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3일, 용산 남일당 건물 옆으로 주민이 걸어가고 있다.
권박효원
안 가본 사람에겐 의외겠지만, 용산참사가 일어난 남일당 건물 일대는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주변 건물을 둘러싼 철거용 임시벽(펜스)에는 열사들의 얼굴이 벽화로 그려져 있고, 꽃도 나비도 그려져 있다. 한쪽에는 거울이 붙어 있어 용산을 지나는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누군가 버리고 간 침대 매트리스에 이명박 대통령을 풍자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좀 더 뒤편으로 가면, 빈 포장마차집이 있다. 이곳도 재미있다. 입간판에는 '아빠의 청춘 용산포차'라는 상호가 새로 적혔다.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린 메뉴판 대신 '류모텔', '참야콘 왕냉면', '나리네 반찬' 등 사라져간 가게들의 이름과 그 주인들이 그려져 있다.
서울 도심인데 텃밭도 있다. 지난 6월 10일 문화예술인 행동의 날에 아스팔트를 뒤집고 흙에 직접 채소를 심었는데 그 다음날 용역업체 직원들이 이를 뽑아버려서 지금은 화분에 기른다. 열무·상추·고추·오이 등 다양한 작물을 심어서 매일 물도 주고 잎도 솎아준다. 잘 자란 채소들은 철거민들이 따먹는다.
이같은 '아름다운 철거현장'의 중심에는 레아미디어센터가 있다. 남일당 건물 바로 뒤편에 있는 이 건물은 고 이상림씨가 운영하던 호프집인데, 지금은 용산을 오가는 활동가들이 '접수'했다. 이름은 '미디어센터'지만, 활동가들의 회의실도 되고 손님들의 수다방도 되고 기자들의 프레스센터가 되기도 한다. 카페도 되고 방송국도 되고 미술작업실도 된다. 7월 10일부터는 용산참사 부상자들이 미술치료 과정에서 그린 그림이 벽에 걸렸다.
벽화·텃밭·카페... 다시 태어나는 레아호프레아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뭐라고 정의하기가 어렵다. 운동은 하지만, 기존의 '활동가'처럼 특별한 단체에 몸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미술도 하거나 음악도 만들지만, '예술가'가 주된 직업은 아니다. 레아미디어센터에 상주하는 사람도 있고 오가는 사람도 있지만 따로 '지킴이'로 역할을 정한 것은 아니다.
이곳에서 만난 조약골씨는 이렇게 종잡을 수 없는 용산 활동가의 딱 대표적인 사례다. 이 사람은 일단 음악인이다. 그런데 천성산지키기 활동도 하고 한미FTA 반대투쟁도 하고 파병반대운동도 했다. 안티삼성운동도 하고 평화운동도 하고 환경운동도 한다.
요즘에는 주로 '피자매연대'에서 대안생리대를 만들다가 지난 4월 초 용산 레아미디어센터에서 '촛불방송국' 라디오 DJ로 살면서 생리대 재료 일체를 레아로 옮겨왔다. 철거민 인터뷰, 영어방송, '시국수다회' 등 요일마다 다른 프로그램으로 주5일 방송을 하는데, 모든 게 '라이브'이다 보니 현장의 몸싸움 소리, 경찰버스 시동 소리가 섞이는 방송사고가 다반사다.
긴 머리에 피어싱, 손톱을 예쁘게 물들인 검은색 매니큐어. 얼핏 철거민 어르신들과 안 어울릴 것 같지만, 조약골씨는 지난 2006년에도 '대추리 지킴이'가 되어 농민들과 함께 살았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이 만든 노래로 직접 CD를 굽고 라벨을 붙여 '평화가 무엇이냐'는 제목으로 음반을 만들었다. 용산에는 조약골씨 외에도 이렇게 대추리 지킴이로 살았던 젊은 활동가들이 많이 와있다.
활동하는 사람이 겹친다는 점 외에도 대추리와 용산은 공통점이 많다. 두 곳 다 국가 권력에 의해서 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잃어버렸고, 그 과정에서 공동체가 파괴되었다. 젊은 활동가들이 들어와 주민들과 함께 땅을 지키면서 현장을 예쁘게 치장했다. 대추리에도 방송국과 찻집이 들어섰고 대추분교 벽에는 벽화와 벽시가 그려졌다.
그러나 아주 똑같지는 않다. 결정적으로 공간의 위치가 다르다. 대추리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거주하는 마을이었고, 강제대집행 등 공권력 투입이 될 때 빼고는 경찰이 들어오지 않았다. 반면 용산에서는 남일당 건물을 따라 24시간 경찰버스가 상주하고 골목골목 용역업체 직원들이 돌아다닌다. 철거가 강행될 때는 물론이고, 매일 촛불미사 때마다 크고 작은 몸싸움이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