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꽃을 알고 고추맛을 즐긴다면...

[인천 골목길 이야기 43] 바쁜 사람과 자동차한테는 안 보이는 꽃

등록 2009.05.27 17:52수정 2009.05.27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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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목동네에서 태어나 자란 일을 자랑으로 여겨 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남우세스럽게 여겨 본 적 또한 없습니다. 다만, 문학에서 읽는 골목동네라든지, 신문에서 기사로 읽는 골목동네라든지, 영화나 연속극에 나오는 골목동네라든지, 아니면 동화책에 그려지는 골목동네라든지, 때때로 사진쟁이 눈에 비치는 골목동네는 언제나 '가난 = 꾀죄죄 = 낡음 = 재개발 = 쫓겨남 = 사라지는 추억 = 옛날이야기'일 뿐입니다. 예나 이제나 달라지지 않습니다.

 

 오늘날 한국땅에서 '웬만한' 사람들은 아파트에 삽니다. 아파트가 싫든 아파트에 살 만한 돈이 없든 하는 사람들은 빌라에 삽니다. 기름이나 연탄으로 때는 집에서 살아가는 숫자는 그리 많지 않으며, 기름이나 연탄으로 때는 집이 모인 골목동네는 '주말을 맞이해 으리으리한 장비를 앞세운 사진쟁이'들한테 모델이 되는 곳으로 탈바꿈(?)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바뀌기 나름이고, 바뀌는 세상에 따라서 달리 바라보려는 눈길을 탓할 수 없습니다. '사는 사람(주민)'이 아닌 '구경하는 사람(관광객)' 눈으로서는 '아직도 이런 골목길이 남아 있어?' 하는 놀라눈 눈길일 터이나, 구경하는 사람이 아닌 사는 사람 생각으로는 '돈이 없어 그냥 사는 집'이기도 하지만, '먼 옛날부터 뿌리내려 살냄새 짙게 밴 고향'입니다.

 

 저는 이 고향 골목동네를 그저 제 고향 모습 그대로 느끼고 싶어 골목마실을 합니다. 새벽에도 하고 아침에도 하고 낮에도 하고 저녁에도 하고 밤에도 합니다. 비오는 날에도 하고 눈오는 날에도 하고 흐린 날에도 하며 맑은 날에도 합니다. 그러던 지난 5월 24일 일요일 낮, 잠깐 구멍가게에 들러 빨래비누 몇 장 사려고 나선 골목마실에서 고추꽃을 만납니다. 하얀 고추꽃이 이제 피나 저제 피나 하고 날마다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아직 꽃망울을 터뜨리지 않은 꽃그릇도 많으나, 몇 군데 꽃그릇에서는 어른 새끼손톱만 하거나 아기 손끝만 한 앙증맞은 하얀 꽃망울이 살며시 고개 숙인 채 햇볕을 머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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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고추를 못 먹고, 고추가루도 안 먹습니다. 그러나 하얀 고추꽃은 더없이 앙증맞게 귀엽고 예쁘다고 느낍니다. ⓒ 최종규

저는 고추를 못 먹고, 고추가루도 안 먹습니다. 그러나 하얀 고추꽃은 더없이 앙증맞게 귀엽고 예쁘다고 느낍니다. ⓒ 최종규

 

 바삐 걸음을 옮기는 사람한테는 보이지 않는 하얀 꽃입니다. 서둘로 길을 나서려는 사람한테도 보이지 않는 하얀 꽃입니다. 자동차를 골목에서도 무섭게 싱싱 내모는 사람한테도 보이지 않는 하얀 꽃입니다. 천천히 거닌다 하여도 무릎을 꿇고 고즈넉히 들여다보려는 매무새가 아니어도 보이지 않는 하얀 꽃입니다.

 

 골목길 조그마한 꽃그릇에 한 포기씩 심어 가꾸는 고추꽃은, 꼭 이만큼 고추하고 눈높이를 맞추어 다가서려는 사람한테만 베푸는 '여름 문턱' 꽃선물이요 꽃잔치입니다. 마침, 고추꽃과 함께 방울토마토 노오란 꽃도 활짝활짝 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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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고추를 먹어야만 고추꽃을 즐길 수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고추를 즐기는 분들이라고 꼭 고추꽃을 알아야 하지 않지만, 고추꽃을 알면서 즐기는 고추맛은 좀 다르지 않으랴 싶습니다. ⓒ 최종규

굳이 고추를 먹어야만 고추꽃을 즐길 수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고추를 즐기는 분들이라고 꼭 고추꽃을 알아야 하지 않지만, 고추꽃을 알면서 즐기는 고추맛은 좀 다르지 않으랴 싶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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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꽃 옆에는 방울토마토 노란 꽃송이도 피어납니다. ⓒ 최종규

고추꽃 옆에는 방울토마토 노란 꽃송이도 피어납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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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며 방울토마토며 여러 푸성귀와 풀이 자라는 골목길 꽃그릇입니다. ⓒ 최종규

