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이면 다홍치마', 이 말의 무서움

외모,학력, 그리고 여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고집

등록 2009.06.11 11:33수정 2009.06.11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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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이면 다홍치마'. 최근 이 말에 대해 곱씹어 보게 됐다. 본격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된데는 미스코리아 관련 기사와 그에 따른 네티즌들의 의견이 컸다. 얼마전 인터넷으로 접한 기사에서는 미스코리아 서울 본선대회 '영예'의 진 수상자가 러시아 발레학교를 나와 영어와 러시아어를 모두 잘 하는 재원이라고 나와 있었다. 이에 달린 댓글들은 예상대로 '엄친딸'을 부러워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최근 몇 년간 미스코리아 대회 참가자들의 학력은 실로 놀랄 만하다. 이젠 성형의 힘을 빌어 가꿀 수 있는 화려한 외모 만으로는 이 대회에 참가할 수 없을 정도다. 그렇다면 왜 고학력 여성들이 한 때 '성의 상품화'라 비판받던 미인 대회에 앞다투어 참가하는 것일까. 그들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학력이 좋은데다 미인대회 출신이라는 경력이 붙으면 취업은 물론이고 남들의 부러움을 받을 수 있는 세상이 열리는 것이니까.

그렇지만 예쁘다는 기준도 명확하지 않고, 달리 전문성을 띄지도 않은 대회에 출전자들이 몰리는 것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최소한 내가 볼 땐 참가자들의 외모가 전부 비슷한 데, 대체 심사위원들은 어떤 명확한 기준이 있기에 이를 구별해 진선미를 뽑는 것이며, 또 그들이 칭찬하는 지성미라는 것은 어디에서 찾아봐야 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구술시험을 치르는 것도 아니고, 전공 시험을 보는 것도 아닌데.

국제 미인대회에 참가했던 한 미스코리아가 출전 후 소감으로 '본선에 못 나갈거란 말을 듣고 이를 악물고 열심히 했다'고 밝힌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나는 궁금했다. 도대체 이를 악물고 무엇을 열심히 했다는 것인지. 최소한 음악 콩쿠르라면 해당 악기 연주를, 노래자랑이라면 노래를, 연기자 선발대회라면 연기를, 하물며 패션 모델 선발대회라면 워킹이라도 열심히 했다는 이야기가 될 텐데, 미인대회에서 대체 무엇을 이를 악 물 정도로 열심히 한 것일까.

젊은이들이 다방면으로 끼를 살리고 사회에서 여러모로 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현 세태에서 반대로 학벌사회, 외모 중심사회의 폐허를 개선해 나가지 못하고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워진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처럼 남들과 비슷한 수준이라면 이왕이면 외모가 뛰어난 사람, 학벌이 좋은 사람을 선택하겠다는 발상이 이런 식으로 퍼져나가서는 안된다.

영국의 티비 프로그램에는 (나는 영국에서 공부중이다) 다양한 인종 뿐 아니라 뚱뚱한 사람, 장애가 있는 사람, 최소한 내 기준에서 못생긴 사람 등이 나온다. 그리고 뉴스 앵커들도 마찬가지다. 안경 쓴 여자 앵커, 뚱뚱한 앵커 등이 자리를 차지한다. 그들의 선발기준은 실력이지 외모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왕이면 다홍치마'의 룰을 적용하려는 사람도, 그 룰에 맞춰가려는 후보자도 없다. 아니 없진 않겠지만 이력서에 사진을 붙이고 출발하는 한국 만큼은 분명 아니다. 반듯한 단발머리에 오목조목한 얼굴, 날씬한 여성 앵커만을 볼 수 있는 한국 같은 뉴스 프로그램은 없다.

이는 일반 프로그램 뿐 아니라 광고에서도 마찬가지다. 값비싼 연예인,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없을 것 같은 '뛰어난' 외모의 인물들을 비싼 값에 기용하는 한국 광고와는 다르게 영국의 광고들은 내가 지금 밖에 나가도 쉽게 마주칠 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그들로 구성된 광고는 보는 이로 하여금 때론 웃음을, 때론 눈물을, 때론 '어떻게 저런 생각을 했을까'라는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광고의 창의적인 구성과 인물들의 연기에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사대주의적인 사고로 영국을 칭찬하고 한국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 사람들, 특히 여성에게 씌워지는 '이왕이면 다홍치마'의 굴레에서 우리가 벗어나긴커녕 스스로 속박당하려고 하는 세태가 안타까울 뿐이다. 이 말이 얼마나 무섭고 정당하지 못한지 특히 젊은 층이 깨달았으면 한다.
#외모 지상주의 #학벌 사회 #미스코리아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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