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미사'에 가게 해주시는 '동지'이신 어머니

등록 2009.05.14 14:42수정 2009.05.14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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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태안성당의 노인들이 2007년 9월 18일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학교 주교관으로 생전의 김수환 추기경을 예방했다. 추기경 왼쪽에 있는 이가 내 어머니다. ⓒ 지요하


지난 8일(금) '어버이날' 저녁 용산참사 현장에서 거행된 '용산미사'를 마칠 즈음이었다. 영성체 후 공지사항 발표시간에 미사를 공동 집전하신 여섯 분 사제 중에서 네 분이 차례로 간단한 인사말을 했다. 문정현 신부님은 이틀 전 현장에 설치한 두 개의 파라솔을 경찰이 빼앗아 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실랑이로 두 무릎과 두 팔꿈치가 까진 사실을 실토하고 비분을 토로하듯 노래를 불렀다. 미사 중에 사제의 노래를 접하기는 처음이었고, 노 사제의 쉰 듯하면서도 강렬한 음조의 노래는 내게 큰 감동을 주었다.


문정현 신부님 다음에 마지막으로 마이크를 잡은 서울대교구 빈민사목 담당 이강서 신부님은 세 가지 중요 공지를 했다. 11일(월) 저녁 같은 자리에서 천주교신자 민주열사 열 아홉 분을 기리는 추모미사를 지낸다는 것, 18일 오전에는 시청 앞 광장에서 '5·18민주화운동 열 아홉 돌 기념행사가 거행된다는 것, 그리고 오체투지 순례단이 18일 오후 용산 땅을 지나는데, 18일의 104일차 순례를 마친 다음 순례단 신부님들이 함께 '용산미사'를 지낸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공지를 듣는 순간 11일과 18일 서울에 오기로 작정했다. 여러 형제 자매들과 작별 인사를 할 때 다시 11일에도 오고, 18일에도 오기로 '약속'했다. 그 약속을 옆에서 지켜본 아내는 "아니, 나하고는 상의 한마디 없이 그렇게 일방적으로 결정을 해요?" 항의를 했다. "그때는 나 혼자 올 거니까"하니, "그래도 그렇지"하며 짐짓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내는 이미 내 뜻에 동조하고 있음을 그렇게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11일은 아침부터 날씨가 좋지 않았다. 간간이 비를 뿌리는 날씨였다. 오후에는 중부지방에 제법 많은 비가 내리리라는 예보였다. 그래도 나는 서울에 갈 결심을 하고, 아침식사 자리에서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놓았다.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고, 버스를 이용하면 다음날 일찍 돌아오지 못함으로, 마누라와 딸아이의 출근 문제는 다른 직원의 차를 이용하든지, 아니면 아침 일찍 나서서 걷기 운동을 겸하든지, 마누라가 알아서 하기로 했다.

그리고 점심식사를 하면서 어머니께 다시 한번 오늘 서울에 가는 이유를 자세히 설명드렸다. 점심식사는 어머니와 나, 단 둘이 한다. 자연 어머니와 많은 얘기를 하게 된다. 어머니를 모시고 나가 점심 외식을 하는 때도 종종 있다. 어머니와 단둘이 여러 가지 음식을 차례로 골고루 즐기며 마누라와 다른 가족들에게 미안해지는 마음도 은근슬쩍 즐기곤 한다.

그러며 어머니와 점심식사를 같이 할 수 있는 은총을 계속 베풀어주시는 하느님께 감사하곤 한다. 만일 어머니가 계시지 않아 혼자 점심을 해결하려면 얼마나 처량하고 쓸쓸할까라는 생각도 한다. 지금은 다행이지만, 언젠가는 그런 시절이 오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지레 슬퍼지기도 한다. 아무튼 어머니와 점심식사를 하면서 얘기를 많이 나누는 것은 즐겁다. 자연 이런저런 정보 교환이 이루어진다.


그 덕분에 어머니는 내 심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내 정신세계를 깊이 이해하신다. 육친이면서 동지다. 마누라도, 자식들도, 노친께서도 '동지' 형태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내게 행복감을 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아들은 예수님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일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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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회 생신 축하연 자리에서 2007년 10월 24일, 제84회 생신 축하연을 한 음식점에서 마련해 드렸다. 레지오 단원 할머니들이 모두 참석한 자리에서 구본국 베난시오 당시 주임 신부님과 즐겁게 대화에 열중하시는 어머니. ⓒ 지요하


언젠가 어떤 정체불명의 사람이 내가 없을 때 우리 집에 전화를 한 적이 있다. 명색 작가라는 사람이 빨갱이 사상을 갖고 있다느니, 친북 좌파라느니, 나를 마구 비난하는 말을 어머니께 한 모양이었다. 그 사람에게 어머니가 야단을 치셨다고 했다.

