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역사에 불가사의란 없다

[여행기중독자 17] 도올 김용옥의 <앙코르와트 월남 가다>

등록 2009.08.03 18:00수정 2009.08.0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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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 통나무

지난 7월 30일, 대한민국 정부의 대통령직속 기관 '인권위원회'는 '세계국가인권기구 국제조정위원회(ICC)' 의장선거에 후보를 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현 정부의 후진적 인권의식을 정부 스스로 인정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다. 현 정부가 좋아하고 숭배해 마지않는 '글로벌 스탠더드'와 '국가브랜드'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인권의 글로벌 스탠더드'는 어디 갔으며, '인권의 국가브랜드'는 어디 간 걸까? 자본의 자유는 기필코 미국 수준에 맞춰줘야 하지만, 인권문제는 과도하게 선진화되었으니 중진국이나 후진국 수준으로 조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인가?

대통령도, 대변인도, 집권당도 말이 없다. 용산 참사도, 전직 대통령의 죽음도 뭉개다보면 덮어지는 나라이니, 이 정도 국제적 망신이야 일주일짜리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광화문 광장'같은 달콤한 이벤트도 있고, '미디어 법'같은 무시무시한 논쟁거리도 있으니 든든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설마 이게 왜 망신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고 있는 걸까? 정부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오해인지 진실인지 모를 나의 생각은 점점 더 커져만 간다.


여행기중독자가 '앙코르와트'로 떠나기 전에 이 사건을 언급하는 이유는 국제적 망신도 망신이거니와, '글로벌 스탠더드'나 '국가브랜드'라는 단어가 풍기는 수상한 뉘앙스 때문이다. 이 용어에는 이미 세계와 역사를 바라보는 서구 중심적이고, 자본 중심적인 시각이 담겨 있다. 현 정부가 말하는 '글로벌 스탠더드'는 '미국식 거래', '국가브랜드'는 '잘사는 나라'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미국식 거래'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정과 이익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고 있고, '대한민국의 이미지'는 돈만 있으면 자존심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앙코르와트' 여행자의 필독서

도올 김용옥 선생과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캄보디아'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웅장하고 아름다운 고대유적 '앙코르와트'로 떠나는 여행은 그래서 소중하다. 이 여행기는 다른 누구의 관점이 아닌 아시아인의 시각으로 아시아 문명을 바라보고자 하는 야심찬 의도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코 평범한 여행담이 아니다. 이것은 조선인이 아시아 문명권에 관하여 사상적 메스를 가한 매우 조직적인 문명론의 한 독창적 전기로서 이해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민족은 이제 아시아로 환생해야 한다. 아시아적 세계관 속에서 아시아적 가치를 구현하는데 우리가 솔선수범해야 한다. 과거 일본의 제국주의적 음모 속에서의 아시아연구가 아니라, 아시아적 가치 속에서 아시아적 공생을 통해 인류의 새로운 보편적 비전을 제시하는 뉴 사이언스로서의 아시아학을 정립해야 한다. - 서문 중"

도올 선생의 여행은 그리 길지 않았다. 8일 간의 여행을 다녀와서 두 권의 책을 써냈다. 도올 문집 9권, 10권인 <앙코르와트 월남가다>는 짧은 여정에도 불구하고 방대한 사전조사와 세밀한 현장답사를 통해 우리를 앙코르와트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안내한다. 최고의 앙코르와트 해설서이다. 묵직한 열쇠 꾸러미를 들고 비밀의 문을 하나하나 열어 보이는 그의 목소리에는 흥분과 자신감이 넘친다.


또 이 책은 요즘 같은 한여름에 읽어야 제 맛이기도 하다. 여행기를 읽다가 땀 한 방울이 겨드랑이를 타고 흘러내릴라치면, 뙤약볕 아래에서 앙코르와트를 걷는 기분을 120% 느낄 수 있다. 더우면 더울수록 일체감이 더하니, 찬바람 불기 전에 읽어 볼 일이다.

