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여' 라는 말을 알고 계십니까

[시 더듬더듬 읽기 113]나희덕 시 '여,라는 말'

등록 2009.04.27 13:35수정 2009.04.27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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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 서도 바깥재랩여 ⓒ 안병기

거문도 서도 바깥재랩여 ⓒ 안병기

바다를 떠돌 때 배운 '여'라는 말

 

젊었을 때, 심심하면 아는 형의 고기잡이 배에 자리 하나를 빌어 바다를 돌아다니다 오곤 했다. 1톤 정도나 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코딱지만 한 배였다. 워낙 배가 작다 보니 고충이 한둘이 아녔다.

 

무엇보다 화장실이 없다는 게 제일 불편했다. 매번 고물 뒤에 쭈그리고 앉아 바다에다 대충 실례를 해야 했다. 당시 배에는 우리 둘뿐만 아니라 제주 해녀 두 사람도 함께 타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몹시 신경이 쓰였다.

 

해녀들은 등에 산소통을 맨 채 바닷물 속으로 잠수해서 전복이나 해삼 따위를 따오곤 했다. 대개 한 시간 정도 입수(入水)하고 나오면 심해압력 때문에 숨이 어찌나 가빴던지 거의 초주검 상태가 됐다. 그녀들이 입은 잠수복은 네오프렌 재질로 된 것이라 겉이 고무 성분으로 코팅돼 있어 보온효과가 뛰어나긴 했지만 너무 더운 것이 흠이었다. 그 때문에 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바로 샤워를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이 해녀들은 당시에 둘 다 꽤 젊은 나이였다. 그럼에도 우리가 보든지 말든지 아무렇지 않게 잠수복을 홀라당 벗고서 샤워를 하곤 했다. 오히려 바라보는 사람이 민망해서 얼른 다른 곳으로 눈길을 피해야 했다.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롤링(rolling)이 아주 심한 것이 흠이었다. 폭풍이 불어 와서 파랑이 높아지면 작은 배가 어찌나 출렁이는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 형에게 불평을 쏟아놓았더니만 큰 배일수록 그만큼 롤링의 폭이 더 커서 엄청난 멀미를 동반한다고 하면서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 후부터는 배의 롤링이 잦은 게 흠이 아니라 장점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난 어느덧 롤링을 즐길 만큼 바다에 익숙해졌다. 이런 몇 가지 점을 빼고 나면 나의 선상 생활은 나무랄 데 없이 행복한 것이었다. 그런데 배를 타고 가다 보면 물결이 하얗게 부서지는 곳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 형에게 물었더니 물속에 바위가 있어 서로 부딪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물속에 잠긴 바위를 '여'라고 부른다고 알려준다. 여는 수면 아래 잠복해 있다가 물이 빠져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고 했다. 그래서 배를 운항하는 선장들은 물결이 하얗게 부서지는 걸 보고 거기에 여가 있다는 걸 눈치를 챈단다. 여를 발견하면 배의 이물을 틀어서 배가 진행하는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여는 안전한 뱃길을 가로막는 암초였다.

 

나는 새로이 배운 '여'라는 말에 도취했다. 그 이후 내겐 여라는 작은 '바위 섬'이 인생에 대한 하나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바다의 여처럼 내 마음에도 여가 있다. 나 자신도 모르는 나, 깊숙이 감춰진 욕망의 여가 있다'라는 걸 생각했다. 처음으로 '여'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이래 난 곧잘 '여'라는 말의 의미를 내가 처한 상황에 끌어다 대입하곤 했다.

 

젊어서 나는 떠들썩한 술자리를 좋아했다. 그러나 조금씩 나이 들어 가면서부터는 혼잣술을 마시는 게 더 편하고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문득 앞자리에 앉은 술친구의 기분을 맞춰야 하는 번거로움이 싫어지기 시작하면서부터다. 혼잣술을 마시게 되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바닥을 들여다보는 일이 많아진다.

 

술이 위장을 채워감에 따라 숨겨진 욕망의 풍경이 차츰 물 위로 솟아오른다. 곧 색(色)이며 동시에 공(空)이기도 한 나를 삭제해버리고 싶은 순간이 닥친다. 그러나 묵묵히 기다려야만 한다. 가슴 속 저 아래께에 퇴적해 있던 감정들이 썰물처럼 모두 빠져나갈 대까지. 그러고 나면 왠지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고요해지는 걸 느낀다.

 

그래도 맨 마지막까지 빠져나가지 않고 남아 있는 감정의 찌꺼기가 있다. 극단적인 이기심과 위선이라는 감정이다. 이 두 가지 감정은 남들은 알지 못하지만 나만 아는 '숨은 여'다. 마음속 깊은 곳에 돌출해 있는 완강한 여, 숨겨져 있던 여들이 형체를 드러내는 순간, 난 새삼스러운 듯이 깨닫는 것이다. 나 자신이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인가를. 사실 내가 나 자신을 들여다 본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내 존재의 왜소함을 확인한다는 것은 각성임과 동시에 쓰디쓴 환멸이냔 말이다.

 

아마도 나는 끝까지 저 '여'들를 떠나보내지 못한 채 허덕이다 죽을는지 모른다. 난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절망을 느끼곤 했다. 그 절망이 싫어서 나는 결국 담배에 이어 술마저 끊어 버렸다. 젊어 한때는 술과 담배가 사랑보다 더 소중했던 때가 있었건만…. 그렇게 술과 담배는 내 인생의 수면 아래로 잠복한 여가 되었다. 난 수시로 다짐하곤 한다.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그 '여'가 다시는 물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잊혀진 것들은 모두 여가 된다지만

 

나희덕의 '여,라는 말'이라는 시는 이 '여'를 소재로 삼고 있다. 어쩌면 물속에 잠겨 있다시피해서 미처 제 존재를 각인시키지 못한 여를 시의 소재로 삼은 최초의 시가 아닌가 싶다. 

