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위한 전쟁은 없는가

<총칼을 거두고 평화를 그려라>(박홍규, 아트북스, 2003)를 읽고

등록 2009.03.16 18:47수정 2009.03.16 18:47
0
원고료로 응원
17세기의 칼로부터 20세기의 에로까지, 반전과 평화를 주제로 한 작품을 남긴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은 '반전과 평화의 미술'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그러기에 이 책은 미술사에 대한 관심으로도, 반전평화운동에 대한 관심으로도 읽힐 수 있는 책이다. 나는 서구 미술사에 대한 지식도 관심도 없기 때문에 당연히 반전평화운동에 대한 당시 예술가들의 태도나, 저자(박홍규)의 관점, 또는 현재 우리 사회에 던져 주는 시사점 등에 주목하여 책을 읽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각각의 작품에서 받은 인상을 쓰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으나, 하나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그 그림을 소개한 저자의 '생각'에 집중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이 책을 읽은 목적에 더욱 어울릴 것이다.

정당한 전쟁과 부당한 평화


오늘날의 반전평화운동은 이미 상당히 넓은 지지 기반을 가지고 있다. 반전과 평화라는 구호는 민주주의나 인권, 자유나 평등과 같이 상식적인 수준에서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전쟁에 대한 저자의 극단적인 혐오와 증오의 정서도 어렵지 않게 이해될 수 있으리라 본다. 하지만 책의 뒤표지에도 눈에 띄게 쓰여 있고, 저자가 본문 가운데에서도 인용한 "가장 정당한 전쟁보다도 부당한 평화가 훨씬 낫다.(p23)"라는 키케로의 말은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있다.

저자가 그 말을 얼마나 긍정하는지는 책의 마지막에 있는 '마치는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무리 전쟁이 정당하더라도 그것은 부당한 평화보다 못하다. 어떤 전쟁도 정당할 수 없고, 어떤 평화도 부당할 수 없다.(p278)", "모든 전쟁은 나쁘다. 어떤 전쟁도 찬양되거나 기념되거나 추억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전쟁에 대해서도 합리화나 정당화나 역사화는 있을 수 없다.(p277)"라는 언급을 보면 저자는 앞서 인용한 키케로의 말에 거의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키케로의 말이나 저자의 말을 들었을 때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심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동서고금의 역사 속에서 살아 있는, 제국주의 세력이나 부당한 파쇼적 권력에 맞서 민중들의 생존과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저항했던 전쟁들―시민혁명이든 민족해방혁명이든 사회주의혁명이든 인류 역사의 진보를 이끌어온 사건으로서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는 모든 저항의 전쟁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독자들이 그러한 물음을 품게 될 것을 저자도 알고 있었던 것인지, 이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전쟁 자체를 거부한다고 해서 전쟁이 일어난 구조나 배경을 무시하거나 불문에 부쳐서는 안 된다. 대부분의 전쟁은 제국주의의 탐욕에서 나오고 그것이 낳은 군사문화에 의해 되풀이된다.(p279)" 이 말에서 저자는 전쟁의 원인이 제국주의의 탐욕에 있다고 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제국주의의 탐욕에 맞선 민중들의 저항권을 긍정하고 있지도 않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난 구조나 배경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구조나 배경이 어떠하냐에 따라 긍정해야 할 전쟁이 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좀 거칠게 해석하자면 아무래도 위의 말은 '전쟁을 거부하는 것은 대부분 제국주의의 탐욕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전쟁은 그 구조와 배경에 따라 다양하게 평가되어야 하지만, 그래도 일단 모든 전쟁은 나쁘다' 정도로 읽힌다.

