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것만 짧게 간추려 고해하시오

[시 더듬더듬 읽기 118]정영의 시 '평일의 고해'

등록 2009.05.10 15:59수정 2009.05.11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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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전주 중앙성당. 예전에 전주 살 적에 집 근처에 있어 가끔 찾아가던 곳이다.

전주 중앙성당. 예전에 전주 살 적에 집 근처에 있어 가끔 찾아가던 곳이다. ⓒ 안병기


가톨릭 신자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 해보고 싶은 고해성사

조국이란 무엇인가. 거창하긴 하지만, 가끔 조국과 나와의 관계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볼  때가 있다. 젊어서 한때는 이 나라에 태어난 것을 저주할 때도 있었다. 국가와 정부는 다른 것이라고? 한마디로 말하면 그건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내 생존의 조건을 규정하는 건 국가를 대신해서 권력을 행사하는 정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마라"라는 말과 한 치도 틀리지 않는다. 사람과 그 사람의 내부에 도사린 죄를 분리해서 대응한다는 게 어디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지 인간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 아니다.

내가 한창 이 나라에 태어난 것을 저주하던 1970년대보다 지금 내 생존의 조건들은 얼마나 더 나아졌을까. 여러 가지 걱정스럽고 우려스러운 일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민주화나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옛날보다야 훨씬 나아진 것만은 사실이다. 물론 학생·노동자 등 많은 사람의 희생이 밑거름되어 여기까지 온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단체가  하나 있다. 바로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란 단체다.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생기게 된 것은 1974년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면서부터였다. 그해 9월, 첫 번째 시국선언을 발표하는 것으로 사제단은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그 후 사제단은 3·1 민주구국선언·5·18 광주 민주 항쟁·박종철고문치사사건 등 암울한 시기, 결정적 순간마다 국민들의 편에 서서 독재와 싸움으로써 국민의 뇌리에 자신의 존재를 선명하게 각인시켰다.

현재도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그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2003년에는 새만금 갯벌과 생명평화를 염원하는  65일간의 기나긴 삼보일배 여정에 스님들과 더불어 동참하기도 했으며,  지금 이 시간에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일원인 문규현·전종훈 신부 등이 수경스님 등 불교계 인사들과 더불어 사람·생명·평화라는 모토 아래 순례의 길을 걷고 있다.

일찍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가톨릭의 부패에 절망한 나머지 종교개혁을 부르짖었다. 그 결과 갈라져 나온 것이 바로 신교였다. 그러므로 신교가 훨씬 개혁적이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에선 구교인 가톨릭이 훨씬 개혁적인 종교로 비치고 있는 측면이 없지 않다. 그것은 아마도 이러한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벌인 활동에서 받은 인상 때문인지 모른다.


몇 번인가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도 가톨릭 의식에 참여해본 적이 있다. 물론 교회 내에서 벌어졌던 친지들의 결혼식에 참석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렇게 '수박 겉핥기'로 들여다본 천주교 의식은 무척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무신론자인 나로서도 한 번쯤은 꼭 해보고 싶은 게 있긴 하다. 그건 바로 고해라는 의식이다. 그렇게 자신의 죄를 털어놓고 나면 속이 아주 후련한 기분이 들 것 같기 때문이다. 

 성자도 소녀도 거렁뱅이도 모두 바쁜 세상이다


정영의 시 <평일의 고해>는 가톨릭의 고해성사를 소재로 삼고 있는 시다.

절두산 순교 성지 고해소엔 작은 문구 하나 적혀 있다.
'중요한 것만 짧게 간추려 고해하시오'
성자도 소녀도 거렁뱅이도, 역시 인간은 오늘도 피곤하다.

더덕의 손이라기엔 너무도 여린 잎 한장 씹으면
갈기갈기 찢기는 더덕뿌리 향내가 입 안에 쫙 흘러요
육즙이 고이는 것처럼 키스할 때처럼
이생에선 독한 향내가 나를 치유해요
인간의 냄새만큼 독한 게 있으려고요, 늘 피곤하거든요
그들이 날 흉터 없이 치유해요
난 이것에 대해 고해하겠어요
인간을 내 치유제로 여겨 바르고 먹고 마셨노라고
손잡았노라고 몸 비볐노라고
슬픈 정액냄새 속에서 태어났고
비린 젖을 먹고 자랐노라고
그렇게 지구에 몸 박고 뿌리내려 살찌웠노라고
문 박차고 나가 첫사랑의 심장을 파먹고 반생을 다시 시작했노라고
휘황찬란한 도시 사람 그림자 속에서 단잠 잤노라고
지독한 꽃 같은 어머니 손을 찢으며 시를 썼고
사랑한 발가락을 오래도록 씹으며 여행을 다녔고
벗들의 가슴을 때려눕혀 그 눈물로 내 눈을 씻었고
그들의 달디단 입냄새로 내 시궁창을 닦아냈고
밤마다 사랑해달라고 속삭였노라고
머리채를 뚝 잘라 너도 너도 너도 순교하라고 속삭였어요
사람고기 이빨로 확 뜯으면 입 안에 육즙이 쫙 흘러요
잘살겠다고, 이글이글한 눈동자를 눈물이 확 덮칠 때처럼

아, 한마디로 난 독한 인간들을 한잎씩 씹으며
살았고 살고 살아갈 것이라고
중요한 것만 짧게 간추려 고해합니다

덧붙이자면, 누구든 날 씹어도 좋아요
          - 정영 시 '평일의 고해' 전문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난 정영 시인은 2000년 문학동네 신인상에 '암스테르 Dam' 외 4편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 '평일의 고해'는 시인의 첫시집인 <평일의 고해>에 수록된 시다. 

