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짱 추모시집 출판기념회에 가다

미디어법 통과되던 날의 분노와 슬픔

등록 2009.07.23 20:35수정 2009.07.24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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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9년 7월 22일은 대표적인 'MB악법' 중의 하나인 '미디어법'이 난장판 국회에서, 국회의 광란 속에서 날치기로 통과된 날이다. 한나라당의 국회의원이라는 사람들이 다수당의 위력 속에서 극대화된 자기 모멸의 심연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몰염치와 파렴치, 그리고 후안무치의 진면목을 유감 없이 보여준 날이다.

나는 이날도 서울엘 갔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추모시집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 출판기념회가 인사동 거리의 한 골목, '시인'이라는 카페에서 열린다고 해서 그 자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지난 20일에도 서울을 갔다. 용산참사 반년이 되는 날이어서 '용산미사'에 참례하기 위해서였다. 대학생 아이들의 합정동 자취방에서 일박하고 다음날 아침 7시 10분 버스로 내려왔다. 길이 좋아져서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 태안 버스터미널까지 2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사실에 감사하며….

그런데 서울에서 내려온 다음날 또 서울에 간다는 것은, 어찌 보면 좀 방만한 행동일 터였다. 나는 국가유공자라서 시외버스 요금은 30% 할인을 받는다. 서울 왕복 요금이 1만1천 원 정도다. 지하철은 무임이다. 그렇더라도 돈 쓰고 시간 쓰고 고생하는 일임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나는 또 서울을 갔다. 262명 문인이 참여하여 484쪽의 큰 책으로 만들어진 노짱 추모시집, 노짱의 49재를 맞아 지난 9일 경남 김해시 봉화산 사찰 정토원 대웅전 안 노짱의 영정 앞에 헌정된 추모시집 출판기념회라고 했다. 그 시집의 헌정식과 10일의 유해 안장식을 보기 위해 '봉하'까지 갔다온 사람으로서, 출판기념회에도 참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지사일 터였다.


a 출판기념회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추모시집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 출핀기념회가 22일 저녁 6시 서울 인사동 골목 카페 '시인'에서 열렸다. 서 있는 이는 행사를 주관한 '한국문학 평화포럼' 사무국장 이승철 시인.

출판기념회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추모시집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 출핀기념회가 22일 저녁 6시 서울 인사동 골목 카페 '시인'에서 열렸다. 서 있는 이는 행사를 주관한 '한국문학 평화포럼' 사무국장 이승철 시인. ⓒ 김이하


나는 추모시집에 참여한 시인들과 다시 만나고 싶었다. 봉하마을에 함께 갔던 시인들도 많이 볼 수 있고, 그때 보지 못했던 시인들도 여럿 볼 수 있을 터였다. 그들에 대한 존경심과 애정, 동질감은 내 가슴에 충만한 상태였다. 그들은 적어도 노짱의 죽음뿐만 아니라 오늘의 민주주의 퇴보와 관련하여 동질의 눈물과 아픔을 공유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시대의 미망과 관련하는 슬픔과 분노, 새로운 결의와 희망들을 함께 껴잡고 나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건강 문제 때문에 비록 술잔을 함께 기울이지는 못하더라도, 나는 그들과 함께 하고 싶었다. 뜨거운 가슴으로 인간 삶의 참된 가치들을 소망하고 추구하는 깨어 있는 시인들의 언어 속에 푹 파묻혀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또 한번의 서울 출타를 쉽게 결정할 수는 없었다. 아내는 여름방학을 맞았음에도 이 달 말까지 오전 근무를 해야 한다고 했다. 병환을 겪으시는 노모를 쓸쓸히 혼자 계시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내는 지난번(20∼21일)처럼 내가 22일 오후에 서울에 갔다가 23일 아침 첫 버스로 내려오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로 나를 또 응원했다. 일단 그렇게 하기로 했고, 어머니께도 말씀드려 허락을 얻었다. 어머니는 내 승합차 뒷문 유리에 부착한 '조중동은 사죄하라'는 딱지를 떼게 한 일로 해서 내게 미안해 하시는 눈치였다. 내가 노짱 추모시집 출판기념회에 갔으면 한다는 말씀을 드리니 쾌히 허락을 하셨다.

