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벚나무 무성한 그늘 아래 두고온 그리움

[지리산 암자기행①]소설 <피안앵>의 모티프가 된 올벚나무가 있는 지장암

등록 2009.04.04 14:11수정 2009.04.04 23:32
0
원고료로 응원
a

지장암으로 오르는 들머리. ⓒ 안병기

지장암으로 오르는 들머리. ⓒ 안병기

 

오래 전 무전여행길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던 지장암

 

작년 초여름, 지리산 기슭을 두루 여행했다. 그중에서도 화엄사에 들른 차에 젊은 날 하룻밤을 신세졌던 지장암이란 암자를 찾았던 일은 내게 각별한 의미를 지닌 일이었다.

 

지장암은 화엄사 일주문 앞에 있는 다리를 건너가면 바로 지척에 있다. 지장암 들머리로 들어서자 가슴이 먼저 알고 콩닥거린다. 그때 건강이 좋지 않았던 주지 스님은 여태 살아계실는지. 지장암으로 들어가는 길 왼쪽 공터에 낯선 비 하나가 서 있다. 혹시 저 비가 주지 스님의 묘비가 아닐까. 확인한 것도 아닌데 가슴 한쪽이 슬며시 아려왔다. 아아, 사대 육신으로 이뤄진 인간이라는 존재는 얼마나 덧없는 존재인가.

 

내가 지장암에 처음 온 것은 1980년대 초 무전여행 길에서였다. 여행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행려병자의 그것처럼 정처없는 떠돎이었다는 편이 더 사실에 가까울는지 모른다. 아무런 준비 없는 무계획하고 무모한 여행이었다. 텐트 같은 숙박장비는 물론 간단한 코펠 따위조차 없었으니까. 숙식을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가장 큰 문제였다. 이모저모 궁리 끝에 절에서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세상인심이 제아무리 각박하다 한들 세간보다는 출세간이 나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장암에서 묵기 전날 밤엔 곡성 태안사에서 일박했다. 어찌어찌 초가집 요사의 방 한 칸을 차지하고 잠을 청했다. 호롱불을 켜고 앉은 절집의 적막이 나를 여수(旅愁)에 사무치게 했다. 바람벽에 넘실거리는 호롱불의 그림자가 마음을 심란하게 흔들어 불면의 밤을 지새웠다. 옛 고향집의 정취가 떠올라 마음이 울컥했던 것이다.

 

다음 행선지를 화엄사로 잡고 아침 일찍 능파교를 건넜다. 때는 초여름, 압록 근처를 지날 때 앞뒤 잴 것 없이 섬진강 물 속으로 뛰어들어 다슬기를 잡았다. 구례읍에 도착하거든 점심과 바꿔 먹으려는 심산이었다. 잡은 다슬기로 구례읍 식당에서 점심과 맞바꿔 먹었다. 저녁에 가까운 늦은 점심이었다. 다슬기 잡는 데 빠져 시간을 너무 지체했던 것이다.

 

화엄사를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그러나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발바닥이 곪아 제대로 발걸음을 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를 악물다시피 길을 걸었다. 이윽고 화엄사에 도착하니, 밤 11가 훨씬 지난 늦은 시간이었다. 일주문은 입을 굳게 닫고 있었다. 그동안 절집에서 줄곧 숙식을 해결해 온 나로선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이 몹시 당혹스러웠다.

 

딱히 갈 데가 없었다. 무작정 국립공원 관리사무소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관리사무소 뒤꼍으로 돌아가니 마침 탁구대가 있는 게 아닌가 궁즉통이라더니 그 말이 영락없었다. 탁구대를 침대 삼아 발라당 드러누웠다. 불 켜진 창 너머로 국립공원 관리사무실 안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직원 4명이 고스톱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고스톱도 국립공원 관리 업무의 하나인가?"라는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스르르 잠이 들려는 찰나였다. 한 사나이가 느닷없이 밖으로 나왔다. 광도 팔지 못 했으니 이참에 방뇨의 희열이라도 만끽하려 했던 모양이다. 나를 발견한 그는 꽥 소리를 질렀다. 고매한 선사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우매한 대중에게 "할!" 대성 일갈을 터뜨리듯이.

