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필름의 매력은 어떤 게 있나요?

디지털에 소홀해지고 아날로그에 집착하게 된 이야기

등록 2009.05.12 10:54수정 2009.05.12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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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Nikkormat FT3, 오른쪽은 Minolta SRT202 ⓒ 이동욱


"네가 장미를 위해 할애할 시간이 네 장미를 아주 소중한 것으로 만들어 주었어."


이 말은 생떽쥐페리의 '어린왕자'에서 여우가 어린왕자에게 해준 말이다. 익숙해진 것들을 지켜 줄 책임이 있다고, 너는 장미를 책임져야 한다고. 여우는 책임과 길들여짐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린왕자에게 장미는 소중하다. 그것은 어린왕자가 매일 물을 주고, 유리로 보호해주는 꽃이기 때문이다. 어린왕자는 그 꽃을 이렇게 부른다. "그것은 바로 내 장미꽃이니까"라고. 어린왕자의 소중한 장미를 닮은 나와 필름카메라의 이야기를 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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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가지고 있는 카메라와 렌즈. 저기에 미놀타라는 새로운 가족이 들어왔습니다. ⓒ 이동욱


예전에는 카메라란 장롱 깊숙이 모셔져 있다가 무슨 행사 때나 꺼내지던 집안의 대표적인 귀중품이었던 것이, 요즘은 개도 물고 다닌다는 핸드폰을 비롯하여 주변 곳곳에 없는 곳이 없어서 자신이 알게 모르게 접하고 또 그 앞에 항상 노출되다보니, 이제는 모두가 카메라에 대해 무감각해질 대로 무감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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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카메라를 만지면서 필름을 몇 롤 구했습니다. ⓒ 이동욱


지난날 그랬던 것처럼 사진기 앞에서 한껏 멋이라도 부리려면, 집을 나서는 엘리베이터에서부터 현금지급기나 공중화장실을 비롯하여 고속도로 등에서 수도 없이 마주치는 카메라 앞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폼을 잡아야할 판이니, 사방에 널린 카메라를 억지로라도 무시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몇 달동안 모은 돈으로 장만한 DSLR을 몇 년간 애지중지 보물처럼 모셔 지내오고 있는 나에게, 필름카메라의 첫 인상은, 한 장 한 장 찍을 때마다 몸으로 전해오는 짜릿한 카메라의 떨림, 귀를 두드리는 경쾌하고도 묵직한 합주곡과도 같은 셔터 소리, 필름 와인더를 젖히는 손가락의 감칠맛 등, 촬영된 사진의 완성도를 떠나 촬영 그 자체만으로도 희열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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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놀타에 처음 넣어본 흑백필름입니다. 특별히 넣은 제목은 없습니다. ⓒ 이동욱


디지털 카메라에는 필름 카메라가 저질러왔던 치명적인 실수가 없다. 노출 잘못쯤은 아무것도 아닌, 누구나 한 번쯤은 있었을 법한 촬영에서의 낭패, 예컨대 필름 잘못 넣은 채 찍기, 렌즈 덮개 닫은 채 찍기, 촬영한 필름을 되감기도 전에 카메라 뒤 뚜껑 열기, 아예 필름이 들어있지도 않은 카메라로 찍기 등등이 디지털 카메라에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이다. 그저 보이는 대로 셔터를 누르면 거의 모든 것을 스스로 알아서 찍어준다. 거기다가 인물의 배치에도 신경 쓸 필요가 없어서 각자가 좋아하는 위치에서 찍고 마음에 드는 화면만을 골라가지면 되니 디지털 카메라 촬영은 실수도 없을 뿐더러, 지금껏 사진에서 늘 함께해 왔던 앙리 브렛송의 '결정적 순간'이란 말도 디지털 카메라 앞에서는 그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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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 이동욱


이러한 두 카메라가 찍어낸 사진은 시간을 기록하는 방식도 다르다. 메모리카드나 컴퓨터 안에서 디지털 카메라의 화상은 박제(剝製)된 듯 시간이 정지된 채 잠들어 있지만, 인화지위에 새로이 태어나는 필름 카메라의 사진은 그 위에 스스로 시간을 덧칠해 간다. 그러나 두 카메라의 다른 점은 무엇보다도 기다림의 차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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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놀타와 후지필름과의 조합으로 촬영된 장미입니다. ⓒ 이동욱


노출계를 확인하고, 셔터스피드 다이얼을 돌리며, 조리개링을 돌려가면서 또다시 노출계를 확인하고. 디지털부터 시작한 필자에게는,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촬영해야 한다는 걸 새삼 느끼고 있다. 한 롤씩 다 감긴 필름을 가지고 있을 땐, 결과물이 무척이나 궁금하고 기다려진다.

기다림을 거쳐 태어나게 되는 필름 카메라의 사진은 머릿속의 기억을 불러내 새로이 숨 쉬게 하지만, 디지털 카메라에게 그러한 기다림이란 전설속의 이야기와도 같은 것이다. 그렇게 기다림 없이도 바로 볼 수 있고, 필름 걱정 없이 마음대로 찍어댈 수 있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고 지워버릴 수 있는 디지털 카메라는 요즈음의 빠르고 넘치고 급변하는 세태를 대변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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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을 보면서 저를 촬영했습니다. ⓒ 이동욱


어린왕자는 매주 화산을 청소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그을음을 털고 대청소를 한다. 늘 자신의 꽃과 별을 위해 뭔가를 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랑인지도 모르겠다. 소중한 것을 보살피고 가꾸는 힘은 사랑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이 있는가? 한번쯤, 디지털은 두고 필름 몇 롤과, 필름카메라와 함께 간단하게 동네 한바퀴를 돌며 그 순간을 기록해 보는 건 어떨까? 상상만이어도 좋다. 분명한 것은,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필름카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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