<2>

a 반가운 문우들 박해전 시인(인터넷신문 '참말로' 회장), 박몽구 시인(월간 '샘터' 전 편집장), 방남수 시인(노무현 추모시집을 펴낸 도서출판 '화남' 사장) 등과 함께.

반가운 문우들 박해전 시인(인터넷신문 '참말로' 회장), 박몽구 시인(월간 '샘터' 전 편집장), 방남수 시인(노무현 추모시집을 펴낸 도서출판 '화남' 사장) 등과 함께. ⓒ 김이하


그렇게 결정을 했지만 나는 계속 마음속으로는 갈등을 했다. 지방에서 사는 핸디캡 같은 것을 곱씹으며 갈까 말까 망설였다. 그런데 'MB악법'의 하나인 '미디어법' 쪽으로 생각이 미쳤다. 한나라당이 22일 미디어법을 국회의장 직권상정으로 본회의에서 표결 처리할 것이 확실해지는 시점이었다.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은 그것을 막기 위해 육탄전을 불사할 터였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수적으로 절대 우위를 확보하고 있고, 한나라당 국회의장은 경호권 발동이라는 무기도 손에 쥐고 있으므로 미디어법은 난장판 속에서도 요식으로나마 통과될 것이 거의 확실했다.

그것을 생각하니 나는 이상하게 좀이 쑤시는 듯한 증상을 느끼게 되었다. 집에 가만히 있어서는 안될 것 같았다. 내 한 몸이 집에 가만히 있지 않는다고 무슨 수가 생기는 것은 아닐지라도, 도저히 집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는 심정이었다.

나서고 싶었다. 시대의 아픔을 공유하는 시인들 속에서 비분을 함께 나누는 일만이라도 해야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나는 22일 오전 마침내 서울 출타를 결심하고, 다시 여러 가지 약을 챙겨 가지고 오후 2시 30분 강남고속터미널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버스 안에서 TV를 통해 국회의 전쟁 상황, 악랄하고도 치사한 날치기 장면을 다 보았다. 한마디로 불쌍한 인간들이었다. 오로지 오늘의 권력에만 시야가 갇혀서, 자신의 얄팍한 이기에만 눈이 어두워서 만행을 저지르는 저 정치 소인배들, 치졸한 군상들의 작태에 신음과 한숨을 삭이면서 측은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고작 저런 짓을 하려고 가방 끈을 길게 늘이는 공부를 했단 말인가? 겨우 저런 치졸한 짓거리를 하려고 TV 앵커 노릇을 하며 명성(?)을 쌓았단 말인가? 오늘의 저런 만용으로 미디어법을 통과시켰다고 해서 그 법이 순조롭게 통용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한나라당의 미디어법은 근본적으로 '불순한 의도'를 안고 있다. 국민을 얕잡아보는 수작이 내재되어 있다. 그동안 조중동의 덕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그것은 이미 습성화되어 있다. 그들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시대가 흐르고 흘러도 대다수 일반 국민들은 제대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한다. 또 한국 사람들은 유난히 망각이 빠른 속성을 가지고 있다. 노무현 서거 조문객이 500만 명에 이르고, 지식인들의 시국선언이 줄을 이었다 해도, 그 수는 전체 국민의 일부일 뿐이다. 극히 소수만 용산미사니, 반대집회니, 항의시위니, 노조파업농성이니 하며 까불 뿐이고, 절대 다수 국민은 프로야구 경기장에서, 갖가지 위락시설들에서, TV 드라마 앞에서, 쇼핑 매장 안에서 즐겁게 생활하고 있다. 방송 장악이 온전히 되지 않고, 인터넷 언론이 활성화되어 어딘가 뚫리는 구석이 있긴 하지만, 미디어법 통과로 조중동과 재벌들에게 방송 채널을 갖게 하면 더욱 나은 조건 속에서 여론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 미디어법만 통과시키면 우리는 절대 정권을 다시 빼앗기지 않고 장구하게 이 나라를 지배할 수 있다.'

a 원로 시인의 인사말 원로 시인 강민 선생이 첫 번째로 마이크를 잡고, 미디어법이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된 날의 비분을 토로하면서 후배 시인들에게 더욱 용기를 갖고 살도록 격려했다.