 

잊혀진 것들은 모두 여가 되었다

망각의 물결 속으로 잠겼다

스르르 다시 드러나는 바위, 사람들은

그것을 섬이라 할 수 없어 여,라 불렀다

울여, 새여, 대천어멈여, 시린여, 검은여......

이 이름들에는 여를 오래 휘돌며 지나간

파도의 울음 같은 게 스며 있다

물에 영영 잠겨버렸을지도 모를 기억을

햇빛에 널어말리는 동안

사람들은 그 얼굴에 이름을 붙여주려 하지만

어느새 사라져버리는 바위,

썰물 때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그 바위를 향해서도 여,라 불렀을 것이다

그러니 여가 드러난 것은

썰물 때가 되어서만은 아니다

며칠 전부터 물에 잠긴 여 주변을 낮게 맴돌며

날개를 퍼덕이던 새들 때문이다

그 젖은 날개에서 여, 라는 소리가 들렸다

     - 나희덕 시 '여,라는 말' 전문 

 

196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나희덕 시인은 연세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지금까지 펴낸 시집으로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사라진 손바닥> 등이 있다. 산문집으로는 <반 통의 물>,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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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표지 ⓒ 문학과지성사

시집 표지 ⓒ 문학과지성사

고백하건대, 나는 이 시인의 시를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그래도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예전엔 진짜 그랬다. 이 시인에게선 모범생 냄새가 풀풀 나기 때문이다. 시도 그렇지만 시집 날개에 실린 시인의 단정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범생이 이미지가 더욱 실감이 나게 다가온다.

 

물론 범생이란 게 꼭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모범생이라서 이 시인의 시가 싫다는 것은 전적으로 내 편견이다. 그러나 내 편견에 전혀 합당한 이유가 없는 것도 아니다. '범생이'이란 말 속에는 세상 속에서 부대끼며 살지 않았다는 것, 따라서 관념의 틀을 벗어던질 기회가 별로 없었다는 뜻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인에겐 매우 탁월한 능력이 있다. 자신에게 혹시 남아있을는지도 모를 관념의 틀을 감각적인 이미지로 슬쩍 감쌀 줄 안다. 게다가 빈틈없이 언어의 그물을 짜는 능력까지 있어 어디 한 군데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문장을 구사한다. 이런 많은 장점이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듯한 이 '범생이'를 끝까지 싫어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다. 

 

잊혀진 것과 잊혀져야만 하는 것

 

앞서 구구절절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듯이 '여'란 존재의 왜소함 때문에 섬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엔 작은 바위다. 그 이름의 낯섦과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뱃사람이 아니면 알기어려운 소외된 사물이다.

 

시인은 시의 첫머리에서 다짜고짜 '잊혀진 것들은 모두 여가 되었다'라고 선언한다. 선언한다는 것은 매우 단정적인 결론을 내린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인이 아주 동정심까지 버린 것은 아니다. "오래 휘돌며 지나간/ 파도의 울음" 이라거나 "물에 영영 잠겨버렸을지도 모를 기억"이라는 표현을 통해 '여'에 대해 자기 나름 대로의 연민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모르긴 해도 "어느새 사라져버리는 바위"의  얼굴에 이름을 붙여주려는 사람들 속엔 틀림없이 그도 끼어 있을 것이다.

 

새삼스럽긴 하지만, '시인이란 무엇 하는 존재인가'를 생각한다. 내가 보기엔 시인이란 죽은 기억을 불러내 뭇사람들에게 환기시켜주는 영매(靈媒)들이다. 보잘것없는 것, 비천하고 안쓰러운 것, 결코 망각의 바다로 밀어 넣어서는 안 되는 의미들을 망각의 수면 아래서 위로 다시 끄집어 내 형상화함으로써 잊혀진 것들의 한을 씻겨주고 딱딱하게 굳은 사람들의 정서를 부드럽게 반죽하는 것이다.

 

시의 끄트머리에 이르러 시인은 "여가 드러난 것은/ 썰물 때가 되어서만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며칠 전부터 물에 잠긴 여 주변을 낮게 맴돌며/ 날개를 퍼덕이던 새들 때문이다"라고 새들의 존재와 역할을 환기시킨다. 그런데 젖은 날개를 단 그 새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가. 시인 자신인가 아닌가. 어쩌면 나희덕은 너무나 사소하고 비천해서 망각 속으로 사라진 것들이 '여'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시인이 된 사람인지 모른다.

 

새벽마다 일어나면 책상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긴다. 이때가 마음 속의 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간이다. 일상이란 바다에 새로이 솟구친 암초 혹은 여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생각한다. 오늘은 무엇을 물속으로 가라앉힐 것인가. 가라앉히고 싶은 것과 반드시 가라앉혀야만 하는 것 사이에 일상을 꾸려가는 자의 고민이 있다. "세상사 모두가 4박자 뽕짝"이라더니 세상만사가 여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아아, 여와 더불어 태어났다 여와 더불어 가는 인생이여. 

2009.04.27 13:35 ⓒ 2009 OhmyNews
#나희덕 #문학과지성사 #섬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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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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