'앙코르와트'에 대한 기초상식

세계 어딜 가나 고대 유적을 둘러보기 전에 가장 필요한 것은 기초지식과 생수이다. 지적 흥분이 있는 한 생수는 모자라도 견딜 것이되, 지적 흥분이 없다면 생수가 남아돌아도 괴로울 것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국의 자금성, 파키스탄의 모헨조다로, 페루의 마추픽추 등등의 제 아무리 유명한 유적도 배경지식이 없으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처음에야 '아, 내가 드디어 여기에 왔구나'하는 감흥과 고색창연한 첫인상에 흥분하겠지만, 뜨거운 태양 아래 비슷비슷한 건물과 돌덩어리 사이를 걸어 다니다 보면, 처음 느꼈던 황홀감은 사라지고 머나먼 출구만 애타게 찾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 더욱이 '앙코르와트'에 서려 있는 캄보디아의 역사와 힌두교라는 종교는 우리에게 매우 생소하다. 가이드북의 간단한 설명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하여 잠시 '앙코르와트'를 위한 기초상식을 짧게나마 요약해 보고자 한다.

먼저 캄보디아의 지정학 상식이다. '인도차이나 반도'는 캄보디아를 포함한 베트남, 태국, 미얀마, 라오스, 말레이시아 일부를 포함한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말 그대로 '인도와 중국 사이에 있는 반도'라는 뜻으로, 프랑스와 영국의 식민지 개척기에 편의상 붙인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인도 쪽은 영국이, 베트남과 캄보디아 쪽은 프랑스가 장악했으며, 태국은 이 사이에서 기민한 외교로 완충지대를 자임하며 독립을 유지했다.

한 발짝 더 안으로 들어가 보자. 베트남과 캄보디아, 태국의 역사가 보인다. 캄보디아는 현재는 불교국가이지만, 과거에는 인도의 영향을 받은 힌두교 국가였다. 불교국가에 거대한 힌두교 유적이 남아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반면 베트남은 '월남'이라는 나라이름으로도 알 수 있듯이 중국 문화권에 속한다. 우리나라와 유사하게 유교문화가 강하다('호치민'이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탐독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캄보디아와 베트남은 공산 정권을 거쳤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문화적으로는 완전히 다르다.

한편 캄보디아와 태국은 같은 불교국가이지만 전통적으로 적대감정을 가지고 있다. '씨엔립'이 '샴족을 물리쳤다'라는 뜻이고, 태국의 '샴족'이 캄보디아의 고대왕국 크메르제국을 멸망시킨 사실은 오랜 애증의 역사를 말해 준다. 캄보디아가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된 이유는 <킬링필드>로 알려진 내전의 영향이 가장 크지만, 중국과 인도, 서구 열강, 태국과 베트남으로 이어지는 먹이사슬의 끝에 있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이제 한발 더 들어가서 '앙코르와트'로 가보자. '앙코르와트(Angkor Wat)'는 '앙코르(Angkor 도시, 왕도, 제도)'와 '와트(Wat 사원)'가 합쳐진 말이다. 다시 말해 '왕도의 사원'이라는 뜻인데, 여기서 '왕도'는 고대왕국인 크메르제국의 수도였던 '씨엔립'이라는 도시를 가리킨다. 크메르제국은 크메르족이 세운 왕국으로, 서기 1세기부터 15세기까지 캄보디아 지역을 지배했던 제국이다(영화 '킬링필드'에 나오는 단어인 '크메르루즈'는, '루즈'가 빨간색을 의미하므로 '크메르족 빨갱이'라는 뜻이다).

크메르제국의 역사는 크게 후우난 시대, 쩐라 시대, 앙코르 시대의 세 시기로 구분되는데, '앙코르와트'는 크메르제국이 가장 강성했던 '앙코르 시대(802년~1432년)'에 지어진 사원이다. '씨엔립' 주변에는 앙코르와트뿐만 아니라 앙코르 시대에 지어진 여러 힌두교 사원들이 산재해 있으며, 앙코르와트는 그중에서 가장 후기에 지어진 대표적인 앙코르 사원이다. 

