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마디 한자말 털기 (73) 박하다薄

[우리 말에 마음쓰기 689] '인심 박하다', '박한 땅', '급여는 박했다' 다듬기

등록 2009.07.06 09:46수정 2009.07.06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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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공장 인심 박하다

 

.. 첫새벽 굽은 길을 / 곧게 가는 저 마누라 / 공장 인심 어떻던고 / 후하던가 박하던가 / 말없이 손만 젓고 / 더욱 빨리 가더라 ..  (직업 부인) / 《한용운-한용운 시집》(정음사,1974) 147쪽

 

 "인심(人心)이 후(厚)하다"고도 하고 '박(薄)하다'고도 하는 우리들입니다. 먼 옛날에도 이 말을 썼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퍽 널리 쓰는 말임은 틀림없습니다. 저도 어릴 적부터 귀에 익은 말입니다. 그러나 귀에 익기만 할 뿐, 말뜻은 썩 또렷하게 다가오지 않아요.

 

 ┌ 박하다(薄-)

 │  (1) 마음 씀이나 태도가 너그럽지 못하고 쌀쌀하다

 │   - 인심이 박하다 / 올해 담당 교수님은 학점이 박하기로 소문이 자자하신 분

 │  (2) 이익이나 소득이 보잘것없이 적다

 │   - 이익이 박한 상품 / 이윤이 좀 박하기는 했지만

 │  (3) 두께가 매우 얇다

 │   - 초봄에는 얼음이 박하니 강에 들어가지 마라

 │  (4) 맛이나 품질 따위가 변변치 못하다

 │   - 그 집 음식은 양은 많지만 맛이 박하다

 │

 ├ 후하던가 박하던가

 │→ 좋든가 나쁘든가

 │→ 넉넉한가 팍팍한가

 │→ 따뜻한가 차가운가

 │→ 괜찮은가 얄궂은가

 │→ 훌륭한가 형편없나

 │→ 살뜰한가 메마른가

 └ …

 

 국어사전에서 '厚하다'를 찾아봅니다. "너그럽다"와 "매우 두껍다"를 뜻한다고 두 가지 뜻풀이가 나옵니다. 이번에는 '薄하다'를 찾아봅니다. "너그럽지 못하다"와 "매우 얇다" 두 가지에다가 "보잘것없다"와 "변변하지 못하다" 두 가지가 더 있다고 나옵니다.

 

 곰곰이 생각에 잠깁니다. 우리가 "매우 두껍다"고 할 만한 자리에 '후하다'라고 쓰는 일이 있는지를. 우리 둘레 어느 누가 "매우 얇다"고 할 만한 자리에 '박하다'라고 쓴 일이 있었는가를. "얼음이 박하다"라든지 "얼음이 후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맛이 박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요.

 

 여러모로 널리 쓰면서 자리잡은 "인심이 후하다"와 "인심이 박하다"라 할 터이지만, 이런 자리에 쓰인 '厚-薄'은 예부터 익히 쓰던 '넉넉하다-쌀쌀하다'나 '너그럽다-모질다'를 밀어낸 외마디 한자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우리 깜냥대로 '좋다-나쁘다'라고도 하고, '따뜻하다-차갑다'라고도 하며, '따사롭다-매몰차다'라고도 했고, '푸지다-좁다랗다'라고도 했습니다.

 

 ┌ 인심이 박하다 → 마음씀이 쌀쌀하다

 ├ 학점이 박하기로 → 학점이 짜기로

 ├ 이익이 박한 상품 → 남는 돈이 보잘것없는 상품

 ├ 이윤이 좀 박하기는 했지만 → 내 몫이 좀 적기는 했지만

 ├ 얼음이 박하니 → 얼음이 매우 얇으니

 └ 맛이 박하다 → 맛이 변변하지 못하다 / 맛이 안 좋다

 

 아무래도 우리 스스로 우리 말을 잊거나 잃었다고 해야 옳겠구나 싶습니다. 나날이 우리 넋과 얼이 사라진다고 해야 맞겠구나 싶습니다. 차츰차츰 우리 마음과 생각은 자취를 감춘다고 해야 틀림없겠구나 싶습니다.

 

 교사나 교수가 학점을 잘 준다면, 말 그대로 '잘 주는' 일입니다. 학점을 안 준다면, 있는 그대로 '안 주는' 일입니다. 내 앞에 떨어지는 몫이 적으니 '적다'고 합니다. 보잘것없으니 '보잘것없다'고 합니다. 초라하니까 '초라하다'고 합니다.