 

"여보세요. 여기서 잠자면 안 돼요. 여긴 숙박 업소가 아닙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잘 곳이 없으니 여기서라도 어떻게 하룻밤 신세를 질 수 없을까요?"

 

구구절절 사정을 늘어놓으면서 통사정했다. 그런 내가 딱해 보였는지 "정 그렇다면 요 위에 지장암이라는 암자가 있는데 거기 한번 가 보라"라고 넌지시 일러준다. 직원이 가리킨 방향을 따라 지장암이라는 암자를 향해 올라갔다. 컴컴한 산길을 한참이나 걸어가는데 등뒤에서 누군가 자꾸 따라오는 기척이 들렸다. 뒤따라 오는 사람을 기다렸다가 지장암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마침 그도 거기로 가는 길이라고 한다.

 

27년의 세월이 흐른 후 다시 찾아가다

 

a

이곳을 찾는 이와 가장 먼저 눈을 맞추는 건물인 승방. 이 건물 뒤에 동백나무와 올벚나무가 서 있다. ⓒ 안병기

이곳을 찾는 이와 가장 먼저 눈을 맞추는 건물인 승방. 이 건물 뒤에 동백나무와 올벚나무가 서 있다. ⓒ 안병기

 

지장암은 비구니들만 사는 절집이었다. 동행한 사내의 뒤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있으니, 주지로 추측되는 스님 한 분이 들어오셨다. "저녁 공양은 했느냐?"라고 묻는다. 먹었노라고 대답했다. 배가 몹시 고프긴 했지만 밤 11시를 넘긴 야심한 시각에 밥 차리는 수고를 끼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 내 속내를 짐작했음인지 스님께서 벽장 속에서 초코파이 몇 개를 꺼내주셨다.

 

나와 길동무했던 사내는 주지 스님의 아들이었다. 서울에서 의사 노릇을 한다고 했다. 한복 차림이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도인의 풍모가 엿보일 지경이었다. 날더러 언제 한 번 경기도 성남에 있는 '기원정사'로 찾아오라고 했다. 그의 얘기로 미루어 보건대 아마도 불교개혁 운동을 펼치는 사람이 아닌가 짐작했다.

 

초코파이 얻어먹은 값이라도 해야겠다는 듯이 스님에게 수작을 걸었다.

 

"스님, 혹시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장성 백양사에서 요양하시지 않으셨는지요?"

"아니, 처사님이 그걸 어떻게 아세요?"

"백양사는 음기가 강해서 병 고치러 들어갔다 오히려 병을 키워서 나오기 쉽지요."

 

이쯤 되자 나를 뭔가를 아는 사람으로 생각했던지 스님의 눈빛이 달라진다. 그러나 허무의 자식일 뿐인 내가 무엇을 알겠는가. 아무래도 그 무렵엔 내게 약간의 신기(神氣)가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일은 종종 있는 해프닝이었으니까.

 

이튿날 아침, 일찍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고 눈을 떴다. 하다못해 마당이라도 쓸고 나서 공양을 얻어먹어야 떳떳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선뜻 몸을 일으킬 형편이 아니었다. 온통 곪아버린 발바닥이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 방바닥을 딛고 설 수도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벽을 붙들고서라도 어찌어찌 일어서 보려고 온갖 몸부림을 쳤다. 그렇게 몇 번을 시도한 끝에야 겨우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빗자루 자국이 선연하도록 마당을 깨끗이 쓸었다.

 

아침 공양을 마치자마자 곧장 배낭을 메었다. 언제 준비했을까. 주지 스님이 "점심으로 먹으라"며 김밥을 내미신다. 그리고는 "더 드리고 싶지만 처사님이 부담스러워 할 것 같아서"라며 만 원짜리 한 장까지 손에 꼭 쥐여 주었다. "빈집에 소 들어온다" 말은 이런 때 쓰는 말이지 모른다. 그 돈은 이후 내 무전여행에 매우 긴요한 종자돈이 돼 주었다. 세월이 흐르고서도 그때 일을 생각할 때면 고마운 마음이 늘 새로웠다.

