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 "진보정당이 의회권력에 개입한다면?"

마들연구소 주최 강연회... "진보정당, 아주 포괄적인 길로 나아가야"

등록 2009.08.05 21:11수정 2009.08.05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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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들연구소의 초청특강에서 진보정당의 필요성과  진보정당이 나아갈 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박노자 교수.
마들연구소의 초청특강에서 진보정당의 필요성과 진보정당이 나아갈 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박노자 교수. 이대암

박노자 오슬로대학교 교수는 마들연구소의 초청특강에서 진보정당의 필요성과 진보정당이 나아갈 길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놨다.

지난 4일 밤 서울 노원구 북구고용지원센터에서 열린 박노자 교수 초청특강에는 200여 명의 청중이 몰려왔다. 강연장은 빽빽했고 의자가 모자라 서있거나 걸터앉은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마들연구소를 운영하는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도 평택 쌍용차공장에서 급히 돌아와 박노자 교수를 맞았다. 노 대표는 "박노자 교수를 초청하기 위해 오슬로에까지 가서 부탁했었다"고 말하며 박노자 교수를 환대했다. 

진보정당이 절실히 필요한 이유

박노자 교수는 "왜 진보정당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지, 한국에서 진보정당이 나아갈 길이 무엇인지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다"며 강연을 시작했다.

먼저 박 교수는 자신이 느꼈던 2003년의 무력감에 대해 이야기했다.

"2003년에 어떤 세계사적 사건이 있었는지 기억하시죠? 바로 이라크 침략이죠. 세계 전역에서 일제히 반전데모를 했습니다. 런던의 경우에는 영국 역사상 최대 시위가 있었죠. 그런데 왜 그 기억을 더듬으며 무력감을 느끼느냐? 답은 아주 쉽습니다. 200만 명이 런던 거리를 메웠지만 그 다음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영국의 이라크 침략이 그냥 일어났습니다."


"이렇듯 구미권의 민주주의란 민의를 철저하게 무시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획일적인 데모형태로 표현되는 민의라면 무시하면 그만인 거죠. 보도 안 하면 그만입니다."

박 교수는 2003년의 무력감을 떠올리며 의회권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반전평화주의적 민의를 진전시키려면 어느 정도 의회권력이 개입했어야 한다"며 당시에 "제대로 된, 대중화된 진보정당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고 말했다.


한국의 쌍용차 사태에 대해서도 "쌍용차 노동자들을 살려야 된다는 민의가 많더라도 현 국회의 구성원들을 보면 노동자들이 죽음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진보정당이 어느 정도 의회에 개입할 권력이 있었다면 쌍용 노동자들의 고통이 덜하지 않았겠느냐"며 대중화된 진보정당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한국 진보정당은 후발주자, 함정 피해갈 수 있다"

박노자 교수는 "한국은 새롭게 대중 진보정당을 시작하는 것"이라며 "한국 진보정당은 외국에 비해 후발주자"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후발주자는 앞서 간 사람들의 문제점을 파악해 시간과 노력을 아낄 수 있고, 검증된 결과를 가지고 새로운 것을 해볼 수 있다"며 후발주자의 장점을 역설했다. 그는 "유럽 150년, 일본 80년의 진보정당 역사가 있다"며 앞서 간 나라들이 한국의 반면교사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한국 진보정당은 '선배'들이 빠졌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더 잘 나갈 수 있지 않을까"란 희망을 조심스레 꺼내 놨다. 

박 교수는 '선배' 진보정당들이 빠졌던 함정으로 '대형 정규직 노조에 지나치게 기대는 통속적 대중성'과 '게토형 군소정당화'를 꼽았다.

먼저 통속적 대중성에 대해서는 영국 노동당, 독일 사민당, 프랑스 공산당의 예를 들어 설명했다. 박 교수는 "영국 노동당은 보수정당으로 변질이 완료됐고, 독일 사민당은 변질의 중간 단계이며, 프랑스 공산당은 망해버렸다"고 분석했다. 그는 "대기업 노조에 의지하다가 신자유주의의 대표주자가 되었다"며 세 정당의 몰락 원인을 대형 정규직 노조에 대한 지나친 의존에서 찾았다. 

"진보정당이 대기업 노조를 안고 가는 건 물론 필요하지만, 그것으로만 족하다는 의식이 생기면 그때부터 정당이 몰락한다고 생각합니다. 도요타시스템과 같이 대기업은 대기업 노조를 체제권 안으로 포섭시킵니다. 대기업의 숙련노동자들은 신자유주의의 압력을 덜 받게 되지요. 하지만 그 뒤에 숨은 비정규직은 원칙적으로 배제됩니다."

"진보정당이 대기업 노조에만 의존한다면 결국에는 대형 노조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이익단체가 되고 사회에서는 고립되며 더 넓은 대중을 응집시키지 못하는 한계에 부딪히게 됩니다."

