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 6·15 만든 DJ, 죽어서도 남북대화 '다리'

북 "김기남 단장으로 고위급 조문단 파견"... 당국간 본격대화 계기될까

등록 2009.08.20 08:54수정 2009.08.2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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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 영정 ⓒ 오마이뉴스 그래픽


"'남북은 교류를 해야 합니다.' 대통령 후보로서 첫 공식기자회견을 하면서 그는 남북의 교류와 공존, 그리고 평화적인 통일정책을 제시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내용이었다. 반공이 만병통치약으로 통하던 시대에 북한과의 공존을 주장하는 것은 은밀한 사석에서조차 금지돼 있었다." (이희호 자서전 <동행> 103쪽)

1971년 대통령 선거를 1년 앞둔 1970년 9월 결선투표 끝에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선 후보로서 연 첫 기자회견에서 '남북교류'를 주장하고 나섰다. 이와 함께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국(미·일·중·소) 안전보장안을 내걸었다.

1959년 진보당의 조봉암 당수가 '평화통일'을 주장하다가 사형당한 지 12년 만이었다. 반공이 국시이던 시절에 북한과 공존을 내건 것이다.

1971년 대선 직전 "통일 논할 때 남쪽 대표하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

"71년 '4·27 대통령선거'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는 막바지 지방유세를 다니던 도중 자신의 승용차에서 내려 뒤따르던 기자단의 버스로 옮겨탔다. 그리고는 기자의 옆자리에 앉았다. 선거의 승리를 전망했던 기자는 김 후보에게 잘 싸웠다며 '이제 청와대에 들어가시면 국민이 실망하지 않을 훌륭한 대통령이 돼야 합니다'라고 주문했다. 그때 김 후보는 이런 대답을 했다. '나는 언젠가 통일을 논할 때 남쪽을 대표하는 지도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도 훌륭한 대통령이 돼야 합니다.' 상식적인 대답을 예상했던 기자에게는 뜻밖이었다." (2000년 6월 17일, <조선일보> 김대중 칼럼)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름은 같지만 생각은 매우 다른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이 전한 당시 모습이다. 김 고문은 몇 년 뒤 "그만큼 그는 스스로를 시공을 초월(?)한 '통일 대통령'으로 부각시키려 했고 그것이 그의 정치적 야망에서 집착으로 굳어져 버렸는지도 모른다"고 비판했지만, 김 전 대통령이 남북화해와 통일을 위한 '일생일대의 꿈'을 꾸고 있었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보수세력은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고 평생 괴롭혔지만, 그에게 남북화해는 정치활동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였고 그는 '통일을 논할 때 남쪽을 대표하는 지도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분단 이후 첫 남북정상회담의 결실인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은 그 결정판이었고, 북한은 '6·15시대'라는 말로 그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 남북화해 '진전'을 위해 노력하던 김 전 대통령은 이명박 정부 출범 뒤에는 다시 '투쟁'에 나섰다. 그는 "이명박 정부가 남북관계를 후퇴시키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에 대한 이행을 요구했다. 여러 번에 걸쳐 직접 방북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폐렴으로 입원한 뒤 37일간 병마와 싸우다 18일 눈을 감을 때까지도 그의 집념은 무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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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민족대축전 북측 당국대표단장인 김기남 노동당 비서가 임동옥 통일전선부장과 함께 2005년 8월 16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입원중인 신촌 세브란스병원을 찾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대리문병'을 했다. ⓒ 사진공동취재단


서거 전 투병 중에도 "클린턴 방북 기사 읽어달라"

그의 비서실장인 박지원 의원은 "병상에서도 남북관계의 진전을 간절히 바라셨고, 심지어 그 위독한 중에도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8월 4일) 소식을 듣고 '기사를 계속 읽어달라'고 할 정도로 의욕을 가지셨다"고 전했다. 죽음의 고비를 넘나드는 상황에서도 직접 '현안'을 챙긴 것이다.

북한은 김 전 대통령의 비중과 남북화해에서의 기여를 고려해, 서거 하루만인 19일 조전을 보낸 데 이어 20일에는 고위급 조문단을 파견하겠다고 밝혔다.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새벽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 조의를 표하기 위해 보내는 '특사조문단'이 "김기남 당 비서를 단장으로 21일부터 1박2일간 서울을 방문한다"고 보도했다. <통신>은 또 "국방위원회 위원장 김정일 동지의 위임에 따라" 김대중 전 대통령을 추모하기 위해 서울을 방문하게 된다고 밝혔다.

김 전 대통령 쪽의 박지원 의원은 전날인 19일, 북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위원장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겸임)가 김 전 대통령 쪽에 조선노동당 중앙위원, 부장, 비서 등 5명 정도의 '특사 조의방문단'을 파견하겠다며 적정한 시점을 알려달라는 통지문을 보내왔다고 밝힌 바 있다. 박 의원은 정부에 이에 대해 통보했고, 김 전 대통령쪽의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과 현 정부의 현인택 통일부 장관이 창구가 돼 이에 대해 논의를 하고 있는 상태다.

북 "특사조문단, 김기남 비서 단장으로 2일간 방남"

정부는 이미 "북한의 조문단 파견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이동관 청와대 대변인)는 방침을 밝혔기 때문에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북한의 조문이 성사될 것으로 보인다.

조문단장인 김기남 비서는 김정일 위원장의 현지지도에 대부분 동행하는 측근으로 선전선동과 역사문제를 담당하고 있다. 지난 2005년 8·15 민족대축전때 북측 대표단을 이끌고 방문해 국립현충원을 참배해 '금기'를 깨기도 했으며, 당시 폐렴으로 입원해있던 김 전 대통령을 병문안했었다.

통신은 5명 정도로 예상되는 조문단 전체 명단을 밝히지는 않았으나, 북한이 김 전 대통령쪽에 당 중앙위 부장도 포함될 것이라고 밝혔다는 점에서 북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장이자 통일전선부장으로 대남정책 책임자인 김양건 부장이 포함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고 있다.

김양건 부장은 2007년 2차 남북정상회담의 주역으로, 이번 클린턴 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면담에 배석한 북측의 핵심인사다.

일각에서는 김정일 위원장의 매제인 장성택 국방위원회 위원이 조문단에 포함될 수도 있다는 '기대' 섞인 예상을 내놓기도 한다. 그는 2002년 10월에 경제시찰단으로 남쪽을 방문하기도 했다.

MB 상황변화 이뤄낼 수 있을까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뒤 남북 당국 사이의 대화는 사실상 비공식 라인까지 끊어진 상태다. 개성공단 운영문제에 국한해 당국자 간에 세 차례 실무접촉이 있었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보내올 '특사 조의방문단'은 본격적인 남북 당국간 고위접촉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조문단이 당일방문이 아니라 1박2일간 체류하겠다는 계획이라는 점에서, 방문 기간 중에 남측고위 당국자들과의 접촉이 이뤄질 가능성도 있다.

지난 16일 김정일 위원장과 금강산 관광재개와 이산가족 상봉 등의 5개항 합의를 이뤄냈고, 북측이 한·미 합동 '을지프리덤가디언' 훈련에 개의치 않고 조문단을 파견하기로 했다는 점에서 일단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

평생을 분단체제에 도전한 김대중 전 대통령, 이제는 그의 죽음이 남북한의 갈등을 푸는 계기가 되고 있다. 이 기회를 살려낼 책임은 남은 자들에게 있고 그중 많은 부분이 이명박 대통령의 어깨 위에 놓여 있다.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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