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궂은 한자말 덜기 (69) 지각

[우리 말에 마음쓰기 617] ‘알다’와 ‘知覺’, ‘늦다’와 ‘遲刻’

등록 2009.04.23 11:12수정 2009.04.23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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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각, 地角, 知覺, 遲刻

 

.. 미요시 다쓰지가 여기서 지혜라는 말을 일부러 끄집어낸 것은, 영혼에 관계되는 사건을 지각(知覺)하는 마음의 작용을 딱 들어맞게 표현하기에는 석가 이래 쓰여져 온 이 말밖에 적절한 것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  《나카노 고지/서석연 옮김-청빈의 사상》(자유문학사,1993) 263쪽

 

 '지혜(智慧)'는 한자말입니다. 우리 말은 '슬기'입니다. 일본사람이 한자말로 '지혜'라 적었다면, 우리는 우리 말로 '슬기'로 옮겨야 합니다. 미국사람이 미국말로 '위즈덤'이라 적었다 하여도, 한글로 '위즈덤'이라고 적겠습니까.

 

 "끄집어낸 것은"은 "끄집어낸 까닭은"으로 손보고, "영혼(靈魂)에 관계(關係)되는 사건(事件)을"은 "넋과 얽힌 일을"이나 "얼을 다루는 일을"로 손봅니다. "마음의 작용(作用)"은 "마음 움직임"으로 다듬고, '표현(表現)하기에는'은 '나타내기에는'으로 다듬으며, "석가 이래(以來)"는 "석가 뒤로"나 "석가 때부터"로 다듬습니다. "적절(適切)한 것이"는 "알맞는 말이"로 손질하고, "때문일 것이다"는 "때문이리라"나 "때문이다"로 손질해 줍니다.

 

 ┌ 지각(地角) : 어느 귀퉁이에 있는 땅 한 조각이라는 뜻으로, 구석지게 멀리

 │    떨어진 땅을 이르는 말

 │   - 그곳은 튀어나온 지각 덕분에 물살이 그리 세지 않았다

 ├ 지각(地殼) : 지구의 바깥쪽을 차지하는 부분

 ├ 지각(池閣) : 연못 가까이에 있는 누각

 ├ 지각(知覺)

 │  (1) 알아서 깨달음

 │   - 더위를 먹을 대로 먹어 버린 우리의 지각은

 │  (2) 사물의 이치나 도리를 분별하는 능력

 │   - 지각을 차리다 / 지각이 나다 / 지각이 들다 / 지각이 부족하다

 ├ 지각(遲刻) :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출근하거나 등교함

 │   - 전동차의 고장으로 직장인들의 지각 사태가 벌어졌다 / 결석, 지각뿐만 아니라

 │

 ├ 지각(知覺)하는 마음의 작용을

 │→ 느끼는 마음 움직임을

 │→ 깨닫는 마음 움직임을

 │→ 헤아리는 마음 움직임을

 └ …

 

 모두 다섯 가지로 국어사전에 실린 한자말 '지각'입니다. 이 가운데 첫째 '地角'은 달리 고쳐쓸 수 없기 때문에 그대로 두어야 한다고 생각할 분이 있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참말 그러할까요? 우리한테는 '지각' 아니고는 우리 생각이나 느낌을 담아낼 낱말이 없을까요? 그토록 오래도록 한 곳에서 살아온 우리들이 '땅을 가리키는 알맞춤한 낱말' 하나 빚어내지 못하여 바깥말을 받아들이기만 해야 할까요?

 

 이리 따지고 저리 살피어도 마땅한 낱말이 없으면 기꺼이 바깥말을 받아들일 노릇입니다. 그렇지만 이리 따지지도 않고 저리 살피지도 않으면서 바깥말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어쩌지요. 이리도 헤아리고 저리도 생각하면서 우리 깜냥껏 우리 말을 키울 생각이 없다면 어떻게 하지요.