 

 맛이 좋으면 '맛이 좋다'입니다. 맛이 나쁘면 '맛이 나쁘다'입니다. 그러고 보면, '맛좋다-맛나쁘다'는 한 낱말이 아니지만, 이렇게 한 낱말로 삼아 보아도 퍽 괜찮으리라 봅니다. 이처럼 우리 슬기를 빛내어 새 낱말을 살며시 빚어내 본다면, '薄하다' 같은 낱말이 엉뚱하게 끼어드는 일도 가로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ㄴ. 이 박한 땅도

 

.. 그런데 이 박한 땅도 녹두밭 웃몰 사람들이 주인이 된 것은 1948년 이후였다 ..  《오연호-더 이상 우리를 슬프게 하지 말라》(백산서당,1990) 28쪽

 

 '주인(主人)'은 그대로 두어도 되나, '임자'로 손보면 한결 낫습니다. "된 것은"은 "된 때는"으로 다듬고, '이후(以後)였다'는 '뒤였다'로 다듬습니다.

 

 ┌ 척박(瘠薄) : 땅이 기름지지 못하고 몹시 메마르다

 │   - 척박한 환경 / 토양이 척박하다

 │

 ├ 이 박한 땅도

 │→ 이 메마른 땅도

 │→ 이 거친 땅도

 │→ 이 팍팍한 땅도

 └ …

 

 '薄하다'라는 낱말뜻을 살피면, "땅이 메마르다"라는 뜻은 없습니다. 글쓴이가 잘못 썼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척박'이라는 낱말을 넣어야 올바릅니다. 그런데 이 보기글에서뿐 아니라 꽤 많은 자리에서 "박한 땅"이라느니 "땅이 박하다"라느니 하고 뇌까리는 우리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래도 '척박'이라는 낱말을 생각하면서, 외마디로 '薄'만 써 보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그렇지만, '척박'이라는 한자말은 '기름지지 않다'나 '메마르다'로 풀어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풀어내 주어야 듣거나 읽는 이한테도 손쉽고 살갑습니다. 손쉽게 쓰면 넉넉할 낱말을 굳이 어렵게 비꼴 까닭은 없습니다. 괜히 한자말 옷을 입혀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 척박한 환경 → 메마른 곳 / 팍팍한 터전

 └ 토양이 척박하다 → 땅이 메마르다 / 흙이 푸석푸석하다

 

 때와 곳에 알맞게 말을 하고 글을 써야 합니다. 이때에 가장 알맞을 낱말 하나를 찾아야 합니다. 저곳에 가장 걸맞을 말투 하나를 헤아려야 합니다. 서둘러 말해야 하든 느긋하게 말해도 괜찮든, 언제나 그때 그곳에 잘 들어맞게끔 말과 글을 알뜰히 추슬러야 합니다.

 

 

ㄷ. 급여는 매우 박했다

 

.. 일이 힘들지 않은 대신 급여는 매우 박했다 ..  《김담-그늘 속을 걷다》(텍스트,2009) 83쪽

 

 "힘들지 않은 대신(代身)"은 "힘들지 않은 만큼"으로 다듬고, '급여(給與)'는 '일삯'이나 '돈'으로 다듬어 줍니다.

 

 ┌ 급여는 매우 박했다

 │

 │→ 일삯은 매우 적었다

 │→ 일삯은 아주 쥐꼬리만 했다

 └ …

 

 말하고 글쓸 때 있는 그대로 말하고 글쓸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 이렇게 있는 그대로 말하거나 글쓰자면, 우리 눈길부터 세상과 사람과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매무새여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보고 있는 그대로 사람을 껴안으며 있는 그대로 자연에 녹아들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 말과 글은 꾸밈없는 아름다움을 찾습니다.

 

 있는 그대로 살아가지 않는 매무새에서는, 마땅한 소리입니다만,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글쓰지 않습니다. 꾸며서 글을 쓰고 꾸며서 말을 합니다. 겉치레를 하고 겉발림에 치우치고 겉핥기에 맴돕니다.

 

 ┌ 일한 삯은 아주 조금만 주었다

 ├ 돈은 아주 조금만 주었다

 ├ 일삯은 형편없었다

 ├ 일삯은 몇 푼 안 되었다

 └ …

 

 일한 보람을 아주 조금만 주었다 한다면 "일삯이 적다"는 소리입니다. "일삯이 형편없다"는 말입니다. "일삯이 쥐꼬리만 하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어이하여 "일삯이 薄하다" 하고 읊게 될까요. 왜 이와 같은 말굴레를 우리 스스로 뒤집어쓰고 말까요. 내 마음을 살리고 내 눈길을 살리며 내 생각밭을 살려 주는 말마디를 다스리기란 너무 힘든 노릇인가요.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2009.07.06 09:46ⓒ 2009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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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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