원로 시인의 인사말 원로 시인 강민 선생이 첫 번째로 마이크를 잡고, 미디어법이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된 날의 비분을 토로하면서 후배 시인들에게 더욱 용기를 갖고 살도록 격려했다. ⓒ 김이하


이런 불순한 의도가 내재되어 있기에 그들은 미디어법에 목숨을 건 듯이 사생결단으로 밀어붙여 마침내 국회 요식 통과를 관철시킨 것이다. 하지만 온전한 요식도 아니었다. 그들이 억지로 행위한 요식에서부터 문제가 생긴 상황이다. 그것이 설령 또 다른 억지로 매듭이 지어진다 해도 그 매듭 또한 온전한 것일 리 없다.

그들은 오늘 드디어 미디어법을 통과시켰다고 승리의 표시로 주먹을 흔들고 손뼉을 치고 축배를 들겠지만, 오늘의 승리가 내일에도 그들의 명운을 챙겨 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들은 오늘 스스로 일생일대의 불명예를 만들었다. 오늘의 미디어법이 아무리 조중동 수구 족벌언론과 재벌들의 위세를 키워주고 그 위세 속에서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된다 하더라도 결코 그 발판은 굳건하거나 장구할 수 없다. 얼마든지 그들의 무덤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의한 것이고 그 불의한 것은 계속적으로 정의로운 힘의 운동을 불러내기 때문이다. 역설 같지만, 사실은 그런 역설이 이 세상을 발전시켜 왔다. 

<3>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 도착한 나는 지하철을 이용하여 종각역의 '영풍문고'로 갔다. 거기에서 아들녀석과 만났다. 대전 막내 동생이 주문하여 택배로 보내준 강원도 찰옥수수가 들어 있는 가방을 아들녀석에게 넘겨주고 함께 서점 구경을 하다가 노짱 추모시집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와 오마이뉴스에서 펴낸 오연호 대표기자의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를 한 권씩 샀다.

추모시집이 집에 두 권이나 있는데도 또 한 권을 산 것은 출판기념회를 주관하는 '한국문학평화포럼' 사무국장 이승철 시인이 "출판기념회는 회비가 없습니다. 서점에서 시집 한 권씩을 사오시는 것으로 회비를 대신하겠습니다"라고 한 공지 때문이었다. 아들녀석이 "학교 서점에서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를 샀다"고 해서, "그건 네 책이고, 아빠 책도 있어야 하니까"라는 말을 해주었다. 누구에게 책 선물할 일이 생기면 꼭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를 선택하라는 말과 함께….

종각 역 11번 출구 앞에서 아들녀석과 헤어진 다음 나는 인사동 거리로 들어갔다. 인사8길 골목 안으로 들어가서 '시인'이라는 카페를 찾을 수 있었다. 고색 창연한 느낌도 주고, 방안에 책도 많아서 시인(김여옥)이 사는 집임을 실감시켜 주는 카페 안에 이미 30여 명의 시인들이 모여 있었다.

홀에는 자리가 없어서 나는 방안으로 들어갔고, 박해전 박몽구 김흥수 이재무 공광규 시인들과 합석하여 음식을 들었다. 과거 호탕하게 술잔을 기울이던 기백은 사라지고 그저 점잖게 사이다나 마시는 내 꼴이 적이 미안스러웠다.

