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자들이 민족적이었다는 편견은 버려

[책 속으로 떠난 역사 여행 46] 이경구 <17세기 조선 지식인 지도>

등록 2009.08.19 22:00수정 2009.08.19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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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17세기는 격변의 시기였다. 왜란과 호란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 위에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고, 왕실과 양반층의 권위도 예전 같지 않았다. 전쟁에서 보여준 왕실과 양반의 모습이 백성들이 믿고 따를 만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a 표지 <17세기 조선 지식인 지도>

표지 <17세기 조선 지식인 지도> ⓒ 푸른역사

▲ 표지 <17세기 조선 지식인 지도> ⓒ 푸른역사

성리학적 질서 또한 심하게 흔들렸다. 존화의 대상으로 세상의 중심이라 여겼던 명이 한낱 오랑캐에 불과한 청에 속절없이 무너져버렸다. 성리학적 질서에 의존해서 세상을 바라보고 성리학적 질서만이 올곧은 가치라 믿고 살았던 양반들은 세상의 중심인 명의 몰락을 절박한 심정으로 바라보아야 했다.

 

전쟁이 끝난 뒤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해 공명첩, 납속책 등의 다양한 방법의 신분 상승 통로가 만들어졌다. 농업 기술의 향상 덕에 부를 축적한 일부 사람들이 양반으로 신분 상승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는 신분제를 바탕으로 하는 조선왕조의 질서를 뒤흔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시대 지식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무엇을 추구했을까.

 

북벌론, 북학론에 조선은 없었다

 

북벌론 - 병자호란 이후 오랑캐 청에 항복한 치욕을 씻기 위해 절치부심 힘을 길러 청을 공격하자는 주장.

북학론 - 비록 오랑캐지만 서양과의 접촉을 통해 선진 문물을 발달시켰기 때문에 청의 문물을 배우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

 

북벌론이 무력을 이용해 무너진 국가의 자존심을 되찾으려는 주장이고, 북학론은 상대에게 올바르게 대항하기 위해서라도 상대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으로 보면 둘 다 조선의 자존심과 국익을 높이려는 입장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과연 그럴까. 책 속에 나온 자료를 토대로 살펴보자.

 

북벌은 조선의 영토 확장이나 민족정신의 발로로 오해될 수 있다. 그러나 북벌 추진자들은 근대 민족주의에서 그리는 영도자가 아니라 유교적 세계관에 충실한 이들이었다. 일반적으로 당대인이 생각한 북벌은 복수설치, 즉 병자호란의 수치를 씻고, 대명의리를 드높이는 행위였다. 조선이 청을 쳐서 의기를 높인다면, 청의 지배에 놓인 명의 유민이나 호걸들이 호응할 것이라는 의미였고, 따라서 궁극적인 목표는 명의 영토 회복이었다.(북벌론 자료, 책 속에서)

 

옛날 영웅들은 복수하려는 뜻이 있다면 오랑캐 옷을 입는 일이라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는데 지금은 중국의 제도가 배울 만하다고 말하면 떼로 일어나 비웃는다. 필부도 그 원수를 갚고자 하면, 원수가 찬 날카로운 칼을 보고 그것을 빼앗을 궁리를 한다. … 대저 망해버린 명나라를 위해 복수설치하려면, 중국을 힘써 배운 지 20년 후에 의논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다.(박제가, 북학론 자료, 책 속에서)

 

북벌론도 북학론도 모두 명나라를 위한 복수설치라는 관점에서 출발하고 있다. 조선이 당한 치욕을 씻기 위해 청을 공격하고 청의 문물을 배우는 게 아니라 멸망한 명의 부활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북벌론과 북학론의 출발점은 같다. 중화인 명을 중심에 둔 성리학적 질서의 부활이란 관점이 그것이다. 그들의 출발점에 조선은 없었다. 무너진 성리학적 질서를 되세우는 것이 그들이 추구했던 중요한 목표였다. 그 길만이 곤두박질 친 양반 중심의 질서를 다시 세우는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실학자들이 생각했던 조선

 

중농파 실학자의 선구자로 알려진 유형원은 달밤에 거문고를 탈 때 중국말로 시경을 읊으며 고아한 흥취에 취했다고 전해진다. 실학자라면 성리학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조선을 자각했을 거란 생각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모습이다.

 

중상파 실학자였던 박제가는 청과 통상을 강화하는 것은 물론, 청나라 말을 공용어로 쓰자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영어 공용어론을 주장하는 요즘 사람들이 들으면 손뼉 치며 반색할 일이다. 영어 공용어론의 깊은 뜻도 이해하지 못하고 반대를 위한 반대만 일삼는 사람들에게 박제가의 일화를 들려주며 자신들을 정당화할 지도 모를 일이다.

 

실학자들의 삶이 자세하게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실학자들과 실학에 대한 정체성에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들은 대개 성리학적 질서를 보완하는 사회 개혁을 주장했다.

 

성리학적 질서를 크게 벗어난 개혁을 추구했던 실학자들의 경우에도 근대적 모습이 아닌 '원시 유학으로의 회귀'가 주안점이었다. 결국 실학자들도 조선보다는 성리학적 질서를 보완하는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참다운 실용과 민생을 추구했던 지식인들

 

17세기 지식인들 중에서 성리학적 질서를 넘어서려 했던 사람들은 극히 드물었다. 존화의 중심 명이 무너진 뒤에도 여전히 성리학적 질서를 지키고 강화하려 애썼다. "천하의 허다한 이치를 어찌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인가?"며 주자와 다른 해석을 시도했던 윤휴 조차도 본인 스스로는 주자를 반대할 생각이 없고, 주자의 정신을 따른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 지식인들에게서 민족적, 근대적 특징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지식인들의 삶에서 후손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일은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양반, 부호, 관료, 서리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대동법을 시행했던 김육, 호포제를 통해 특권층인 양반을 구조조정하려고 했던 윤휴, 토지에서 노비까지 <반계수록>을 통해 통 큰 개혁을 추구했던 유형원, 국방과 국경 전문가로 활동하면서 조선의 현행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안용복이 참수 당할 위험 속에서 그를 구한 남구만….

 

민생을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의 수단 정도로만 여기고 살았던 국왕과 공신과는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자신들에게 닥칠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활동했던 이들의 삶을 통해서 진정한 민생이 무언지, 진정한 실용이 무언지를 깨닫게 된다. 

덧붙이는 글 | 이경구/푸른나무/2009.1/16,000원

2009.08.19 22:00ⓒ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경구/푸른나무/2009.1/16,000원

17세기 조선 지식인 지도

이경구 지음,
푸른역사, 2009


#조선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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