"당신, 우리 아들이 얼마나 경우 바르고 착한 사람인지 알아요? 얼마나 신앙심이 깊은지 알아요? 천주교 신자는 빨갱이일 수 없어요. 빨갱이는 하느님을 부정하는 사람들인데,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어떻게 빨갱이일 수 있어요? 우리 아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일 뿐이예요. 당신 눈에는 천주교 신자가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도 다 친북 좌파로 보이나요? 미치거나 덜 떨어진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쓸데없는 전화, 다시 하지 말아요!"

여든이 넘은 노인에게서 혼이 난 그 사람은 끽 소리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는데, 그 후로는 다시 전화를 하지 않고 있다. 이처럼 내 어머니는 올해 86세 고령임에도 사리 분별이 명확하고 강단이 좋으시다. 성당으로, 시장으로 몸 움직이시는 것을 즐기면서도 경로당 가시는 것은 좋아하시지 않는다.                 

그런 어머니는 내가 서울에 간다 하니 또 손자 녀석을 챙기셨다. 나는 빈 몸으로 갔다 오기를 바랐는데, 큰 가방 하나를 무겁게 들고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차를 가지고 가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하며 오후 2시 30분 버스에 몸을 실었다.

괜찮을 듯싶던 날씨가 서울로 들어서니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더라도(농촌에는 비가 필요하므로), 저녁 시간은 비키고 밤에나 풍성히 내리기를 바라며, 버스 안에서 줄곧 묵주 기도를 했는데 허사가 된 셈이었다.

그런데 비를 보니 이상하게 마음이 넉넉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이 천주교신자 민주열사 열 아홉 분을 기리기 위한 '추모미사'를 지내는 날이기 때문에 비가 내리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내 가슴에 빗물처럼 스며드는 것 같았다. 더욱이 예년과 달리 올해는 성당이나 어떤 건물 안이 아닌 '용산참사' 현장에서 거행되는 민주열사 추모미사였다.

건물 밖에서, 야외도 아닌 도심지 안 오늘의 참사 현장에서 민주열사 추모미사를 거행하는 날이기에 비가 내리는 거라는 생각은 내게 더욱 이상한 힘을 불어 넣어주는 것 같았다. 참사 현장의, 저녁 무렵의, 빗속에서의 추모미사는 미사에 참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더욱 절절한 기원과 힘을 가지게 하고, 주님의 은총이 가슴 가슴에 꽃피어나리라는 생각은 그것 자체로서 내 가슴에 함초롬히 피어나는 꽃이었다.              

"비가 오면 사람들이 적게 올 텐데, 그래서도 꼭 가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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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령 자원봉사자 2008년 4월 26일 태안군 소원면 의향리 가르미 해변에서 85세 노인네가 대학생 손녀와 함께 기름제거 작업을 했다. 어쩌면 자원봉사자 123만 명 중에서 최고령 봉사자일 수도 있을 터였다. ⓒ 지요하


나는 오늘 내리는 비를 주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이자고 생각했다. 날씨 때문에 오전에 잠시 망설이고 갈등했던 일을 반성했다. 오전에 글 작업을 하면서 서울의 한 자매에게 전화를 했다. 지난 8일 저녁의 용산미사에서 만난 자매이고, 매일같이 용산미사에 참례하는 자매였다.