책에는 이런 해석을 뒷받침하는 말이 이어진다. "반전 평화 미술은 진정한 사실주의, 진실한 민중예술, 참된 민주예술이다. 선전이나 광고여서는 안 된다. 당파적인 주장이거나 편파적인 의견이어도 안 된다.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추구하는 것만이 진실이다.(p279)"라는 말을 통해 저자는 반전 평화 미술이 여러 가지 다른 판단이 개입할 수 있는 어떤 정치적 주장이나 선전이 되어서는 안 되고, 몰가치적이고 절대적으로 오직 전쟁 없는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뭔가 시원하지 못한 느낌이 남는다. 과연 저자와 같이 무조건적으로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태도가 '제국주의의 탐욕'에 반대하고 사회의 진보를 이끌어내는 데에 도움이 될까? 전쟁이라는 단어는 그 개념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상황에 활용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대척점에 있는 평화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이다. 무조건적으로 '전쟁적 상황'을 거부하고 '평화적 상태'만을 지향하는 태도는 오히려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고 민중들의 저항권을 심각하게 저해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전쟁국가인 미국은 세계 곳곳을 누비며 전쟁을 거듭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가 이미 당했고, 어쩌면 한반도의 운명도 그렇게 될지 모른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대한 침공을 개시하였을 때, 그 나라의 민중들에게는 어떤 선택권이 있었을까? 그들에게는 미국의 침공에 맞서서 그들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전쟁을 시작하거나, 아니면 두 손 놓고 '평화적으로' 미국의 점령을 받아들이는 것뿐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당연히 '제국주의의 탐욕'과 맞서는 전쟁을 선택했고, 미국은 너무 손쉽게 접수(?)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두 나라에서 아직도 승리하지 못한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민중들의 끈질긴 저항이 미국이 세계의 깡패국가로서 이른바 '악의 축' 또는 '불량국가'들을 접수하고 제국주의적 확장을 막아내는 데에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들의 전쟁―아니, 항쟁이라는 쪽이 더 정확하겠다―을 '제국주의의 탐욕'을 막아낸 전쟁이라는 의미에서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는 모순된 말로 표현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무튼 전쟁에 대한 무조건적인 부정과 몰가치적인 평화 지향의 태도는 공상에서는 언제나 옳고 언제나 가능할지 모르지만, 현실에서 실제로 그 둘 사이의 선택을 강요받는 폭력적인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에는 그렇게 무 자르듯 간단명료하게 답이 나오지만은 않을 것이다.

요약하자면 나는 전쟁에 반대하는 저자의 선명한 입장에 대해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전쟁은 항상 제국주의의 이익을 보장하고 민중들의 목숨을 앗아갔으므로 전쟁은 민중들에게 '절대악'이라는 식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전쟁이 민중들에게 목숨까지 강요하는 그야말로 극단적인 폭력적 상황이라는 것은 십분 동의하지만, 우리는 그에 못지않게 혹은 그보다 더 잔혹하게 민중들을 착취하고 탄압하는 '평화적인' 권력들을 무수히 보아 오지 않았던가.(대한민국의 2009년도 아마 그런 시대에 속하지 않을까.) 그러한 '평화적인' 권력에 저항하는 민중들의 저항은 단순히 전쟁은 나쁘고 평화는 좋다는 식의 에누리 없는 이분법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민중들에게 진정한 평화란 무엇이며, 그 평화는 어떻게 찾아오는가에 대한 역사적인 고민이 필요한 것이다.

애국주의와 이분법

저자는 이 책의 '여는 글'에서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사상적 바탕이 되었던 애국주의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애국의 진정한 의미는 조국의 어떤 점을, 왜 사랑해야 하는가, 또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따져 물은 다음에 비로소 구할 수 있다. 즉 '애국주의'를 옹호하는 것이 정당하려면 민주주의, 자유, 인권과 같은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가 그 안에 담겨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파시스트 국가와 같이 인간성을 오히려 파괴하는 집단을 비판하고 저항하는 것은 외려 조국을 사랑하는 자의 의무라 할 것이다.(p24~25)"

저자가 애국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저자가 '애국'이라는 가치보다는 '민주주의', '자유', '인권'과 같은 가치를 먼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당히 의미 있는 말이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우리의 근현대사만 놓고 보더라도, 애국이라는 말을 정권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으로만 생각했던―생각하도록 강요받았던― 때가 있지 않았던가. 당시 우리의 순진한 애국주의는 군사독재정권을 지탱해 주는 힘이 되었고, 민주적 권리의 실종과 노동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 그리고 베트남 민중들에 대한 학살이라는 결과로 돌아왔다. 

