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청년문화, 안 될 거야 아마

88만원 세대와 '어쩌다 세대'

등록 2009.05.16 15:04수정 2009.05.16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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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인디밴드 '장기하와 얼굴들'. 한편에서는 루저문화라고 표현했지만, 장씨는 <시사매거진 2580>에서 "루저(패배자)들의 삶이 아닌, 평범한 20대의 한 단면을 표현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 남소연


청년문화를 가늠해보고자 하는 시도가 부쩍 잦다. 얼마 전까지 세대문화를 한두 문장으로 명쾌하게 정의내리는 건 불가능했다. 애초 같은 세대로서의 동질감이나 의식 따위가 존재하지 않았다. 공유되는 소비 코드도 없었다. 세대 담론은 전무했다. <88만원 세대>가 나오면서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말도 많아졌다. 문화가 아닌 경제 사회적 굴레로써 정의된 세대 개념은, 90년대 이후로는 더욱 드문 것이었다. 부정할 수 없는 현상의 나열과 짱돌을 들라는 수사적인 결론 앞에 청년들의 한숨기 어린 자조는 더욱 깊어졌다.

그런 좌절감 앞에 급기야 전에 없던, 일종의 문화적인 기류가 형성됐다. 소비를 통해 드러난 세대의 공기는 루저문화에 가까워 보였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에도 많은 매체들이 청년실업과 루저문화라는 두 가지 코드에 주목하고 있다. "젊은 세대가 루저문화에 심취해있다"는 식의 진단과 분석이 난무한다.

오늘의 청년문화는 정치와 무관하다. 혹은 무관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래서 가져다 붙이기 쉽고 편리하다. 좌우를 막론하고 숱한 매체들이 청년실업과 루저문화를 다투어 입에 문다. 더불어 이쪽의 당위를 지키고 저쪽의 세계관을 비웃기 위한 논거로 활용한다. 이를테면 왼쪽의 청년실업은 신자유주의 가속화 때문이고 오른쪽의 청년실업은 좌파 정권 10년 탓이다. 누구의 해석이 옳든 청년실업 자체는 실재하는 현상이니 그러거나 말거나다. 그렇다면 대책이 중요한데 최근 서울시가 발표한 '청년 CEO 1000명 양병설'을 듣고 있자니, 똑똑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니 잘 하겠지 싶다만 그 청년과 이 청년이 같은 종류의 청년이라는 실감은 딱히 들지 않는다.

비관과 체념의 정서를 동반한다는 점에서 루저문화로 단정 지은 지금의 청년문화를 흡사 돼지독감 비슷한 질병의 일종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도 많다. 그래서 기사 말미에는 반드시 정신과 의사의 조언이 따라 붙는다. "그렇다고 자녀를 너무 닦달하는 건 좋지 않다."

88만원 세대, 루저문화

어쨌든 오늘 날의 청년문화에 대해 정색하고 달려들어 해독해보려 하면, 그러니까 뭔가, 사실 별 할 말이 없다. 앞서도 말했듯이 지금의 청년문화는 정치적 구호 아래 애써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기사 제목 붙이기 좋으라고 어거지로 조합한 세대 구별용 문자 놀음도 아니다. 맥류와 동기를 논하기도 애매하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어 글쎄. 그래서 몇 가지 상징적인 문장들로 정리하기 쉬웠던 과거의 세대문화와도 확연히 구별 된다 그래도 애써 시도해보자면, 90년대가 "난 너와 달라" "모두가 예, 라고 대답할 때 아니오, 라고"였다면, 지금은 "난 제발 너이고 싶어" "모두가 예, 라고 대답할 때 빛의 속도로 그 누구보다 먼저 예, 라고 외칠 준비가 되어있어. 끼워만 달라" 랄까.

어쩌다 그리됐든 결과론적으로 보았을 때, 지금의 청년문화는 88만원 세대라는 현상과 루저문화라는 취향의 결합으로 어렴풋하게나마 그 꼴을 짐작해볼 수 있다. 결합은 자연스러웠다. 이 현상과 취향은 서로를 끌어당긴다. 자조는 비루한 자들의 언제나 가장 훌륭한 유희거리다.


그러나 어느 한쪽만 따로 떼어 지금의 청년문화를 규명하고자 하는 건 지루하고 의미 없는 작업이다. '루저문화의 기원' 따위 기사를 쏟아내며 6, 70년대 펑크나 90년대 그런지를 헤집어 맥류를 끄집어내는 건 문자 낭비에 불과하다. 차라리 <고래사냥>이든 <바보들의 행진>을 떠올려도 루저문화의 자취는 쉽게 읽힌다. 그건 그리 부르기 전에도 그냥 그렇게 있던 거다.

