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에 김영갑이 있었네

영혼을 담은 사진가, 끼니 대신 사진을 택했던 김영갑의 삶

등록 2009.08.05 14:29수정 2009.08.05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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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 놓인 방명록 ⓒ 임지혜


김영갑을 알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좋아하는 사진들은 생생한 보도 사진, 현장 사진들이었다. 그러나 김영갑을 알게된 뒤부터는 풍경 사진이 가져다주는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오로지 사진 찍는 일에만 최선을 다했던 김영갑, 루게릭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열정을 끝까지 보여줬던 몇 안되는 예술가 중의 한 명이다.

그의 저서 '그 섬에 내가 있었네'는 김영갑을 좋아한다면 꼭 봐야하는 책이자 김영갑을 좋아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책이다. 제주도에 내려와 살면서 겪었던 생활상과 루게릭병에 걸렸다는 걸 알게된 뒤의 그의 심리 상태와 갤러리 두모악을 만들기까지의 과정들이 책에 실려 있다.


김영갑은 돈이 없어 제주도에서도 집값이 싼 시골 마을로 찾아들었다. 그 작은 마을에서도 셋방을 얻어 살아야했는데, '낯선이방인'인 김영갑은 경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간첩인 것 같다는 마을 주민의 신고로 경찰서에 드나들기도 여러 번이었고, 마을을 떠나라는 소리도 들었다. 그러나 김영갑은 그런 주민들을 미워하기보다는 이해하려 애쓰며, 꿋꿋이 살아나갔다.

그것이 기특해보였는지 이래저래 길을 가다 만난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혼기가 다 찼음에도 혼자 사는 김영갑을 걱정하며 어서 여자를 만나라고 진심 어린 잔소리를 늘어 놓곤 했다.

김영갑은 물로 허기를 채우면서도 필름을 사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고, 오름으로 들판으로 그렇게 헤매고 다녔다. 그렇게 찍은 필름은 제주의 습기 탓에 곰팡이가 피기 일쑤였고, 장마에 카메라를 버리는 등 사진 작업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김영갑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카메라를 장만하고 또 사진을 찍었다.

이런 궁핍한 생활을 해왔던 김영갑이었기에 그가 나중에 회고한 이 말에 나는 너무 가슴이 아팠다.

이젠 끼니를 걱정하지 않는다. 필름값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형편이 좋아졌다. 그런데 카메라 셔터를 누를 수 없다. 병이 깊어지면서 삼 년 째 사진을 찍지 못하고 있다. 끼니 걱정 필름 걱정에 우울해하던 그때를, 지금은 다만 그리워할 뿐이다. 온종일 들녘을 헤매 다니고, 새벽까지 필름을 현상하고 인화하던 춥고 배고팠던 그때가 간절히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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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생전에 쓰던 카메라와 필름들은 모두 그대로인데, 그만 없다. ⓒ 임지혜


요즘은 누구나 카메라를 들고 다닌다. 나 역시 dslr을 가지고 있다. 저마다 모두 멋진 사진들을 찍어 자랑하고, 사진은 이렇게 찍어야한다라고 한바탕 강의를 늘어놓는다. 장비에 대해서는 웬만큼은 전문가이다. 하지만 진정 영혼을 담는 사진가는 몇 안된다. 나 역시 영혼을 담는 사람은 아니다. 그저 어떻게 하면 멋진 그림이 나올지 고민하면서 셔터를 누르고, 수많은 사진 중 한두 장 볼만한 것들을 건질 뿐, 마음이 없다. 담지 못한 마음을 긴 글로 설명할 뿐이다.

김영갑은 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셔터를 함부로 누르지 않고, 마음 속 사진을 찍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


사시사철 똑같은 장소에서 동일한 카메라, 동일한 방법, 동일한 목적으로 촬영해도 사진가마다 사진이 다르다. 어떤 순간이나 이미지를 상상하고 원하는 순간이 오기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쉽게 기다림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도 있고, 기다림이 영원히 계속될 수도 있다. 상상력이 빈곤한 사진가는 작업을 적당히 마무리하기 위해 기술적인 장치에 의존한다. 자연을 소재로 하는 풍경사진도 작가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개입시킬 수 있다. 우연히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지만 철저한 준비 뒤에 얻는 사진의 감동을 따라갈 수는 없다.

태양의 위치나 그날의 날씨 변화는 사진가가 개입할 수 없지만 원하는 순간을 기다릴 수는 있다. 셔터 누를 순간을 포착하는 것은 사진가의 의지다. 김영갑의 사진들에선 비와 바람, 안개들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사진들을 어떻게 찍었을까 하고 감탄하다가 곧 내 이마를 때린다. '김영갑은 이 비와 바람과 안개를 서서 그대로 다 맞았던 거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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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그는 돌담 하나 나무 하나를 심는 데, 온 정성을 기울였다. ⓒ 임지혜


내가 사진에 붙잡아두려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있는 그대로의 풍경이 아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들판의 빛과 바람, 구름, 비, 안개이다. 최고로 황홀한 순간은 순간에 사라지고 만다. 삽시간의 황홀이다.

셔터를 누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강렬한 그 순간을 위해 같은 장소를 헤아릴 수 없이 찾아가고 또 기다렸다. 누구나 볼 수 있는그런 풍경이 아니라 대자연이 조화를 부려 내 눈앞에 삽시간에 펼쳐지는 풍경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림의 연속이다. 그 한순간을 위해 보고 느끼고, 찾고 깨닫고, 기다리기를 헤아릴 수 없이 되풀이했다.

김영갑의 사진이 그걸 보는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건, 그가 단순히 사진 잘 찍는 기술자가 아니라 삽시간의 황홀을 담기 위해 언제나 '보고 느끼고, 찾고 깨닫고, 기다리기를 헤아릴 수 없이 되풀이'할 줄 아는 영혼을 담는 사진가였기 때문이다.

<그 섬에 내가 있었네>를 덮으며, 나는 또 다시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 찾아가야지 마음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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