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 할머니, 홍대 앞 진출하다

박재동 화백도, 리영희 선생도 "대단합니다"

등록 2009.05.06 15:01수정 2009.05.06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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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여든 엄마 앞에서 재롱잔치를 여는 반백의 딸들.

여든 엄마 앞에서 재롱잔치를 여는 반백의 딸들. ⓒ 김혜원

여든 엄마 앞에서 재롱잔치를 여는 반백의 딸들. ⓒ 김혜원

"여든 살 흰머리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캔버스 부여안고 애노구 녹여내는 엄마 인생에

꽃이 피면 꽃 그리고 꽃이 지면 님 그리고

알뜰한 그 솜씨에 봄날은 왔다."

 

백발 팔순 어머니를 위해 전통가요 '봄날은 간다'를 개사한 축가를 코믹한 율동과 함께 선보이는 반백의 세 딸들. 라디오에서 듣던 유행가 가락을 뽑아가며 엄마 앞에서 재롱떨던 대여섯 살 어린시절이 어제 같은데 어느새 그 엄마가 팔순이라니 믿어지지 않는 모양으로 이내 눈물을 떨어뜨리고 만다.

 

자식 된 마음 누군들 같지 아니할까. 관객 역시 자손들의 마음을 다 헤아리겠다는 듯 박수로 응원하지만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지난 4월 25일 김포의 한 아담한 전원주택에서는 색다른 팔순잔치가 열렸다.

 

"제 어머니가 일흔넷 늦은 나이에 그림 공부를 시작하셨어요. 전문작가는 아니지만 그동안 애쓰신 것에 대해 자식들이 뭔가 어머니 의미 있는 일을 하나 만들어 드리고 싶어서 전시회도 열어 드리려고요. 팔순연 역시 사전 전시회 형식으로 가지려고 합니다. 아버님도 모시고 오세요. 부모님 모두 환영입니다."

 

여성학자로, 발달장애 딸을 둔 엄마로, '한부모 가정 자녀를 걱정하는 진실모임' 활동 등으로 잘 알려진 오한숙희씨. 나와는 방송 일로 알게 되었지만 연로하신 부모를 모시고 있는 딸이라는 공통점 때문인지 서로에게 쉽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던 사람이며 문득문득 휴대폰 문자로 내 아버지의 안부를 물어주는 세상에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잘 지내세요. 요즘 아버님 건강은 좋으신가요? 문득 생각나서 안부 전합니다.'

 

연로하신 부모를 모시고 있는 자식들은 다른 사람들의 부모에게도 늘 관심이 많다. 마치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처럼 그들끼리도 서로 통하는 게 있기 때문이다. 부모를 모시고 사는 자식들끼리는 서로를 바로 알아본다. 말하지 않아도 그들만이 아는 아픔, 그들만이 느끼는 고통, 그들만이 느끼는 작은 보람, 깊은 사랑을 절절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박재동 화백도, 리영희 선생도 참석한 흐뭇한 팔순 잔치

 

a  한숙자 할머니의 그림엔 말로는 다 못한 가슴 속이야기 담겨있다

한숙자 할머니의 그림엔 말로는 다 못한 가슴 속이야기 담겨있다 ⓒ 김혜원

한숙자 할머니의 그림엔 말로는 다 못한 가슴 속이야기 담겨있다 ⓒ 김혜원

팔순잔치가 열리는 날 일기예보에서는 봄비를 예보하고 있었지만 다행히 구름만 끼었을 뿐 비는 오지 않았다. 작은 마당에는 정갈하게 음식이 차려지고 일찍 오신 손님 중에는 어느새 막걸리 한 두 잔에 기분 좋게 취하신 분들도 보인다. 수수하고 소박하면서 정감 있는 동네 할머니 팔순 잔치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인사를 드리려고 찾아도 쉽게 눈에 보이지 않는 오늘의 주인공 어머니. 어디 계신가 했더니 손님들 음식 챙겨주느라 정신이 없으시다.

 

"많이 드셔. 뭘 좀 더 줄까요?"

 

고운 한복 챙겨 입으시고 높이 고인 잔칫상 가운데 앉아 자손들의 큰 절을 받으시는 전통적인 팔순연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막상 손님들 사이에 섞여 음식도 나누시고 자신의 그림 이야기도 전하시는 어머니를 뵈니 여든의 나이가 도무지 실감되지 않을 정도다.

 

"손녀딸이 미술공부를 하는데 물감을 어찌나 많이 사들이는지 말이야. 곁에서 보니 어떤 건 굳었다고 버리고, 어떤 건 조금 남았다고 버리고…. 아깝잖아, 돈 주고 산 건데…. 그래서 버리는 물감 주워 모아서 그냥 장난 삼아 해 본건데…. 남들한테 보여주려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내가 놀이 삼아 하는 건데 우리 딸이 이런 일을 만드네. 부끄럽지 뭐. 식구들이나 두고 보면 될 걸 뭘 전시회까지 한다고…."

