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버린 우리 말투 찾기 (17) 것 2

[우리 말에 마음쓰기 644] '놀리려던 건', '속은 것은', '정치가란 것' 다듬기

등록 2009.05.20 09:37수정 2009.05.20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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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놀리려던 건 아니고

 

.. 아이를 놀리려던 건 아니고 할머니 교장 선생님 흉내가 재미있어 그런 거였지 ..  《박기범-낙타굼》(낮은산,2008) 10쪽

 

 요즈음 어린이책을 살피면 '것'이라는 말이 무척 자주 보입니다. 지나치다 못해 끔찍하다고 할 만큼 자주 보입니다. 얄딱구리하다 할 다른 낱말은 잘 덜어내고 털어내면서도 '것' 하나만큼은 덜어내지 못합니다. 어린이책에 어줍잖게 '그녀'를 함부로 집어넣지 않더라도 '것' 하나만큼은 아무 데나 손쉽게 끼워넣곤 합니다.

 

 ┌ 놀리려던 건 아니고

 │

 │→ 놀리려고 하지는 않았고

 │→ 놀리려 하지는 않았고

 │→ 놀리려던 마음은 아니고

 │→ 놀릴 생각은 아니고

 │→ 놀릴 뜻은 아니고

 │→ 놀린다기보다

 └ …

 

 그래도, '그녀' 같은 말투는 쓰지 않으니 고맙다고 해야 할까 싶습니다. 여느 낱말이나 말투는 살갑고 구수하게 펼쳐내고 있으니 반갑다고 해야 할까 싶습니다. 모든 글쟁이가 모든 낱말과 말투를 아름답고 싱그럽게 가꿀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앞으로는 이 대목이 나아지기를 바라면 될까 싶습니다. 이런 대목 하나쯤이야 잘못 쓰건 얄궂게 쓰건, 다른 모든 자리를 알차게 가다듬는다면 귀엽게 보아넘겨도 되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 그런 거였지

 │

 │→ 그런 셈이지

 │→ 그랬지

 │→ 그렇게 했지

 └ …

 

 그렇지만, 아이들이 읽는 책에 '것' 말투가 자주 나오면, 아이들은 어떤 말을 쓰게 될까 생각하면서 소름이 돋습니다. 어른들이 쓰고 아이들한테 읽는 책에 자주 나오는 '것'은 아이들한테 어떻게 스며들거나 파고들게 될까를 헤아리면서 근심과 걱정이 늘어납니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한테 어떤 몸밥을 먹이고 어떤 마음밥을 차려 주어야 할까를 돌아보면서 안타까움과 슬픔이 밀려듭니다.

 

 아이들한테 차려 주는 밥에 조미료를 듬뿍 넣는다면, 아이들 입맛과 혀는 어떻게 될까 생각해 봅니다. 조미료를 듬뿍 넣어 마련한 밥을 먹는 아이들 혀는 어떻게 바뀔는지 곱씹어 봅니다. 조미료와 같은 얄딱구리한 낱말과 말투를 듣고 읽는 아이들 넋과 얼은 앞으로 어찌 자리잡을는지 곰곰이 되뇌어 봅니다.

 

ㄴ. 속은 것은 어머니 쪽

 

..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속은 것은 어머니 쪽이었다 ..  《마루야마 겐지/조양욱 옮김-산 자의 길》(현대문학북스,2001) 33쪽

 

 '사실(事實)은'은 '알고 보니'나 '나중에 보니'나 '정작은'으로 다듬어 줍니다.

 

 ┌ 속은 것은 어머니 쪽이었다

 │

 │→ 속은 쪽은 어머니였다

 │→ 속은 사람은 어머니였다

 │→ 어머니가 속았다

 └ …

 

 말을 부러 늘어뜨릴 수 있습니다. 이 살을 붙이고 저 살을 붙으며 늘어뜨릴 수 있습니다. 단출하게 끊어서 쓰기보다는 자꾸자꾸 말꼬리를 질질 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군살을 붙이는 말씨는 누구한테 도움이 될까요. 군더더기 잔뜩 달라붙은 말투는 얼마나 듣기 좋을까요.

 

 ┌ 그런데 알고 보니, 어머니가 속았다

 ├ 그런데, 정작 속은 쪽은 어머니였다

 ├ 그런데 아니었다. 어머니가 속았다

 └ …

 

 글월 하나로 써도 넉넉합니다. 꼭 둘로 나누어야 하지 않습니다. 글쓴이 나름대로 말맛을 살리고 싶어 둘로 나누어야겠다면 둘로 나눌 일입니다. 다만, 올바르게, 알맞춤하게, 제대로 나눌 일입니다. 괜한 말을 자꾸 붙이기보다, 생각과 느낌이 또렷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붙여야 할 말'만 붙여 줄 노릇입니다.

 

ㄷ. 정치가란 것은

 

.. 정치가란 것은, 과학자의 실제적인 상식 수준을 의심하고 있으면서, 과학이라면 무엇이건 맹신하는 바람에 ..  《랠프 랩/표문태 옮김-핵전쟁》(현암사,1970) 41쪽

 

 "과학자의 실제적(實際的)인 상식(常識) 수준(水準)을 의심(疑心)하고"는 "과학자가 정작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못미더워하고"로 다듬어 줍니다. '맹신(盲信)하는'은 '무턱대고 믿는'으로 손봅니다.

 

 ┌ 정치가란 것은

 │

 │→ 정치가란 분은

 │→ 정치가란 사람은

 │→ 정치가란 놈은

 │→ 정치가란 녀석은

 └ …

 

 이 자리에서는 '것'을 털어내지 않고 그대로 두어도 괜찮습니다. 사람을 가리키는 자리에 일부러 '것'을 넣으며 슬그머니 비아냥을 하니까요. 다만, 우리 말씀씀이를 돌이켜보건대, 살그머니 비아냥을 할 때 '사람'이나 '분'을 넣어 높이는 척하기도 합니다. '놈'이나 '년'이나 '녀석'을 넣기도 합니다. 아예 '놈팽이'나 '자식'이나 '새끼'를 넣기도 해요. 아주 짓궂은 마음으로 '멍텅구리'나 '바보'나 '얼간이'를 넣어 볼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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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0 09:37ⓒ 2009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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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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