정영 시인은 이 세계를 고통과 상처로 가득 차 있는 곳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자신을 "잘못 배달된" 피자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상처를 덮어두지 않고 공공연하게 드러낸다. 그것도 아주 위악적이고 과격한 방법으로. 시인 나름대로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이라곤 하지만 독자로선 읽기에 매우 거북한 방법이 아닐 수 없다.

a  시집 표지

시집 표지 ⓒ 창비

절두산 순교성지는 서울 마포구 합정동 옛 양화나루 부근에 있는 가톨릭교 순교사적지이다.  절두산은 예전에는 "누에가 머리를 치켜든 것 같다"라고 하여 '잠두봉'이라고 불렸던 곳이다. "머리 잘려진 산"이라는 뜻이니 얼마나 끔찍한가.

그러나 이곳엔 현재 한국의 순교 성인 103위 중 29위의 성인과 무명 순교자 1명의 유해가모셔져 있다. 가히 한국 천주교회 최고의 성지라 할만 하다. 시인에 따르면 그곳의 고해소엔 '중요한 것만 짧게 간추려 고해하시오'라고 쓰인 글이 붙어 있었던 모양이다.

시 속 화자는 무언가 고해할 것이 있어서인지 절두산 성지 고해소을 찾아간다. 그래서 참회한다거나 용서를 구하는 고해성사를 하느냐고?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고해소에 들어앉은 이 신자의 태도는 매우 무례하고 위악적이기 짝이 없다. 용서를 구하거나 미안해하기는커녕 당당한 어투로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까발린다. "이생에선 독한 향내가 나를 치유"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독한 향내는 어디서 나는가. 독한 향내의 진원지는 다름 아닌 인간이다. 그래서 시인은 인간을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치유제로 여겨 바르고 먹고 마셨노라"고 자못 당당하게 고백한다. 그리곤 어떤 순간에 그 '치유제'를 사용했는지  하나 하나 구체적으로 서술해 나간다. "문 박차고 나가 첫사랑의 심장을 파먹고 반생을 다시 시작했"으며 "지독한 꽃 같은 어머니 손을 찢으며 시를 썼"으며 "사랑한 발가락을 오래도록 씹으며 여행을 다" 녔다는 등등.

이렇게 자신의 죄를 고해했으면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겠노라" 다짐이라도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시 속 화자는 그런 낯 간지러운 다짐 대신 "독한 인간들을 한잎씩 씹으며/ 살았고 살고 살아갈 것"이니 그리 알라고 선언한다. 그래도 기본 양심은 있었던지 "(내가 다른 인간을 씹었듯이) 누구든 날 씹어도 좋아요"라고 짐짓 너그러운 체 말하면서 서둘러 고해를 맺고 만다. 이곳에선 "중요한 것만 짧게 간추려" 고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위악은 더없이 좋은 삶의 무기

시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냉소이다. 시인에게 있어 냉소는 일종의 전략이며 구체적인 사실을 위악적으로 열거하는 것은 일종의 전술이다. 냉소가 강할수록 역설은 더욱 설득력 있게 들릴 것이며 위악이 강할수록 더욱 큰 연민을 유발하리라는 것을 이 시인은 알고 있다.

여기서 위악이란 무엇인가를 한 번 살펴보기로 하자. 위악이란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일부러 악한 척하는 것이다. 반면에 위선이란 실제는 선하지 않지만 선한 척하는 것이다. 위악은 없는 발톱을 보여주려는데 반해 위선은 있는 발톱을 감추려 애쓴다. 위악은 일부러 진실을 감추려는 제스쳐일 경우가 많은데 반해 위선은 정반대의 경우일 때가 더 많다. 위악은 일부러 냉정함을 가장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이 약해지려는 걸 막는 자기방어 기제이다.

나 또한 저 시인처럼 때때로 위악을 저지르며 살아왔다. 악한 척하지 않으면 내가 먼저 무너질 것 같은 상황일 때, 그때마다 위악은 더없이 좋은 삶의 무기가 되어주곤 했다. 나 뿐만 아니라 상대에게도 좋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 거리낌 없이 위악을 저지를 수 있었다. 변명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위악은  배려없이는 저지르지 못하는 행동이다. 나는 바닥이 빤히 바라다보이는 위선보다는 오히려 바닥을 쉽게 짐작하기 어려운 위악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서 나도 시인처럼 "인간을 내 치유제로 여겨 바르고 먹고 마"시면서 이날 이때까지 살아왔다. 문제는 내게 '치유제'가 된 사람들은 예외 없이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멀리 있는 사람보다는 가까이 있는 사람을 , 또 미워하는 사람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꺼이 치유제로 사용하려는 몹쓸 경향이 있다. 예를 들자면 어머니·아버지·애인 등.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가장 잔인한 속성 가운데 하나가 아닐는지.

그나저나 절두산 순교 성지 고해소에 가면 정말 '중요한 것만 짧게 간추려 고해하시오'라고 쓰여 있을까.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즘엔 너나없이 바쁜 세상 아닌가. 성직자인 신부님까지도 차분하게 앉아서 남의 고해나 듣고 있을 시간이 없을는지 모른다. 느림 혹은 비움이란 하나의 슬로건으로선 바람직하기 짝이 없지만, 실제로는 불신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니 가톨릭 신자들이여. 당부하노니 고해를 하려거든 바쁜 평일에 하지 말고 주일에 하라. 알아들으시겠는가.
#절두산 #고해 #정영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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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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