 

마침내 27년만에 다시 지장암으로 들어선다. 석가모니가 입적한 뒤부터 미륵불이 이 세상에 올 때까지 부처 없는 세계에 머물면서 태어나고 죽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지옥도·아귀도·축생도·수라도·인간도·천상도 등 6도(六道)의 미혹한 중생들을 제도하는 대비 보살이 지장보살이다. 그 가없는 자비심을 기려 무변심(無邊心)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지장을 통한 구제를 희구하는 지장신앙은 관음신앙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민간신앙이다. 지장암이란 암자 이름은 그런 지장보살의 명호에서 빌어온 이름이다.

 

고은 시인의 소설 <피안앵>의 모티프가 된 올벚나무

 

a

승방보다 한 층 더 높은 축대 위에 자리 잡은 법당. ⓒ 안병기

승방보다 한 층 더 높은 축대 위에 자리 잡은 법당. ⓒ 안병기
a

암자 입구 오른쪽에 있는 요사채. ⓒ 안병기

암자 입구 오른쪽에 있는 요사채. ⓒ 안병기

 

지장암은 무척 쇠락해 있었다. 내가 묵었던 요사는 노래 부르는 송창식의 어깨처럼 한쪽 지붕이 약간 아래로 처져 있었다. 승방 앞에서 "계세요?"라고 인기척 소릴 냈지만 안으로부터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승방보다 한 층 더 높은 축대 위에 자리 잡은 법당으로 올라갔다. 가정 예불에나 쓰일 정도로 작은 관음보살 한 분이 홀로 법당을 지키고 있다. 일체를 초극한 의연한 모습이다. 어쩌면 그 초극 속엔 가난한 암자의 살림을 견뎌야 하는 숙명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건지 모른다.

 

법당을 등 뒤에 남겨두고 내려와서 승방 앞을 지나 뒤꼍으로 돌아간다. 그곳엔 천연기념물 제38호 올벚나무가 오래된 동백나무와 짝하여 나란히 서 있다. 내가 지장암에 온 목적 가운데는 이 올벚나무를 보려는 계획도 빼놓을 수 없다. 벚나무에 '올'이라는 접두어가 붙은 건 이 나무가 다른 벚나무보다 일찍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이 올벚나무는 나이가 약 300살가량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화엄사를 중창한 벽암각성스님(1575~1660)이 심은 것이라는 얘기가 전한다.

 
a

천연기념물 제38호 올벚나무. ⓒ 안병기

천연기념물 제38호 올벚나무. ⓒ 안병기

벚나무 껍질은 습기를 막는 효과가 탁월하다고 한다. 그래서 활의 줄이 늘어지지 않게 바깥을 감싸는 데는 이보다 더 좋은 재료가 없다는 것. 벽암각성스님이 누구신가. 임진왜란·병자호란 때 승군을 이끌고 참전했으며 남한산성 축조에도 일익을 담당했던 스님이 아니신가. 그로 미루어 어느 스님보다 더 병장기에 관심을 많이 가졌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활 만드는 데 중요한 재료 가운데 하나인 벚나무를 절 주변에 많이 심게 했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올벚나무는 모두 사라지고 남아 있는 건 달랑 이 한 그루뿐이다.

 

화엄사(華嚴寺) 앞을 흐르는 냇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으며 80여년 전까지 두 그루가 남아 있었으나 한 그루는 절을 수리할 때 베어서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 나무의 판자 한 조각으로 적묵당(寂墨堂)의 안마루를 깔고도 남았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거목(巨木)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화엄사 누리집에서

 

화엄사 누리집은 8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올벚나무가 두 그루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고은 시인의 기억은 이와 조금 다르다. 고은 시인이 쓴 체험적 문화기행집 <절을 찾아서>(책세상, 1987)에는 "이곳에는 내 소설 <피안앵>의 이름이 된 올벚나무가 서 있다. 두 아름드리 나무다"라고 쓰여 있다. 그걸 보면 올벚나무 한 그루가 베어진 게 그렇게 먼 일은 아닌 듯하다. 화엄사 누리집은 전해 들은 이야기를 옮겨 놓은 듯이 적어 놓았지만 고은 시인의 언급이 좀 더 직접적이고 단정적이다. 고은 시인의 비상한 기억력에 늘 감탄해온 나로선 고은 시인의 말에 더 신뢰를 둔다.