 박노자 교수가 진보정당이 나아갈 길에 대해 열강하고 있다.
박노자 교수가 진보정당이 나아갈 길에 대해 열강하고 있다. 이대암

박노자 교수가 언급한 두 번째 '함정'은 게토형 군소진보정당화였다. 박 교수는 유럽의 다양한 군소진보정당의 예를 들며 이 정당들은 "사회를 바꾸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서구의 어느 나라를 가도 급진좌파정당은 몇 개씩 있습니다. 이들은 언제나 바른 소리, 바른 행동을 하지만 당원수는 늘지 않고 사회에서는 철저히 고립되어 있습니다. 당원들을 조사해보면 주로 노동자가 아닌 대중적인 지식인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런 정당들은 수십 년 동안 지구력 있게 살아남을 수 있지만 더 이상 커지지도 못하고 사회를 바꾸지도 못하고 이렇게 바른 소리만 하다가 조금씩 조금씩 줄어갈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군소진보정당의 한계를 지적한 박 교수는 이 정당들이 "지식인 위주로 이론과 장기적 비전에 집착함으로써 주변부 노동자들을 모으지 못한다"고 분석했다.

그는 '대형 정규직 노조에 대한 의존'과 '게토형 군소정당화' 모두 우리가 피해가야 할 함정이라며 "결국 그 사이의 중도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한국형 진보정당이 나아갈 길, 복수화와 포괄화

그렇다면 외국 진보정당이 빠진 함정을 피하고 '중도'로 나아갈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

박노자 교수는 먼저 이념의 복수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정당은 특정 이념, 특정 이론, 장기전 비전만을 내세워선 안 됩니다. 한 이론에만 집착하게 되면 호소력이 심하게 제한되고 장기적인 성장이 불가능해집니다."

"노동자들은 단기적 비전을 중시합니다. 당장 무언가 해결되는 걸 보고 싶어 하지요. 장기적 비전 중심이 되면 주변부 노동자들은 모이지 않고 결국 지식인 위주의 정당이 됨으로써 파멸의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이 박 교수는 이념의 단수화, 비전의 장기화의 큰 위험성을 지적하며 한국의 진보정당은 "다양한 사고들이 기반이 된 정당이 되어야" 하고 "단기, 중기, 장기 비전을 모두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최장기 비전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것이겠지만 중기 비전은 복지와 공공성 국가 수립, 단기적 비전은 쌍용자동차 노동자에 대한 대량학살에 가까운 행동, 국영기업 민영화 등 신자유주의의 현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라며 "상황에 따라 방편을 달리하는 임기응변이 필요하다"고 했다. 

 지난 4일 밤 노원구에 위치한 북구고용지원센터에서 열린 박노자 교수 초청특강에는 200여 명의 청중들이 몰려와 강연장을 가득 메웠다.
지난 4일 밤 노원구에 위치한 북구고용지원센터에서 열린 박노자 교수 초청특강에는 200여 명의 청중들이 몰려와 강연장을 가득 메웠다. 이대암

박 교수가 다음으로 제시한 방안은 진보정당이 아니면 조직할 수 없는 이들을 응집시키는 활동이다. 그는 "주변부 노동자와 노동자조차 되지 못할 사람들이 대기업 노동자보다 몇 배나 더 많다"며 이들이 진보정당의 잠재적 지지자라고 역설했다.

그는 ①일부 명문대생을 제외한, 88만원 세대가 될 대다수 대학생들 ②광범위한 의미의 실업자군 ③비정규직과 같이 생존의 선을 왔다갔다 하며 일하는 빈곤층 ④전업주부, 가사노동자 ⑤외국인 인구를 진보정당의 기반이 될 잠재적 지지자라고 설명했다.

"이들에겐 본인들의 절실한 과제가 있습니다. 생존문제와 직결되어 있지요. 진보정당이 제대로,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한다면 얼마든지 활발한 상호작용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얼마나 돈을 들여서 구마다 몇 개의 유치원을 만들 것이고, 거기에서 몇 가지 일자리가 어떻게 생길 것이란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한다면 그 많은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박 교수는 진보정당이 기존 정당의 한계를 넘어서서 취약계층, 불우한 노동계층 속으로 뛰어듦으로써 "진보정당이 아니면 조직할 수 없는 그들을 응집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서 "진보정당은 아주 포괄적인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박노자 교수(좌)와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우)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박노자 교수(좌)와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우)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이대암

박노자 교수는 외국의 진보정당 역사를 반면교사와 타산지석으로 삼아 '중도'로 나아가려는 노력이 계속해서 이루어진다면 "한국형 진보정당도 나중에는 지역이나 세계에서 뭔가 관심 대상이 되지 않을까란 야무진 상상을 해본다"며 소리 없는 짙은 미소로 강연을 마무리했다.  
#박노자 #마들연구소 #노회찬 #진보정당 #진보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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