공자 왈 맹자 왈 하던 자라면 아직 봉건 잔재가 남아 있다는 게지요. 그가 학생들을 함부로 때리는 테러 반동분자라는 말이 빈말은 아니겠군요?"

그러자 다른 교수 하나가 나섰다.


"우리 학교에서 학생을 때려가며 가르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학교는 그런 학교가 아닙니다."

김성식은 말하는 이가 누군지를 보았다. 부임한 지 얼마 안 되는 강사였다. 나이 든 교수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있는데 젊은 강사가 나서 동료 교원을 두둔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김성식은 교수로서 그에게 부끄러우면서도 한편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하지만 인민군 병사는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그럼 학생 동무가 거짓말을 했다는 거요?"

정작 인민군 병사는 처리하기가 난감한 모양이었다.

"만약 교원 동무들이 저 사람을 보증한다면 우리도 구태여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소."

그러나 어느 누구도 김00을 보증한다고 나서지 않았다.

"그대들이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이지요?"

인민군 병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에서 나가 버렸다. 다행히 김00은 무사했다. 그는 물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성식은 그에게 다가가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위선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 두었다.

태극기를 그렀던 나, 이제는 인공기를...

김성식은 학교에서 나와 동네로 돌아왔다. 북한산의 신록은 변함없이 푸르렀다. 그는 점심을 먹지 않아서인지 현기증이 일었다. 집집마다 인공기가 나부끼고 있었다. 그는 동회 앞을 지나갔다. 창을 통하여 보니 동장이었던 성씨는 보이지 않고 그 자리에 박광태가 앉아 있었다. 이제 그의 붉은 완장은 유난히 선명해 보였다.

동네에서 서슬이 파랗던 남한 군경과 그 가족들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반면 그늘에서 눈치나 살피며 쥐구멍을 찾던 좌익들이 제 세상을 만난 듯 오지랖을 쓸고 다니고 있었다. 세상은 뒤엎인 것이 분명했다.

김성식의 앞으로 한 청년이 다가왔다. 그는 전쟁 전 대한청년회 간부를 하던 사람이었다. 김성식에게 청년단의 교양 강좌를 맡아 달라고 졸라 거북하게 만들던 사람이었다. 김성식은 그가 무사한 것을 보니 일면 반가웠다. 청년은 김성식의 손을 힘차게 잡아 흔들며 인사했다.

"참 조오은 세월이 왔습니다."

김성식은 난감했다. 도무지 그의 정체를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진짜 대한청년단원이었는데 도망가지 못하고 갑자기 변신한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공산당의 프락치로 대한청년단에 침투했던 것인지를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 좋은 세월이 왔다는 이 청년의 말은 진심인지, 아니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위장하는 것인지, 이도 저도 아니라면 나를 떠 보려고 하는 말인지? 김성식은 짧은 동안에 이렇게도 빨리 머리를 굴려야 하는 자신이 모멸스러웠다.

동네에는 붉은 완장을 찬 사람이 부쩍 많아져 있었다. 글씨가 있는 완장도 있지만 대부분이 그저 붉은 헝겊 조각을 차고 다녔다. 글씨가 없는 완장은 또 무슨 의미인지, 대책 없이 건달기로 차고 다니는 건지 그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전쟁 전 반공에 협조하지 않는다고 김성식 가족에게 험악한 눈망울을 굴리던 사람마저 붉은 완장을 차고 있었다. 김성식은 비슬비슬 그들의 시선을 피했다. 붉은 세상이 도래했는데 너는 왜 팔 벗고 나서지 않느냐고 면박이라도 줄 것 같아서였다.

집에 돌아온 김성식은 등목을 하고 책상 앞에 앉아 모처럼 일기를 썼다.

1950년 7월 15일. 마치 가을처럼 푸른 하늘,

집집마다 붉고 푸른 바탕에 붉은 별이 반짝이는 인민공화국기가 나부끼고 있다. 혁명과 해방을 상징한다는 깃발이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이 기폭을 동경의 표적으로 삼았던가. 아니면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증오의 과녁으로 품었던가. 동족상잔이라는 공포는 이제 나에게 비루한 현실이 되고 말았다. 나는 날이 갈수록 작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오늘 마침내 붉은 잉크와 푸른 잉크를 내어 놓고 인공기를 그리기 시작한다. 나도 대문간에 달기 위해서이다. 혹시 격식에 틀리지나 않을까 해서 동회를 지나며 일부러 인공기를 눈여겨 봐 두었다. 완성된 인공기를 사이에 두고 나와 아내 정숙은 멋쩍게 웃었다.

어릴 때 나는 일본 명절에 일장기를 달지 않았다고 칼 찬 순사에게 뺨을 맞는 동네 어른들을 보며 자랐다. 내가 열 살 무렵이었다. 그때 나는 누구에게서 배운 노름이었는지 모르나 크레용을 꺼내 태극기를 그렸다. 나는 어린 가슴을 파닥이며 방벽에 붙인 태극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의 어머니는 말없이 태극기를 뜯어내 불사르셨다. 어머니의 눈가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그 날 밤 나는 공포에 휘말렸다. 순사에게 목덜미를 잡혀 발악을 하다가 꿈을 깨고는 울었다.

불과 5년 전 8·15 때에 나는 비로소 마음 놓고 태극기를 그릴 수 있었다. 그 감격이 어제인 듯한데, 나는 지금 울부짖는 포화 아래서 또 하나의 내 나라 국기를 그려야 한다. 뿐만 아니라 나는 구호도 지어야 한다. 집집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영명하신 우리 지도자 김일성 장군 만세 등이 나붙어 있다.

나도 무엇이라도 붙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기는 것은 지레 겁먹은 생각일까?

"우리의 힘으로 이루는 통일"
"부지런히 일하면 새날이 온다"

막상 이런 문구를 지어 놓으니 또 다른 걱정이 스친다.

"그 자식 후줄근한 타령 하고 있네. 교양감이군." 아니면,

"교수라는 자식이 나름대로 머리를 굴렸군."

하며 내 문간에 침을 뱉을까 두려워서였다.

나는 중립일까?
아니다.
나는 회색인일까?
그것도 아니다.
그런 말들은 모두 나에게 너무 점잖다.
나는 양(兩)다리다. 

덧붙이는 글 | 사학자 김성칠 선생의 일기 <역사 앞에서>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부분입니다.


덧붙이는 글 사학자 김성칠 선생의 일기 <역사 앞에서>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부분입니다.
#인공기 #태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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