내용과 연대를 무시하고 쉽게 예를 들자면, 앙코르와트는 서울의 경복궁에 해당하는 유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덕수궁이나 창경궁, 종묘처럼, 씨엔립 주변에는 앙코르와트 말고도, '프레아 코' 사원, '바콩' 사원, '반테이 스레이' 사원, '타 프롬' 사원, '앙코르 톰' 사원 등이 있는 것이다.

힌두교 전통문양, '린텔'의 아름다움 

이것은 도올 선생의 재미있는 해설을 매우 거칠게 요약한 것이다. 저자는 상권의 전반부에서 캄보디아의 문화와 역사를 집중 조명한다. 이는 앙코르와트를 제대로 알기 위한 사전작업으로, 읽다 보면 흡사 동양역사의 미개척지를 함께 탐사하는 기분에 빠지게 된다.

도올 선생은, 가장 오래된 사원이며 그의 첫 방문지인 '프레아 코(879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작심한 듯 천년의 신비를 풀어헤치기 시작한다. 그는, 앙코르 유적의 그로테스크한 풍경과 사원의 예술성이 일견 불가사의해 보이지만,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아시아의 역사를 제대로 탐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프레아 코'의 건축양식을 세밀히 관찰하면서, 그것은 석조양식이 아니라 목조양식임을 발견한다. 이것은 그 당시 대부분의 다른 건물이 목조건물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앙코르 유적이 보여주는 그로테스크한 풍경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된다. 천년의 세월동안 왕궁을 포함한 다른 모든 목조유적은 흙으로 돌아갔고, 웅장한 석조사원들만이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육중한 사원을 삼켜버린, 사원보다 더 육중한 나무뿌리들을 보면 목조건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추론이 더 이상 불가사의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또 하나, 그는 각 신전의 입구 위를 장식하는 조각물인 '린텔(Lintel)'에 주목한다. 린텔은 힌두교의 신화체계를 독창적인 문양으로 양식화한 크메르족의 만다라이다. 언뜻 보면 아라베스크와 흡사한, 아름답지만 뭐가 뭔지 모르게 복잡해 보이는 문양이다. 도올 선생은 흥분에 들뜬 마음을 숨기지 않고, '린텔' 예술의 아름다움에 대해 설파한다. 그의 설명을 듣고 있노라면, 린텔 속의 시바신과 비슈누신, 그리고 입벌린 괴물 '칼라'와 소(난디), 독수리(가루다), 코브라(나가)가 압축적인 문양 속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린텔'을 세밀하게 감상한 그는 '프레아 코'의 린텔이야 말로 모든 린텔예술의 최초의 작품이자 결정판이라고 감탄한다.

"반테이 스레이의 린텔은 더 깊고 화려하고 또 매우 혁신적이지만 너무 현란하고 이념적이다. 앙코르와트의 린텔은 너무 반복적이며 설명적이며 신화적이며 느끼하다. 앙코르 톰(바이욘)의 린텔은 불교적이어서 너무 거칠다. 이 모든 린텔예술의 창조적 가능성이 압축되어 있으면서, 소담하고, 무한한 상상력의 오리지날리티를 과시하고 있는 작품이 바로 프레아 코 현관 위에 걸려 있는 린텔인 것이다. "

