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로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으니 가을이지요. 만곡이 익어간다는 백로, 더위가 물러간다는 백로, 가을이 입도했다는 절기가 바로 백로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즘 조석으로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네요. 가을바람은 피부에 닿으면 기분 들뜨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지요.
한라산의 가을은 어디만큼 왔을까요. 9월의 첫 번째 휴일 아침, 가을을 만나러 한라산 영실로 떠나보았습니다. 행여 추울까봐 여벌의 옷을 준비했지요. 그러나 지금 한라산 영실은 인간이 살아가기 최적의 기온이었습니다.
아침 7시, 한라산 1300고지는 인간이 가장 좋아하는 최적의 기온이라 할까요? 이런 맑은 공기를 마셔 본적이 언제였나 싶었습니다. 정말이지 발걸음이 가볍다는 말이 실감나더군요. 졸-졸-졸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가 가슴까지 적셔 왔습니다.
드디어 병풍바위 앞, 병풍바위 앞은 한라산 영실코스의 가장 힘든 등반로이지요. 하지만 이곳에서 뒤를 돌아다보니 파란 하늘에 흘러가는 흰 구름이 한편의 또 하나의 세상을 만들더군요. 어디 그것뿐이던가요. 멀리 산방산과 송악산 마라도까지 보이는 가을날의 풍경은 기가 막혔습니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제주오름은 한라산 영실 1600고지에서 볼 수 있는 가을날의 진수였습니다.
아뿔싸! 병풍바위 앞에서 가을을 붙잡았습니다. 이제 막 피어오르는 억새꽃을 보니 뭔가 대박을 터트린 기분이더군요. 가을이 이렇게 사람 마음을 사로잡다니요. 제주 들녘에 피고 지는 하고 많은 것이 억새꽃인데 말입니다. 병풍바위 앞에 펼쳐진 오백장군도 묵묵히 억새꽃을 호위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병풍바위 앞에 펼쳐진 또 하나의 가을손님은 바로 보랏빛 엉컹퀴입니다. 엉컹퀴 또한 들녘에 피고 지는 꽃이지요. 하지만 한라산 영실의 등산로를 수놓은 보랏빛 향연은 등산객들의 마음을 유혹합니다. 새벽에 서둘러 산행한 프리미엄이었을까요. 바로 백만장자의 정원을 가진 것 같은 착각. 참으로 귀중한 선물을 받은 것 같더군요.
가을 하면 열매의 계절이기도 하지요. 등반로 사이에 익어가는 빨간 열매가 계절을 재촉합니다. 길고 길었던 짜증났던 지난여름을 쉬이 잊을 수 있음도 이렇게 아름다운 한라산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한라산 1600고지에서 보는 하늘은 더욱 파랗습니다. 그 파란 하늘을 수놓는 주목, 그 가지 끝을 올려다보는 순간은 오랜만에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이었지요. 나무가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는 듯 나도 오랜만에 기지개를 켜 보았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인 것 같습니다.
무엇이 그리도 내 마음을 각박하게 만들었는지요. 무엇이 그리도 내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는지요. 앞만 보고 달리느라 하늘 한번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 가난뱅이에게 주목나무는 아주 넓은 파란 하늘을 선물하더군요.
드디어 한라산의 가을을 병풍바위 앞에서 붙잡았습니다.
2009.09.06 15:43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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