그 자매는 "지금은 비가 그쳤지만, 이따 오후에는 다시 내릴지 몰라요. 많이 올지도 모르고…"라는 말을 하면서도 전혀 걱정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런 기색에서 묘한 감전 같은 것을 느끼며, 그 자매가 "오늘 서울에 오시게요?"라고 묻는 순간, "가야지요!"라고 대답했다. 기뻐하는 그 자매의 음성을 들으며 '내가 이렇게도 타인에게 기쁨을 주는구나. 오늘은 이런 식으로 누구에게 기쁨을 주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점심식사를 할 때 어머니께서 "이따 오후에는 비가 제법 온다는디, 오늘 꼭 서울을 갈 겨?"라고 물으셨을 때 한 순간 "날씨 때문에 포기할까 봐요"라는 대답을 할 뻔했다. 포기하고픈 마음이 없지 않아서였다. 사실은 마음속에서 '갈등'이라는 단어의 보이지 않는 형체가 계속 '명사' 아닌 '동사'로 머무는 까닭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가야지요"라고 명확하게 대답했다. 덧붙여 "날씨 때문에도 꼭 가야 해요. 비가 오면 아무래도 사람들이 적게 올 테니까, 그래서도 꼭 가야지요"라는 말도 했다. 어머니는 반대하지 않으셨다. 엊그제 우리 부부가 서울을 갔다 왔는데도, 어머니는 또 손자 생각을 하시는 까닭이기도 했다.

서울 땅으로 들어서서 아스팔트를 적시는 비를 보며 나는 묵주기도 지향을 바꾸었다. 오늘의 비를 주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이기로 하자, 빗속에서도 추모미사가 잘 진행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되었다. 우중에도 썰렁하지는 않을 정도로 신자들이 오시기를, 미사를 방해할 정도의 세찬 폭우는 아니기를, 용산참사 현장에서 또 빗속에서 거행되는 미사이니 만큼 모든 이에게 더욱 큰 은총의 시간이 되기를 바라는 지향으로 강남 터미널에 도착할 때까지 묵주기도를 계속했다.

지하철 을지로 3가역에서 아들녀석을 만났다. 아들녀석에게 무거운 가방을 넘겨주고 우산을 받았다. 녀석은 가방 속을 열어보고 탄성을 질렀다. 이걸 다 언제 먹느냐는 말도 했다. 이 세상에서 할머니 복을 가장 많이 누리는 녀석이었다. 수업은 없지만 6시에 음악동아리 합주 연습에 가야 한다고 했다. 녀석은 또 내게 "미사 시간이 7시이고, 아직 5시도 안됐으니 집에 가서 저녁식사를 하고 쉬었다 가시라"는 제법 어른스러운 말을 했다.

"아냐. 그곳으로 일찍 가야 해. 비 때문에 저번처럼 저녁 대접은 받지 못하더라도, 일찍 가서 미사 준비를 도와줘야 해. 아무래도 비 때문에 미사 준비가 어려울 텐데, 내가 별 힘은 못되더라도, 일손을 좀 보태줘야지."

나는 아빠를 걱정해주는 아들 녀석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곧 4호선 타는 곳으로 갔다. 내가 용산 현장에 도착하니 이미 비닐 천막을 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물론 소수 인원이 비를 맞으며 그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빗속에서 미사 준비 작업을 하는 형제 자매들의 젖은 모습에 가슴 뭉클하는 감동을 삼키며 어설프게나마 손을 보태었다.

비닐 천막과 함께 조립식 천막도 설치했다. 그리고 천막 안 한 옆으로 열 아홉 분 민주열사들의 영정을 모실 자리가 마련되었다. 비 때문에 매우 어렵게 마련된 그 자리에 열 아홉 분의 영정이 모셔졌다.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보관하는 영정이라고 했다. 정의평화위원회에서 해마다 추모미사를 지내왔다는 말도 들을 수 있었다.

열 아홉 분 민주열사들의 영정을 보는 순간 나는 속으로 탄성을 머금었다. 과거 민주화의 제단에 목숨을 마친 천주교 신자 열사도 열 아홉 분이나 되는구나. 그들의 영정을 보관하면서 해마다 추모미사를 지내오는 이들이 있었구나.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에서 그 일을 해왔는데도, 내가 이날까지 그 사실을 몰랐구나. 20년 가까이 그 일을 해오도록 나는 한 번도 추모미사에 참례하지 못하고, 무관심 속에서 살았구나!

죄스러움과 부끄러움으로 몸이 떨렸다. 죄스러움과 부끄러움 속에서 '참회'의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솟아올랐다. 그제야 내가 카메라를 가져오지 않은 사실이 생각났다. 사실은 글 쓸 생각을 별로 하지 않고, 추모미사 참례 자체만을 생각하며 온 것이었다. 나는 속죄하는 뜻으로 글을 하나 쓰기로 마음먹고, 준비에 바쁜 자매에게 카메라 촬영을 부탁했다.
#용산참사 #민주열사 #추모미사 #정의평화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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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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