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가 더럽히는 우리 삶 (64) 해피

[우리 말에 마음쓰기 574] ‘해피!’, ‘뭐가 해피해져?’ 다듬기

등록 2009.03.09 14:04수정 2009.03.09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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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해피(happy) 1 : 해피!

 

 언젠가 스쳐 지나가듯 본 텔레비전에서 어느 빵집 아주머니가 "해피!" 하고 외치던 말이 문득 떠오릅니다. 예전에는 장사가 잘 안 되었으나 어느 때부터인가 이웃들한테 도움을 받아 아주 잘되고 있다면서 활짝 웃는 가운데 "해피!"라 하시는 모습을 보고는, 얼마나 즐거우시면 저런 말을 다 하실까 싶은 한편, 방송사에서 시킨 말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언제부터 빵집 아주머니까지 '해피'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게 되었나 궁금했습니다. 아니, 가슴이 시렸습니다.

 

 ┌ 해피!

 │

 ├ 행복해요 / 행복해 / 행복하지 그럼

 ├ 좋아요 / 좋아 / 좋고말고 / 아주 좋아

 ├ 기뻐요 / 기뻐 / 더없이 기뻐

 ├ 뿌듯해요 / 보람차요

 ├ 즐거워요 / 즐겁지 / 얼마나 즐거운데

 └ …

 

 지난날 강아지 이름으로 곧잘 지어 붙이던 '해피'입니다. 요즈음에도 강아지 이름을 '해피'라 붙이는 분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제 어릴 적, 1980년대에 '해피라면'이 나와서 우리 동네에서는 꽤 팔리곤 했습니다. 그 라면 한 봉지가 90원이었던 일이 떠오르고(값은 100원이나 동네 가게에서는 늘 10원을 에누리해 주었기에), 오래지 않아 사라져 버린 일도 떠오르는데, 무엇보다도 다른 라면은 '쇠고기맛 라면'이니 '소고기맛 라면'이니 하면서 툭탁툭탁 붙고 있을 때 '해피'라는 영어 이름을 쓴 대목이 퍽 남달랐다고 느꼈어요.

 

 아무래도 그 어린 날에는 라면이름조차 영어로 지어 붙인 식품회사 생각머리가 얄딱구리한 줄을 생각하지 못했을 텐데, 라면이름뿐 아니라 수많은 과자이름이며 빵이름이며 사탕이름이며 초콜릿이름이며, 영어 아닌 이름 찾기가 더 어렵습니다. 담배이름이나 술이름 또한 줄줄줄 영어로 된 이름을 붙이고요.

 

 온누리가 영어바람에 휩쓸려 영어 아니면 안 되는 듯 여기는데다가, 공문서를 영어로 함께 쓰라고 시키고 있습니다. 초등학교와 유치원은 밖과 안을 온통 알파벳 무늬와 글자를 붙여서 꾸미고 잉글리쉬 존을 만들기도 하지만, 학교 밖 가게들도 한결같이 알파벳을 앞세운 큼지막한 간판을 내다 겁니다.

 

 ┌ 장사가 잘되니 좋지

 ├ 장사가 잘되어 즐거워

 ├ 장사도 잘되고 기뻐

 └ …

 

 그러고 보니 아이들한테 입히는 옷을 만드는 회사도 '즐거운 나라'가 아닌 '해피랜드'로군요. '좋은 세상'이나 '기쁜 누리' 또한 아닌 '해피! 해피랜드'입니다.

 

 

ㄴ. 해피(happy) 2 : 뭐가 해피해져?

 

.. 그래도 하루야마는 기분이 들떠 "아아, 부럽다. 이 녀석들 보고 있으면 끝내 주게 해피해진단 말이야." 하고 김빠진 목소리로 말한다. "글쎄, 뭐가 해피해져?" ..  《시게마츠 기요시/고향옥 옮김-졸업》(양철북,2007) 59쪽

 

 인터넷에서 '해피'라는 말을 치면 '해피한교육', '해피한유러닝', '해피 투게더', '해피 게임', '해피라이프 변액연금', '해피 선데이' ……. '해피'를 앞에 붙인 말이 여러모로 뜹니다. 아예 '해피엔딩 노년의 인생학'이나 '해피 버스데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 책도 보입니다.

 

 ┌ happy

 │  1 행복한, 기쁜, 반가운;즐거운;만족한

 │  2 행운의, 다행한(lucky)

 │  3 행복을 더하는, 행복을 낳는, 경사스러운

 │  4 <표현·생각 등이> 적절한, 교묘한, 멋진(apt, felicitous)

 │  5 《속어》 약간 취한, 얼근하게 취한, 만취한

 │  6 《구어》 멍해진, 넋을 잃은;…을 마구 사용하고 싶어 하는;열중한, 홀린

 │  7  [축복·축하의 말] …축하합니다

 │

 ├ 해피해진단 말이야

 │→ 즐거워진단 말이야

 │→ 신난단 말이야

 │→ 좋아진단 말이야

 └ …

 

 영어 쓰기를 좋아하기로는, 일본사람이나 한국사람이나 엎치락뒤치락입니다. 어느 쪽이 더 좋아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두 나라 사람들은 제 나라 말을 안 좋아하기로도 엎치락뒤치락인지 모릅니다. 제 땅 제 겨레 제 삶터 제 목숨 제 이웃 제 동무 사랑하지 않기로도 뒤죽박죽인지 모릅니다.

 

 '즐거운 배움'도, '즐거이 함께'도, '즐거운 놀이'도, '즐거운 삶'도, '즐거운 일요일'도, '즐거운 생일'도 헤아리기 싫은 우리들인지 모릅니다. 아니, 우리 말 '즐겁다'와 '기쁘다'로는 우리 마음자리와 생각밭을 찬찬히 담아낼 수 없다고 여기는지 모릅니다.

 

 ┌ 해피 버스데이 투 유

 └ 생일 축하합니다

 

 영어가 좋으면 영어 노래도 부르고 영어 이름도 지을 수 있습니다. 태어난 날을 '생일' 아닌 '버스데이'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름짓기 하는 사람 마음이며, 생일축하 하려는 사람 뜻입니다.

 

 '너한테'라 말하지 않고 '투 유'라 말할 수 있어요. '너한테'나 '네게'라는 초콜릿이 아닌 '투유' 초콜릿이듯. '사랑스러운 집'이 아닌 '러브하우스'라 하듯. '학교버스'는 안 타고 '스쿨버스'만 타듯.

 

 저마다 익숙한 대로. 저마다 살고픈 대로. 저마다 바라는 대로. 저마다 제멋을 살찌우고 싶은 대로. 저마다 배운 대로. 저마다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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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9 14:04ⓒ 2009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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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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