 

 ┌ 땅

 ├ 땅조각 / 땅쪼각

 ├ 땅뙈기

 ├ 땅테 / 땅덕 / 땅가죽

 ├ 땅덩이 / 땅덩어리

 └ …

 

 '地殼' 같은 낱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지구안쪽-지구바깥쪽'과 '지구안-지구밖'처럼 새 낱말을 빚을 수 있습니다. 반드시 '地 + 殼'이라고만 해야 하지 않습니다. '지구 + 안 / 지구 + 밖'으로 새말을 빚을 수 있는 한편, '땅 + 안 / 땅 + 밖'으로 새말을 빚어내어도 잘 어울립니다. 우리 스스로 이처럼 새말을 빚어내려 하지 않으니 아직까지 낯설다고 느낄 뿐입니다.

 

 ┌ 우리의 지각은 → 우리 생각은 / 우리 머리는

 ├ 지각을 차리다 → 생각을 차리다 / 얼을 차리다

 ├ 지각이 나다 → 생각이 나다 / 슬기가 나다 / 철이 나다

 └ 지각이 부족하다 → 생각이 모자라다 / 슬기가 모자라다 / 마음그릇이 모자라다

 

 '池閣'은 그야말로 쓸데없는 한자말입니다. 이런 쓸데없는 한자말이 국어사전에 너무 많이 실려 있는 바람에, 정작 우리가 알맞게 살리고 생각하고 키울 토박이말 이야기는 국어사전에 못 담기기 일쑤입니다.

 

 '知覺'은 말 그대로 '알다'나 '깨닫다'를 한자로 덮어씌운 낱말입니다. '알 知 + 깨달을 覺'이라, 토박이말 '알다'나 '깨닫다' 한 마디로는 어울리지 않다고 느끼며 이 한자말을 써야 한다고 생각할 분이 있을는지 궁금한데, '알다'나 '깨닫다' 한 마디로 모자라다면, 그에 걸맞는 새말을 이 또한 살포시 빚어내면 됩니다.

 

 ┌ 알고깨닫다 / 알며깨닫다

 └ 깨닫고알다 / 깨달으며알다

 

 꼭 한 낱말로 삼지 않아도 됩니다. '알고 깨닫다'와 '깨닫고 알다'처럼 적어도 넉넉합니다. 반드시 한 낱말로 삼아야만 말이 되지 않습니다. '지각'만이 널리 쓸 만한 말이지 않습니다.

 

 ┌ 전동차의 고장으로 직장인들의 지각 사태가 벌어졌다

 │→ 전동차가 고장나 직장인들이 일터에 늦게 가는 일이 벌어졌다

 │→ 전동차가 고장나 직장인들이 일터에 늦는 일이 벌어졌다

 └ 결석, 지각뿐만 아니라 → 빠지거나 늦는 일뿐 아니라

 

 마지막으로 '늦는' 일을 가리키는 한자말 '遲刻'입니다. 배움터며 일터며 온통 '지각'을 말하고 '지각생'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어느 누구도 알쏭달쏭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늦게 온 사람"이면 '늦은이'나 '늦기쟁이'인데, 늦게 온 일을 놓고는 왜 '지각'이라고만 하는지를.

 

 배우는 곳이나 일하는 곳이나, 하루 오지 않을 때에 '빠지다'라 하기보다 '결석(缺席)'이라 해 버릇하는 우리들입니다. 배움터는 '결석'이고 일터는 '결근'입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어느 누구나 배움터나 일터로 전화를 걸어, "저 오늘 몸이 너무 아파 하루 빠져야겠습니다." 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오늘 결근해야겠습니다"처럼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빠지다' 한 마디로는 어딘가 아쉬워 '결석-결근'을 받아들였을까요. '늦다' 한 마디로는 무엇인가 서운해 '지각'을 받아들였을까요.

 

 지난날 일제 강점기 때부터 일본제국주의에 길들고 찌들고 물든 틀거리를 털어내지 못한 탓에, 군대고 학교고 회사고 온통 '지각-결석(결근)' 같은 한자말로만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셈일까요. 나라는 홀로서고 사회는 사람이 임자 되는 흐름으로 나아간다고 말을 하지만, 정작 속알맹이는 홀로서지 못하고 사람이 임자 되지 못하는 우리 터전인 셈인가요.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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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3 11:12ⓒ 2009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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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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