저자는 이어서 "국가의 부도덕에 눈감지 않고 양심의 호소에 귀기울였던 사람들이 감내했던 고난을 생각해보라. 맹목적인 애국주의는 책임 있는 자율적 판단을 결여했다는 점에서 미성숙이고, 사고하지 않는 이분법에 기초하므로 독선적이며 당연히 비이성적이다. 우선 그런 비이성에서 해방되어야 반전과 평화를 말할 수 있다.(p25)"라는 말로 자율적 판단과 비이성으로부터의 해방을 촉구하고 있다. 애국이라는 것은 대개 우리에게 긍정적인 가치로 인식되지만, 애국은 그 말 자체로 긍정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애국의 대상인 현재의 국가 권력이 어떠한 모습인가에 따라서 긍정성을 띌 수도, 부정성을 띌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민주, 자유, 인권, 평등과 같은 보편적 가치들을 놓고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애국주의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아주 적절하다. 그런데 한 가지 딴죽을 걸자면, 애국주의에 대해서는 '사고하지 않는 이분법'을 적용하는 것을 비판한 저자가 왜 전쟁이라는 대상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못하였는지 의문이다. 애국이라는 가치에 대해서도 이분법적 접근을 넘어서 그 긍정성을 궁리해 보아야 하듯이, 반전이라는 가치에 대해서도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이다.

평화의 미술을 기다리며

어느 시대에나 예술가들은 대개 어떤 정치적 현실에 깊이 소속되기보다는 그것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부유(浮游)하기를 원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을 어떤 사람들은 순수성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순수성이 아니라 탈정치성일 뿐이다. 정치적 현실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순수라고 부른다면, 한 집단의 구성원들의 삶의 문제를 결정하는 정치라는 영역은 자연스럽게 순수하지 못한 더럽고 불순한 것으로 왜곡되고 만다. 그렇게 왜곡된 정치는 민중들의 외면을 받게 되고  결국 탈정치의 이데올로기를 순수라는 말로 포장하는 것은 정치적 상황의 변화에 무관하게 자신의 예술적 성과를 인정받고자 하는 예술가들의 변명이거나, 이미 정치적 패권을 장악한 자들이 정치에 대한 민중들의 관심을 무너뜨리기 위해 벌이는 속임수에 불과하다.

불행하게도 우리 미술계에는 그러한 변명 혹은 속임수를 넘어서고자 하는 노력이 일천한 것이 사실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유럽이나 미국, 또는 남미의 다양한 작가와 작품을 소개하면서, 그 사이사이에 우리 미술계에 대한 아쉬움과 비판을 토로하고 있다. 우리 역사에도 수많은 전쟁이 등장하지만, 전쟁 속의 영웅들이 아니라 그 속에서 죽어가는 민중들을 인식하거나 전쟁의 야만성을 폭로한 작가와 작품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언급은 책의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데, 저자는 우리 미술계 속의 반공주의를 우리 미술의 종속성과 문화적 편식증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우리 미술의 반공주의는 다른 어떤 예술 분야보다 강한 탓인가? 전시회는 레핀(Ilya Efimovich Repin, 1844~1930)을 제외하고는 더더욱 소개된 적이 없다. 여하튼 우리 문화의 편식증은 어떤 나라보다 극심하다.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세계문화의 보편적인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 프랑스나 미국 문화만 보고 세계문화 운운하는 것은 그야말로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는 격이나, 한국 현대미술은 그 두 나라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p116)"

저자는 이 책에 소개된 유럽 평화미술의 뿌리를 고야로 설정하여, 우리 미술계에도 고야의 정신으로부터 시작하는 평화미술의 전통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들라크루아나 마네뿐 아니라 민중의 봉기를 그리 도미에나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77)도 고야에서 출발했다. 사실 우리에게도 그것이 1919년 삼일운동의 유관순 이후 지금까지 수없이 이어지는 민중저항의 그림으로 남아야 했으나 우리에게는 그런 전통이 없다. 불행한 일이다. 바로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고야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p68~69)"

