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ㅊ'을 알게 해준 선물

등록 2009.05.01 16:13수정 2009.05.01 16:13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대학 들어가기 전까지 교과서를 제외하고 읽은 책은 열 손가락 안쪽이었다. 책 읽기를 싫어하는 사람이었지만 읽고 싶어도 읽을 책이 없었다. 이러니 생각은 짧고, 사고하는 능력은 빈약했다.


대학 들어가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시험 볼 때였다. 고등학교까지 사지 선다형 시험과 단답형 시험에 익숙했고, 읽은 책이 없으니 서술형 또는 논술식 시험은 엄청난 고역이었다. 1학기 성적을 받아보니 'D' 천국이었다. 겨우 낙제를 면했던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어떻게 할 방법도 없었다. 2학기는 필기 공책을 완전히 외웠다. 대학 시험을 외워 치른 사람은 아마 나밖에 없을 것이다. 외운 것이 적중했든지 'D'가 'A'로 변했다.

하지만 대학 시험을 마냥 외워 치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생각하는 힘을 길러야 했다.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지 못하면 다른 사람 힘을 빌려야 했다. 1학년 다 마칠 때까지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군대를 갔다. 제대 후 복학을 했는데 하늘에서 보화가 떨어졌다.

태어나서 그 만큼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고, 생각하는 깊이는 상상을 초월했다. 메마른 땅에 단비였다. 나보다 5살 많았지만 그는 나를 '동수씨'라 불렀고, 나는 형이라 불렀다.

a  5살 위 형이 선물한 <철학의 제문제>

5살 위 형이 선물한 <철학의 제문제> ⓒ 지학사


어느 날 형이 책을 선물했다. 소광희.이석윤.김정선 공저인 <철학의 제문제>였다. 선물을 많이 받은 것은 아니지만 책 선물은 처음이었고, 그것도 헌책을 선물받으니 기분이 묘했다.

책 표지부터 머리 아픈 철학답게 딱딱하다. 아마 요즘 책 표지를 이렇게 하여 냈다가는 엄청 욕먹을 것이다. 책 펴낸 날짜를 보니 1981년 2월 1일이다. 형에게 책 선물을 받은 때가 1991념 가을이니 딱 10년 된 책이었다. 올해가 2009년이니 28년 전에 나온 책이다.


형이 철학책을 선물한 이유는 나와 대화를 해보니 생각이 짧고, 사유하는 능력이 빈약했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철학 기초를 배워 사유하는 능력을 기르도록 한 배려였다.

비록 헌책이지만 선물 받았다는 것 자체가 기뻤다. 하지만 책을 편 순간 아연질색했다. 깨알같은 글씨와 한자 투성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워낙 눈이 나빠 작은 글씨는 잘 읽지 못한다. 거기에다 한자까지 있으니 겉으로는 좋아라 했지만 마음 속으로 선물 하려면 상대방 능력도 봐가면서 해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a  깨알같은 글씨와 수많은 한자때문에 잘 읽을 수가 없다,

깨알같은 글씨와 수많은 한자때문에 잘 읽을 수가 없다, ⓒ 지학사

옛날 책은 보면 한 페이지를 두 칸으로 편집했는데 바로 이 책이 한 페이지에 두 칸으로 된 책이었다. 글자 크기도 8 정도이다. 한 페이지에 몇 글자가 들어갔는지 세워보았는데 1872자였다. 한 페이지가 원고지 10장 정도니 얼마나 많은 분량인가.

557페이지니 요즘 책으로 하면 1000페이지 정도 될지 모르겠다. 눈이 아팠다. 돋보기가 필요하다고 하니 형은 허허 웃었다.

돋보기로 볼 정도로 작은 글씨와 한자, 사유 능력이 부족했지만 꼼꼼히 읽었다. 모르는 한자가 나오면 옥편을 찾아가면서 읽었다. 처음에는 진도가 나가지 않아 답답했다. 책을 덮어버리고 싶었지만 꾸역꾸역 나갔다. 조금씩 빨라졌고, 갈수록 재미가 붙었다.

아직도 생각은 엷다. 사유하는 능력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철학을 알지도 못한다. 하지만 <철학의 제문제>가 철학의 'ㅊ'자가 무엇인지 알게 한 것만은 분명하다. 받았던 선물 중 잊을 수 없는 선물인 이유이다. 책값은 5000원으로 28년 전 책값으로는 꽤 비싼 값이다.

덧붙이는 글 | <잊을 수 없는 선물> 응모글


덧붙이는 글 <잊을 수 없는 선물> 응모글
#선물 #철학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당신이 태어날 때 당신은 울었고, 세상은 기뻐했다. 당신이 죽을 때 세상은 울고 당신은 기쁘게 눈감을 수 있기를.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3. 3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4. 4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5. 5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