도올 선생의 린텔 탐구는 여기에 멈추지 않고, 린텔 조각이 품고 있는 '성적 함의(sexual connotation)'에 대한 철학적 분석으로 나아간다. 린텔의 제일 상단에는 '시바신'이 괴물 '칼라' 위에 올라타고 있다. 시바신은 파괴의 신으로 '창조와 생산을 위한 파괴'라는 힌두교의 교리를 상징한다. 힌두교는 창조와 파괴의 작동원리를 섹슈얼 판타지로 담아냈다. 린텔 조형의 중심이 시바신의 음부(즉, 우리말로 자지나 보지)에서 뻗어 나오고, 또 그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구조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힌두교의 교리는 몸의 논리, 욕망의 논리를 억압하는 서양의 사유방식(즉 플라톤주의나 계몽주의, 동정녀 신화와 같은)과 대비된다. '성적 환타지를 인간 신체의 물리적 사태가 아니라 신적인 영감으로 파악하는 경지'는 서양 철학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인간 중심적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그는 린텔의 성적 판타지를 통해 신화의 보편적 의미를 도출해내기 이른다.

"신화는 주관적 세계와 객관적 세계의 괴리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신화는 바로 그 괴리를 해결하려는 인간의 노력이다... 신화가 중요하다는 것은 바로 그것이 인간의 삶에 의미와 권위와 목적을 주기 때문이다. 종교도 곧 신화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자신의 심적 내면의 갈망과 외적현실의 괴리에 새롭게 적응하려는 끊임없는 판타지, 그 판타지야 말로 신화와 종교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

여행기는 이렇게 첫 번째 사원 '프레아 코'가 보여주는 종교적 의미와 조형미를 상세히 소개한다. 하루의 여행이 책 반 권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저자의 치밀한 의도가 깔려 있다. 가장 오래된 사원인 '프레아 코'에서 사원 감상법의 기초를 축조하여, 독자들이 다른 사원들을 능동적으로 탐사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바콩 사원, 반테이 스레이, 프놈 바켕, 앙코르 톰, 바이욘, 타프롬, 앙코르와트는 그저 흩어져 있는 비슷비슷한 사원들이 아니라 각자의 역사와 개성을 뽐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헤쳐모이며 하나의 역사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앙코르는 신기한 구경거리에 머물지 않고 뜯어볼수록 흥미롭고 아름다운 우리 이웃의 역사가 된다. 도올 선생은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신비한 유적이 결코 불가사의한 것이 아님을. 그것의 의미는 동양적인 관점에서 볼 때만이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

사는 게 거짓말 같을 때

여행기중독자는 이제 수많은 앙코르 사원을 만날 준비가 된 것 같다. 다른 모양의 사자상 궁둥이를 비교해 보며 각 왕조의 특성을 유추할 수도 있을 것이고, 바콩 사원의 거대한 돌 코브라 '나가'를 보고 비명을 지르기도 할 것이다. 프랑스의 지성 '앙드레 말로'가 밀반출하려다 개망신 당했다는 (일명 '반테이 스레이의 모나리자'라 불리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여신상도 만나고 싶고, 나무뿌리가 신전을 집어 삼킨 '타 프롬'에서 자연의 회귀본능을 곱씹고도 싶다. 석양 무렵에는 꼭 프놈 바켕에 올라 씨엔립의 황혼을 바라봐야만 한다는 것도 알고, 앙코르의 조각 중 가장 아름다운 조각품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 서울 역사박물관에 왔다 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당장 가지 못해 씁쓸하고, 코앞에 왔었는데도 모르고 그냥 보냈으니 한심하다.

"신화는 자신의 심적 내면의 갈망과 외적현실의 괴리에 새롭게 적응하려는 끊임없는 판타지이다"라는 도올 선생의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도대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신화는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인권'과 '글로벌 스탠더드'의 괴리를 메워줄 신화는 무엇일까?

그것은 부끄러운 것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 안에 있을 것이다. 또 부끄럽지 않은 것은 부끄러워하지 않는 마음 안에 있을 것이다.

앙코르와트, 월남가다 -상 - 조선인의 아시아 문명탐험

김용옥(도올) 지음,
통나무, 2005


#앙코르와드 월남 가다 #도올 김용옥 #통나무 #앙코르와트 #동남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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