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와 애국심의 상관관계?

중국인들의 외국어 사용실태를 보며

등록 2009.04.28 10:35수정 2009.04.28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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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킨-살결물, 아이스크림-얼음 보숭이, 오프사이드-공격어김..."

한국 사람들도 한번쯤은 들어 보았을 북한식 외래어들이다. 정체불명의 외국 말이 범람하는 요즘이다 보니 이런 순화된 외국어는(가끔 개그 프로그램에서 희화화되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우리말을 지키기 위한 가상한 노력으로 인정받고 있다. 북한이라면 핏대부터 세우는 어르신들도 이 점만큼은 상당수가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보자. 외국어 남용이 꼭 문화 사대주의나 애국심 부족 때문일까?

외국 문물이 급속도로 생활 패턴을 바꾸고 있는 현대 중국의 경우를 보자. 가령 여기에 '可乐'라는 단어가 있다. 중국어로 '콜라'를 의미한다. 발음은 '크르'라고 하며 한자를 풀이하자면 '멋지고 즐겁다' 정도의 뜻이 된다. 아마도 콜라를 맨 처음 수입했을 중국의 수입업자는 이 낯선 음료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가급적 좋은 뜻의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중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형 마트 '까르푸'의 한자 표기는 '家乐福(중국어 발음으로는 찌아 르 푸)'이다. 뜻을 풀이하자면 '가정의 즐거움과 복'으로 제법 괜찮은 느낌의 이름이 된다. 더구나 '복 福' 자는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글자 중 하나이다. 그래서 혹자는 한국 시장에서 참패한 까르푸가 유독 중국에서 성공한 이유는 이름을 잘 지어서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중국인들은 외국어를 중국어로 옮길 때 발음도 비슷하고 뜻도 기왕이면 비슷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으로 표기하는 때가 종종 있다.

문제는 이런 작명 '센스'를 발휘하기가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이다. 바로 뜻글자라는 한자의 특성 탓이다. 소리글자를 쓰는 우리나라에서도 '오렌지'냐 '아륀지'냐를 두고 논란이 분분한 마당에 뜻, 발음까지 생각해 말을 만드는 작업은 그야말로 두세 배의 수고가 가는 일이다. 수천 자나 되는 중국 한자를 일일이 찾아 비슷한 발음을 연결 짓고 뜻까지 어색하지 않게 하는 과정이 어디 보통 일이겠는가. 그러다보니 정 비슷한 뜻이 없을 때는 '카드 카', '커피 배' 등의 글자를 아예 새로 만들기도 하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발음을 무시하고 뜻만 통하도록 단어를 조합한다.

그러다보니 중국식 외국어에는 한국, 일본과 달리 번역된 것들이 많다. 핸드폰을 '손기계'라는 뜻의 '手机', 디지털 카메라는 숫자 번호('슈마'는 중국어로 '디지털'을 뜻한다)로 물체의 상을 담는 기계라는 '数码相机', 버터는 노란 기름이라는 '黃油' 등이다.

이런 단어들은 이미 외국어라고 부르기 힘들 것이다. 그러다보니 중국인들과 일상적인 대화를 하다 보면 외국어 발음을 듣게 되는 빈도가 한국, 일본에 비해 현저히 낮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외국어 사용이 적은 이유가 그들의 애국심이 투철해서라기보다는(북경 올림픽 당시 까르푸 불매운동 등을 생각하면 투철한 게 어느 정도 사실인 것도 같지만) 중국어의 구조 자체가 남의 말을 빌려다 쓰기 불편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과 일본은 어떠한가? 일본 가타카나의 경우 발음 수가 많지 않고 받침도 없어 본토 사람이 듣기에는 '초큼' 엄한 발음이 되기는 하지만 그럭저럭 별다른 고민 없이 그들 식의 외국어를 가져다 쓴다. 또한 한국은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의 노력에 힘입어 웬만한 외국어는 대부분 표기할 수 있는 우수한 한글을 갖고 있다.

즉 소리글자는 발음만 적당히 끼워 맞추면 외국어를 자국어처럼 사용하기가 쉽고 편리하다. 그래서 알파벳 등의 소리글자가 보다 광범위한 문화권에서 사용되고, 뜻글자에 비해 비교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반면 이 편리함 이면에는 소리글자 이용자일수록 남의 언어를 받아들이기가 너무 쉽고, 그러다보니 언어가 사회 문화적 권력관계에 의해 오염될 소지도 더 많다는 함정이 있다.
  
문화 사대주의로 인한 외국어 남용은 분명 심각한 문제이다. 하지만 외국어 사용에 대해 무조건 애국심이 없어서라고 몰아붙이는 것도 곤란하다. 외국어가 범람하는 시대에 우리 언어를 지키고 한편으로 풍부하게 하는 길은 한 가지이다. 우리 언어의 특수성을 고려, 합리적인 외국어 사용을 위한 사회적 합의를 마련하는 것이다.


참고로, 외신들은 우리나라 '재벌'을 표기할 때 'financial clique'나 'plutocracy'대신 'chaebol'이라는 한국어를 그대로 사용한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영미나 유럽권의 대기업들은 우리나라의 재벌과는 전혀 다른 역사 문화적 배경을 가졌다. 이를 영어로 번역해 표기해 버리면 자칫 외국인 독자들이 오해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외국어를 받아들일 때 필요한 것은 이런 식의 융통성이 아닐까.
#외국어 #중국 #애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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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과 관련하여 식생활 문화 전반에 대해 다루는 푸드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습니다. 대학가의 음식문화, 패스트푸드의 범람, 그리운 고향 음식 등 다양한 소재들로 글을 쓰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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