 

집안 구석구석에 걸려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는 당신의 그림들이 부끄러우신지 그림 설명을 부탁해도 연신 별거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시는 어머니. 하지만 그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내 눈에도 평생 붓을 잡아본 적이 없는 일흔넷 할머니가 7년간 심심파적으로 배우고 익히며 그린 그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 완성도는 뛰어나다.

 

이 날 축하연에 참석한 박재동 화백은 어머니의 그림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림을 그리실 때 가장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술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스스로 행복하고 누군가에게 그 행복감을 전해주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그림 그리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고 그래서 밥 먹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그림에 빠지신 어머니의 열정을 보면서 그림쟁이로 반성을 했습니다."

 

"예술의 기쁨을 몸으로 느끼시고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해 내시는 어머니야말로 진정한 예술가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전시회를 겸한 이번 팔순연을 보고 노인이 되어도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해낼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노인문화를 바꾸는 계기가 되길 기대합니다."

 

"자기들 잘 사는 것, 그것 이상의 효도가 어디 있겠어?"

 

a  친구로서 팔순과 개인전을 축하해 주러 오셨다는 리영희 선생님.

친구로서 팔순과 개인전을 축하해 주러 오셨다는 리영희 선생님. ⓒ 김혜원

친구로서 팔순과 개인전을 축하해 주러 오셨다는 리영희 선생님. ⓒ 김혜원

몇 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대중 앞에서 자주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셨던 리영희 선생님 역시 감탄을 금치 못하십니다.

 

"오한숙희 선생과 인연으로 초대됐는데 처음엔 어머니가 그림을 그리셨다고 해서 뭐 습작정도 하셨겠지 생각을 했어. 그런데 여기 와서 직접 보니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선 거야. 깜짝 놀랐어. 그림들 속에 이야기가 있고 그림 속에 삶이 녹아 있거든. 대단해. 최고야."

 

10여 년 전 역시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당시에는 더 이상 세상에 자신을 드러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하며 깊은 우울함에 빠져 메말라만 가던 어머니. 하지만 그림을 만나면서 쩍쩍 갈라졌던 논이 봄비를 만나 촉촉해지듯 다시 마음의 토양이 촉촉해지고 온몸에 새로운 기가 충전되더니 드디어 꽃망울이 폭죽처럼 터지는 여든의 어느 봄날 당신 인생을 축제로 꽃 피웠으니, 어머니 인생의 봄날은 지금부터가 아닌가 싶다.

 

"효도란 자식이 부모를 지고 가고 업고 가고 끌고 가는 것이 아니죠. 서로에게 부담을 주는 관계는 부모자식이라도 오래 가지 못하거든요. 부모도 나와 같은 오감을 가진 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이 먼저인 것 같아요. 그리고 손잡고 함께 가는 거죠. 친구처럼 동료처럼 손잡고 동행하는 관계가 효도라고 생각해요."

 

이런 딸의 '효'론에 대해 어머니는 어떤 생각이실까? 정작 '효'를 받으실 부모는 자식들에게 어떤 '효'를 바라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효? 자식들이 뭘 어떻게 해줬으면 하고 바라는 게 없느냐고? 그런 거 없어요. 잘 먹이고 잘 입히고 돈 잘 주고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저 내가 바라는 건 형제간에 우애 있고 자기들 건강하게 잘 사는 모습 보여주는 거야. 부모에게 그 이상의 효도가 어디 있겠어. 그럼 된 거야. 그게 효도거든."   

  

a  손두부 음식점을 하는 큰 딸 내외가 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묻어난다.

손두부 음식점을 하는 큰 딸 내외가 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묻어난다. ⓒ 김혜원

손두부 음식점을 하는 큰 딸 내외가 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묻어난다. ⓒ 김혜원

 

팔순연 자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어둔한 손놀림으로 신문지 위에 붓글씨를 쓰시던 아버지가 생각났다. 치매 증상이 심해지신 후 방바닥이며 벽이며 옷이며 지워지지 않는 먹물 얼룩을 남기는 것이 싫어 때때로 아버지 몰래 쓰던 먹물통을 숨겨두던 못된 딸 이었던 내가 부끄럽기 짝이 없다.

 

이번 어버이날엔 아버지가 쓰실 화선지와 먹물을 잔뜩 사다 드려야겠다.

덧붙이는 글 | 한숙자 할머니의 팔순 그림전은 홍대입구 벼레별씨 골목안 커피집(전화: 070- 7764-2361)에서 2009년 5월 1일-5월 10일까지 열린다.

2009.05.06 15:01ⓒ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한숙자 할머니의 팔순 그림전은 홍대입구 벼레별씨 골목안 커피집(전화: 070- 7764-2361)에서 2009년 5월 1일-5월 10일까지 열린다.
#한숙자 #팔순 #그림전 #오한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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