 

안내문엔 이 올벚나무가 높이 12m, 뿌리 부분 둘레 4.42m 크기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가운데 줄기 등 여러 부분이 톱으로 잘라져 있는 등 생채기가 많아 실제로는 훨씬 왜소해 보인다. 그나마 지금은 초여름이라 푸른 나뭇잎이 감싸고 있으니 망정이지 잎이 돋지 않은 채 꽃만 피어 있을 적에 와서 바라본다면 앙상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이 올벚나무는 달리 피안앵(彼岸櫻)이라고도 부른다. 이 올벚나무가 피우는 벚꽃은 날씨에 돌발적인 변수가 따르지 않는 한 식목일 무렵에 절정을 이룬다고 한다. 그때 벚꽃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그 화사한 아름다움에 빠져 잠시나마 세상의 번뇌를 벗어난다 해서 피안앵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고은 시인이 쓴 장편소설 <피안앵>(1962 출간)은 이곳에서 모티프를 얻어 쓰였다고 한다. 후에 이 소설은 <산산이 부서진 이름>(1977)이라는 제목으로 개작되었다. 그리움을 안은 채 서로를 애타게 그리는 비구승 심해와 비구니 묘연 스님. 그러나 둘 사이엔 불가의 계율이 가로막고 있다. 수도의 길을 가는 과정에서 겪는 인간적 번민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룬 이 소설은 뒤에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1991)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되기도 했다.

 

올벚나무와 작별하고 나서 다시 승방 앞마당으로 돌아온다. 문득 마당을 내려다보니 승방 바로 코앞까지 콘크리트로 발라져 있다. 승방의 귀갑살불발기문 안쪽에선 여전히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모든 중생을 구제해 주시려 애쓰는 나무지장보살이시여, 구제받을 가망이라곤 없는 형편없는 중생 하나 다녀갑니다. 암자 어딘가에 상주할 지장보살에게 하직인사를 하고서 하릴없이 지장암을 나선다. 내려오면서 텃밭에 있는 비(碑)에 힐끔 눈길을 준다. '가까이 가서 주지 스님의 입멸을 확인할까'하는 생각이 잠시 스쳐간다.

 

에라이, 그만 두자.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무엇이든지 간에 바닥을 확인하지 않고선 직성이 풀리지 않는 지병을 앓는 시대다. 그러나 확인의 끝에선 씁쓸한 비애가 기다릴 뿐이다. 끝까지 확인하지 않아도 좋은 여백, 삶의 끝까지 지워지지 않을 그리움을 가졌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미확인 비행물체는 우리 시대의 허공에 핀 가상의 꽃이다. 지리산 화엄사 지장암이여. 내 생애 끝까지 미확인 비행물체로 남아 있으라.

덧붙이는 글 | 작년 여름에서 금년 겨울까지 한 동안 여행기를 쓰지 않았다. 그 동안 무의미한 여행기를 남발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의미없는 여행기를 써제끼다가는 가슴속에 묻어두고 홀로 들여다 볼 추억마저 씨가 마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록하지 않으면 철저히 무(無)가 되고만다는 사실이 오래 전에 다녀온,  한참 뒤늦은 여행기를 쓰도록 부추겼다. 그쯤 헤아리고 읽어주시기를 …. 

2009.04.04 14:11 ⓒ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작년 여름에서 금년 겨울까지 한 동안 여행기를 쓰지 않았다. 그 동안 무의미한 여행기를 남발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의미없는 여행기를 써제끼다가는 가슴속에 묻어두고 홀로 들여다 볼 추억마저 씨가 마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록하지 않으면 철저히 무(無)가 되고만다는 사실이 오래 전에 다녀온,  한참 뒤늦은 여행기를 쓰도록 부추겼다. 그쯤 헤아리고 읽어주시기를 …. 

#지리산 #화엄사 #지장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낙동강 해평습지서 '표범장지뱀' 본 전문가 "놀랍다"
  2. 2 "도시가스 없애고 다 인덕션 쓸텐데... '산유국 꿈' 경쟁력 없다"
  3. 3 윤석열 정부 따라가려는 민주당... 왜 이러나
  4. 4 공영주차장 캠핑 금지... 캠핑족, "단순 차박금지는 지나쳐" 반발
  5. 5 껌 씹다 딱 걸린 피고인과 김건희의 결정적 차이, 부띠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