고추며 방울토마토며 여러 푸성귀와 풀이 자라는 골목길 꽃그릇입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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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꽃 뒤로 상추포기도 보입니다. 골목집 사람들은 ‘많이 심지’는 않아도 ‘알맞게 즐길’ 만큼 꽃그릇농사를 짓습니다. ⓒ 최종규

고추꽃 뒤로 상추포기도 보입니다. 골목집 사람들은 ‘많이 심지’는 않아도 ‘알맞게 즐길’ 만큼 꽃그릇농사를 짓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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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꽃이 달린 꽃그릇을 바라보면서 잠깐 발걸음을 멈춥니다. 등판에 햇살을 따뜻하게 받으면서 고추꽃한테 살며시 인사를 하고, 한참 들여다보면서 웃음을 짓습니다. ⓒ 최종규

고추꽃이 달린 꽃그릇을 바라보면서 잠깐 발걸음을 멈춥니다. 등판에 햇살을 따뜻하게 받으면서 고추꽃한테 살며시 인사를 하고, 한참 들여다보면서 웃음을 짓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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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하얀 꽃이 달리지 않은 고추포기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곳에도 머잖아 하얀 꽃송이가 조그마한 텃밭 가득 맺히리라 생각합니다. 그때가 되면 참 예쁘겠구나 싶습니다. ⓒ 최종규

아직 하얀 꽃이 달리지 않은 고추포기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곳에도 머잖아 하얀 꽃송이가 조그마한 텃밭 가득 맺히리라 생각합니다. 그때가 되면 참 예쁘겠구나 싶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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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꽃은 고추꽃대로 예쁘고, 다른 꽃은 다른 꽃대로 예쁩니다. 비알진 언덕받이 한복판, 어차피 차도 오를 수 없는 빈 자리에, 골목사람들은 헌 스티로폼을 주섬주섬 모아서 앙증맞은 텃밭(?)을 이루며 꽃내음과 풀내음을 나눕니다. ⓒ 최종규

고추꽃은 고추꽃대로 예쁘고, 다른 꽃은 다른 꽃대로 예쁩니다. 비알진 언덕받이 한복판, 어차피 차도 오를 수 없는 빈 자리에, 골목사람들은 헌 스티로폼을 주섬주섬 모아서 앙증맞은 텃밭(?)을 이루며 꽃내음과 풀내음을 나눕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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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와 상추뿐 아니라 파도 심고 몇 가지 푸성귀를 더 심지만, 푸성귀 아닌 꽃을 심기도 하고 나무를 심어 가꾸기도 합니다. 심어서 먹어도 좋지만, 심어만 놓고 들여다보기만 하여도 좋습니다. ⓒ 최종규

고추와 상추뿐 아니라 파도 심고 몇 가지 푸성귀를 더 심지만, 푸성귀 아닌 꽃을 심기도 하고 나무를 심어 가꾸기도 합니다. 심어서 먹어도 좋지만, 심어만 놓고 들여다보기만 하여도 좋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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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런히 가꾼 골목집 텃밭 고랑이 저녁햇살과 함께 곱다고 느끼면서 바라보는 동안, 마음이 텅 비어 갑니다. ⓒ 최종규

가지런히 가꾼 골목집 텃밭 고랑이 저녁햇살과 함께 곱다고 느끼면서 바라보는 동안, 마음이 텅 비어 갑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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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욕심이나 더 큰 이름이나 더 큰 돈이 아니라, 조촐하게 나누는 사랑과 수수하게 함께하는 믿음이나 자그맣게 주고받는 기쁨이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골목밭 가에 주저앉아 저녁햇살을 즐기면서 가만가만 느낍니다. ⓒ 최종규

더 큰 욕심이나 더 큰 이름이나 더 큰 돈이 아니라, 조촐하게 나누는 사랑과 수수하게 함께하는 믿음이나 자그맣게 주고받는 기쁨이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골목밭 가에 주저앉아 저녁햇살을 즐기면서 가만가만 느낍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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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을 안고 떠난 분은 부디 마음을 넉넉히 쉴 수 있기를, 아픔을 머금으며 살아가는 분은 모쪼록 마음을 차분히 다스리면서 새힘을 얻을 수 있기를, 골목길 한켠에서 조용히 햇볕과 함께 가느다란 줄기를 뻗어올리며 곧 하얀 꽃망울 터뜨리려고 하는 고추포기를 바라보면서 두 손 모아 비손을 드립니다. ⓒ 최종규

아픔을 안고 떠난 분은 부디 마음을 넉넉히 쉴 수 있기를, 아픔을 머금으며 살아가는 분은 모쪼록 마음을 차분히 다스리면서 새힘을 얻을 수 있기를, 골목길 한켠에서 조용히 햇볕과 함께 가느다란 줄기를 뻗어올리며 곧 하얀 꽃망울 터뜨리려고 하는 고추포기를 바라보면서 두 손 모아 비손을 드립니다. ⓒ 최종규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작은자전거 : 인천+부천+수원 자전거 사랑이] http://cafe.naver.com/inbusu

2009.05.27 17:52 ⓒ 2009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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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꽃 #골목길 #인천골목길 #꽃구경 #골목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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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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