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8개 구단 중 유일하게 홈페이지에서 김대중 대통령 서거를 애도한 기아 타이거즈(8월 22일)
기아 타이거즈 홈페이지 캡쳐.
해태의 연고지도 광주전남전북, 호남이었다. 1990년부터 쌍방울 레이더스가 전북을 연고로 하였지만 2000년 SK 창단 이후 무연고로 있다가 2003년 다시 기아로 넘어왔다. 타향살이 하는 호남사람들은 서울에서 해태 경기가 있을 때면 잠실야구장을 가득 메우고 목이 터져라 응원했다.
1982년에 출범한 프로야구는 국민의 민주화와 정치적 관심을 뺏고자 군사정부가 스포츠, 영화, 성을 이용했던 이른바 3S정책이었다. 군부독재는 지역주의로 호남을 정치사회적으로 고립시키고, 스포츠로 정치무관심을 의도했다. 그러나 역으로 야구는 호남연고라는 동질성을 찾게 해 주었다. 지역주의의 정치사회적 작동으로 차별과 소외를 당한 호남사람들은 자신들을 대변하는 해태와 김대중을 만나 열광했던 것이다.
고난 속에서 피어난 꽃흔히 김대중 대통령을 고난 속에서 피어난 인동초에 비유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군사독재에 의해 납치와 고문, 살해위기 등 죽음의 문턱을 몇 차례 넘어야 했다. 특히 5.18 내란음모의 수괴로 지목되어 사형선고까지 받았고, 망명과 가택연금도 겪었다. 그리고 4번째 도전 끝에 대통령에 당선하였다. 김대중의 인생은 독재의 탄압과 투쟁 속에 만들어진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였다.
해태타이거즈 역시 고난 속에서 출발했다. 고작 선수 14명으로 창단식을 가졌고, 내로라하는 유명 선수도 없었다. 단 6명의 투수는 선발과 중간계투, 마무리 할 것 없이 투입되어 80경기를 소화했다. 아이스크림 팔아서 선수연봉을 준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가난한 팀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당시 투수로 10승을 올린 김성한 선수가 타자로 나서 타점왕을 차지하고, 경기 중간에 1루수에서 투수로 마운드에 오르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해태는 프로야구 2년째인 83년 전기리그 우승에 이어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하였다. 고난 속 첫 우승 후 V9까지 해태의 기록은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였다. 특히 군사독재의 탄압과 시민 항쟁이 극에 달했던 1986년부터 1989년까지 한국시리즈 4연패를 이루기도 했다.
80~90년대는 군부독재에 대항하여 목숨을 내놓고 싸워온 고통의 시간이었다. 그 기나긴 고통의 터널을 지나는 동안 야구경기장에 모인 광주시민들의 뜨거운 승부욕은 김대중에 대한 정치적 탄압에 억눌려 있던 민주화 열망과 결합되었다.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김대중과 호남은 하나가 되었다. 해태와 무등경기장이 그 가운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