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속, 고단한 삶의 향기

등록 2009.05.21 09:21수정 2009.05.21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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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시선은 창밖 어딘가에 둔 채 버스에 몸을 싣고 전철역으로 향하는 일상이 밥을 먹는 일만큼이나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요즘처럼 선선한 아침에는 귓가에 흐르는 음악이 없이도 조금 열린 버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잠깐이나마 봄이 주는 여유를 느낄 수 있어 감사하다.

 

내가 타고 다니는 마을버스에는 언제나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이 타셔서 앉은지 두 정거장이 채 안되어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일이 빈번하고, 피곤이 몰려오는 날이면 일부러 맨 뒷자리에 앉는 '꾀'를 부리기도 한다. 초등학교 도덕시간에, 버스에는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배웠으면서도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버스에 오르시는 것을 볼 때면 자는 척을 하거나 못 본 척 창 밖만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다른 어른들이 보기에 얄미운 아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학생 때, 마을버스에 오르는 친할머니를 보게 되었다. 반가움에 크게 부르려던 순간, 앞에 앉아있던 한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벌떡 일어나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버스에 오르시는 어르신들을 보면 반사적으로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는데, 내가 자리를 양보하지 않으면 버스를 이용하는 우리 할머니에게 누군가 자리를 양보해주지 않을 것 같은 마음 때문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앞에서 두 번째 자리에 노란색으로 붙어있는 '노약자석'이라는 말이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교복을 입은 채로 버젓이 앉아 지팡이에 의지한 채 힘겹게 버스에 오르는 어르신들을 외면하는 학생들을 자주 보게 된다. 흔들리는 버스와 함께 위태롭게 비틀거리는 어르신을 볼 때면 태연하게 앉아있는 학생에게 화가 나고 얄밉지만 마음뿐이고 가서 자리를 양보하라고 얘기할 용기는 없어 더욱 답답하다.

 

그런 장면을 두 번, 세 번 보고 나니 버스에 올랐을 때 앉아있는 학생들만 봐도 괜히 미운 마음이 들었다. 버스를 타고 가던 어느날 밤 열시가 조금 넘은 시간, 단어장을 손에 쥔 채 졸고 있던 남학생이 버스에 오른 할머니께 급하게 자리를 양보하였다. 가방을 들어주겠다던 할머니께 괜찮다며 연신 말하며 서있었는데 얼마 안 되어 다시 선 채로 꾸벅꾸벅 조는 그 학생을 보니 요 며칠간의 꽁해있던 응어리가 풀리면서 괜시리 마음이 짠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나 또한 입시전쟁 속에서 자율학습을 끝내고 고단함에 지쳐 버스에 몸을 실었던 때가 있었는데, 버스에서 어르신들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학생들 전체를 괜히 밉게 생각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수 십 년간 깊어진 손금만큼이나 고단했던 인생의 피로감까지는 내가 감히 가늠할 수도 없지만, 버스 안 자리마다 각자의 생활 속 무게와 고민, 희망과 다짐을 안고 직장으로,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잠시 잊고 고단하지만 잔잔한 삶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2009.05.21 09:21 ⓒ 2009 OhmyNews
#버스 #자리양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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