저자는 우리에게는 저항의 그림, 평화미술의 전통이 없다고 하지만,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반전과 평화의 미술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물론 그 역사는 아주 짧지만 내 생각에는 80년대에 본격화되었던 민중미술운동에서 평화미술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본다. 물론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비록 서양미술이 갖고 있는 것만큼의 전통이나 성과는 없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민중미술운동과 같은 중요한 움직임들이 있었고, 극심한 문화적 편식증을 앓고 있는 우리 사회에 작지만 의미 있는 성과들을 남겨 왔다고 본다. 더욱이 오늘날의 반동적 정치상황을 생각한다면 민중미술의 성과와 지향은 더욱 계승되어야 할 것이 마땅하므로 우리 평화미술의 시작점 또한 그것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저자는 우리 예술가들에게 따끔한 충고를 계속했다. 특히 우리 예술인들과 국민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피카소에 대한 이야기로 우리 예술인들을 비판하는 부분은 무릎을 칠 정도로 공감이 갔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군국주의 500년에 대한 도전이다. 이는 또한 고야의 <5월 3일>에서 이어져 내려온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예술가들에게 피카소 정신을, 피카소의 사랑과 기행만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예술정신을 따르도록 요청한다. 피카소의 예술정신을 한마디로 시대정신에 투철한 반항적 예술정신이다.(p221)" 피카소의 '시대정신에 투철한 반항적 예술정신'은 비단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누구나가 다 본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전쟁과 미술이라는 주제를 다룬 이 책을 읽으면서 특별히 어렵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미술에는 워낙에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미술사적인 내용이라든가 화법이나 풍조에 대한 내용은 굳이 끝까지 이해하려 하지 않고 과감히 그냥 훑어 읽고 넘어갔기 때문이다. 미술은 빼고 반전의 사상에만 초점을 두고 읽은 탓인지 뭔가 좀 아쉬운 느낌은 남는다. 저자가 전하고자 했던 이야기의 반밖에 전해 듣지 못한 느낌이라고 할까.

그리고 앞서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이야기한 저자의 전쟁에 대한 관점 문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저자도 다른 부분에서는 민중의 저항권에 대해 대단히 힘주어 긍정하고 있는데, 어째서 전쟁에 대한 무조건적 부정을 표방하면서 민중들의 저항의 전쟁은 한 번도 상정해 보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전쟁과 예술이라는 쉽지 않은 주제에 대해서 방대한 자료와 지식을 동원해 책을 써 낸 저자의 노력에는 큰 박수를 보낸다.

역사 발전의 주체는 바로 인간이고,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인간의 정신과 마음이다. 지식은 그것만으로 실천으로 이어질 수는 없지만, 지식과 정서가 합치되면 인간은 역사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으로서 행동하게 된다. 인간의 해방과 역사의 진보를 추구함에 있어서 예술의 역할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것에 있다. 저자의 바람과 비슷하게, 앞으로 우리에게도 그러한 예술의 역할을 자각하고 실천하는 '반항적' 예술가, '혁명적' 예술가들이 넘쳐나기를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 다음 블로거뉴스에도 송고하였습니다.


덧붙이는 글 다음 블로거뉴스에도 송고하였습니다.

총칼을 거두고 평화를 그려라 - 반전과 평화의 미술

박홍규 지음,
아트북스, 2003


#최규화 #박홍규 #반전미술 #평화미술 #저항예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기록하는 사람. <사다 보면 끝이 있겠지요>(산지니, 2021) 등의 책을 썼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최근 알게 된 '평생직장', 정년도 은퇴도 없답니다 최근 알게 된 '평생직장', 정년도 은퇴도 없답니다
  2. 2 경남, 박근혜 탄핵 이후 최대 집회 "윤석열 퇴진" 경남, 박근혜 탄핵 이후 최대 집회 "윤석열 퇴진"
  3. 3 "은퇴 하면 뭐 하고 살거냐?" 그만 좀 물어봐요 "은퇴 하면 뭐 하고 살거냐?" 그만 좀 물어봐요
  4. 4 "V1, V2 윤건희 정권 퇴진하라" 숭례문~용산 행진 "V1, V2 윤건희 정권 퇴진하라" 숭례문~용산 행진
  5. 5 우리 모르게 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정부는 왜? 우리 모르게 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정부는 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