문제는 지금의 청년문화와 종전 루저문화 사이의 체온이 사뭇 다르다는 데 있다. 루저문화라는 건 선택이 가능한 그야말로 취향의 문제, 혹은 정치적 신념의 문제였다. 지금 청년 세대 안에서 드러나는 루저문화의 흔적은 갈아입기 용이한 취향이나 구호라기보다 사회 구조적 환경으로부터 빚어진 어쩔 수 없는 굴레에 더 가깝다. 물론 이 사회 구조적 환경이라는 것에 대해 누구나 경각심을 가지고 주목하며 파악하고 있는 건 아니다. 지금 이 세대가 특히 그렇다. 어쩌다 그리됐다, 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어쩌다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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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저문화는 예전에도 있었다. 단 지금 루저문화는 과거와 체온이 다르다. '88만원 세대' 책의 표지 ⓒ 레디앙

대충 부르기 쉽게 '어쩌다 세대'라고 부르겠다. 88만원 세대가 부조리한 환경으로부터 정의된 정치 사회적 분류라면, 어쩌다 세대는 그들의 문화소비 패턴으로부터 끄집어낼 수 있는 분류다.

공연한 조어를 하나 더 제시하는 건 지금부터 논의하고자 하는, 단지 88만원 세대라는 구분만으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 문화적 특수성 때문이다. 게다가, 어쩌다 세대로 이름 지은 지금의 이 세대문화 그룹은 88만원 세대의 맥락 위에 있으면서도 그리 불리는 걸 썩 좋아하지 않는다. 이미 그 자체가 정치적인 구호처럼 들리기 때문이고 안 그래도 어디든 소속되고 싶어 죽겠는데 다시 한 번 타자화되는 게 고깝기 때문이다. 궁색한 자조는 역설적으로 즐겁다. 그러나 타자의 비웃음은 싫다. 연민은 더 참기 힘들다.

흥미로운 사실은 엄밀히 논증했을 때 88만원 세대의 개념적 범주에 들지 않는 청년 그룹 또한 어쩌다 세대의 패턴에는 포섭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직장인이든 백수든 간에 관계없이 특정한 문화적 경험으로부터 세대를 관통하는 공감을 얻고 있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어쩌다 세대의 형성은 어찌해도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과정이었다. 그러나 이 세대의 문화소비 패턴은 이미 그 자체로 패션이 되었으며, 패션이라는 말의 어감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물리적인 개념으로써의 세대 전체를 아우를만한 경향이 되었다고 볼만하다.

해도 안 될 거 그냥 걷자

어느 세대문화든 아이콘이 있고 아이콘에선 그 세대문화의 지향점 혹은 욕망 따위가 발견된다. 장기하는 어쩌다 세대의 공공연한 아이콘이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성전환한 게이일 필요가 없듯, 명문대를 졸업한 자취 경력 미소유자 장기하 본인은 루저가 아니고 88만원 세대를 가로지를만한 명쾌한 담론과 선동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며, 그럴 이유 또한 없다. 그러나 장기하의 노래는 어쩌다 세대에 잘 어울려 호응한다. 비관과 자조의 한숨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흥겹게 주절거릴 수 있기에 정말 그렇다.

<느리게 걷자> <싸구려 커피> <아무 것도 없잖아> <별 일 없이 산다>를 비롯한 장기하의 노래가 공통적으로 드러내는 정서는 어차피 안 될 거 경쟁해서 뭐 하냐, 싶은 체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즐겁게 살고 있다는 선언적 자기 확신이다. <우리는 액션 배우다> <낮술> 같은 영화들 또한 비슷한 질감의 정서로 관객에 호응했다. 일반적인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비루한 현실임에는 분명하지만, 어찌됐든 그 안에서 즐겁게 살아간다는 느긋함이 드러난다. 이걸 고생기로 보는 건 또 다른 타자화고 폭력이다. 방점은 이렇게 치열하게 살고 있다, 가 아니라 좌충우돌 하더라도 즐겁게 살고 있다는 데 찍힌다. 

은밀한 연대

최근 인터넷 상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안 될 거야, 아마' 게임은 어쩌다 세대의 본질을 드러내는 가장 명징한 사례다. 정말 잘 안될 거라 생각하든 말든 여부는 중요치 않다. 어쩌다 세대의 아무리 몸부림 쳐도 제 앞가림 할 구석이 막막한 상황을 한 줌의 웃음으로 자조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도피나 환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어쩌다 세대의 시점에서 바라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이 자조어린 웃음에는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싶은 일종의 안도감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이 안도감에는 의식에 앞서는 동물적인 연대의식이 묻어난다. 물론 벗어나고 싶은 현실이지만 어차피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바에야 지금 이대로도 괜찮으니 다 같이 느리게 걷자는 이야기다. 그래도 괜찮다는 위로와 공감이다. 어쩌다 세대는 연대에 냉담하다. 정치적인 이유라기보다 촌스러워 보여서다. 사실 그래서 더 절박하다. <느리게 걷는다>가 아니라 <느리게 걷자>로, 어쩌다 세대의 연대는 문화 소비를 통해 그렇게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답 없는 현실이라도 웃음으로 자위하고 안도하면서 서로를 확인하고 싶다는 것. 이것이 어쩌다 세대를 가늠할 수 있는 문화 소비의 중요한 패턴이다. 이런 경향은 승자독식구조로 일컬어지는 승자와 패자의 비례가 20 : 80, 10 : 90 으로 벌어질수록 가속화돼 문화 시장 전반에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창비 세교연구소 포럼에서 발제문으로 쓰였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창비 세교연구소 포럼에서 발제문으로 쓰였습니다.
#20대 #청년문화 #루저문화 #88만원세대 #장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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