50여 명쯤 모인 상태에서 행사 사회를 맡은 정용국 시인(한국시조시인협회 사무총장)은 "오늘 2009년 7월 22일은 영원히 기억되고 또 기억해야 할 '치욕의 날'입니다. 이명박의 미디어법이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된 날입니다. '통과'라는 것이 과연 얼마만큼의 효력을 가질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우리는 오늘 이명박의 미디어법이 날치기로 통과된 치욕 속에서 큰 슬픔을 안고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시집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의 출판기념회를 갖게 되었습니다"라는 말로 행사 시작을 알렸다.

원로시인 강민 선생이 첫 번째로 마이크를 잡고 인사말을 했다. 그 역시 미디어법 통과에 대한 분노를 표시했다. "어리석고 분별 없는 무리들의 작태 속에서 우리 시인들은 더욱 냉철하게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슬픔과 분노, 그리고 일시적인 실의와 좌절을 디딤돌 삼아 더욱 힘차게 희망을 꿈꾸고 노래해야 합니다"라는 말로 후배 시인들을 격려했다.

a 노짱 티셔츠를 입고 나는 두 번째로 인사말을 하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유일하게 노짱 티셔츠를 입고 참석했는데, 건강 문제 때문에 겉옷을 벗을 수 없는 게 아쉬웠다.

노짱 티셔츠를 입고 나는 두 번째로 인사말을 하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유일하게 노짱 티셔츠를 입고 참석했는데, 건강 문제 때문에 겉옷을 벗을 수 없는 게 아쉬웠다. ⓒ 김이하


나는 두 번째로 인사말을 했다. 다소 파격적인 대접이었다. 아무래도 먼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에 대한 배려일 터였다. 나는 최근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노무현 형님 영전에 추모시를 바칩니다"라는 글이 우리 고장의 <태안신문>에 게재된 사실을 소개했다. 추모시집 사진과 노짱의 얼굴 사진, 내 간략한 산문과 추모시 <내 가슴에 눈물로, 희망으로 살아>가 한 면 가득 보기 좋게 편집된 7월 16일치 신문의 여분을 수십 부 얻어다가 우체국과 여러 금융기관들, 아내의 학교 교직원들과 성당 식구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접한 반응들도 소개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호의적이거나 반기는 눈빛이었다. 젊은 사람들일수록 더욱 그러했다. 나는 그들의 태도에서 어떤 희망을 안는 기분이었다. 확실히 젊은 층일수록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그들의 마음을, 그 속내를 잘 표발시키고 결집시켜 나아간다면 우리는 기필코 선거 혁명을 이룰 수 있어. 그것을 목표로 더욱 뜨겁고 활기차게 살아야 해.' 나는 그런 다짐을 되새길 수 있었다.

참석 시인들 가운데는 전직 언론인도 있고, 현직 대학교수들도 여러 명이었다. 일본에서 오래 생활하다가 온 교수 시인도 있고, 노짱 생전에 노짱과 친분을 나누었던 교수 시인도 있었다. 거의 모든 시인들이 차례로 돌아가면서 인사말을 했다. 추모 분위기가 관련되는 자리인 만큼 노래는 하지 않기로 했으나, 민주주의가 퇴보하고 삶의 가치들이 파괴되는 현상 속에서 갖게 되는 슬픔을 추스르느라 슬픈 음조의 노래를 부르는 이들도 두엇 있었다.

나는 모든 이들의 인사말이 끝나고 절반 정도 이석을 한 상태에서 술판이 계속될 때 몸을 일으켰다. 술을 마시지 못하니 힘든 면도 있었다. 과로는 금물인 건강 문제도 생각해야 했다. 남아 있는 모든 시인들의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미인인 김여옥 시인이 운영하는 카페 '시인'을 나왔다.

예전처럼 걸판지게 술자리를 즐기지 못하는 아쉬움 속에서도 대표적 'MB악법'인 한나라당 미디어법이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된 날의 분노와 슬픔을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추모시집'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의 출판기념회 자리에서 어느 정도는 해소할 수 있었다. 내가 오늘만 사는 게 아니고, 우리에게 오늘만 있는 것이 결코 아니므로….
#노무현 추모시집 #추모시집 출판기념회 #미디어법 #국회 날치기 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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