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것 같던 삶, 포도 향기로 환생

충북 음성에서 진한 포도향을 퍼뜨리는 여인을 만나다

등록 2009.09.07 09:43수정 2009.09.10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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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이복수 대표가 충북 음성군 용산리에 터를 잡고 3년간 포도를 길러 올해 첫 수확의 기쁨을 맛봤다. 자신이 일군 포도농원에서 싱싱한 포도를 들어 보이고 있다.

이복수 대표가 충북 음성군 용산리에 터를 잡고 3년간 포도를 길러 올해 첫 수확의 기쁨을 맛봤다. 자신이 일군 포도농원에서 싱싱한 포도를 들어 보이고 있다. ⓒ 이화영


좁다란 시골길을 오르고 올라 산모퉁이에 자리 잡은 포도 과수원에서 그를 만났다.


짧은 헤어스타일에 선한 얼굴과 곱상한 눈매, 자그마한 키에 좁다란 어깨를 가진 50대 중년 여성, 어찌 이 넓은 과수원을 일굴까 싶을 정도의 외모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 입가에 물기 시작한 웃음을 4시간 가까이 이어진 인터뷰 시간동안 내려놓지 않았다. 얼마나 웃음이 많은 사람인지 다른 곳에선 찾아보기 힘든 주름이 눈가와 콧등에 촘촘히 새겨있다.

대화시간동안 계속해서 주문전화에 맥이 끊겨 "어디까지 말했죠"라고 확인하면서 대화를 이어가야 했다. 그가 받는 전화는 여느 통화와 확연한 차이가 있다. 오랜 지인과의 대화를 하는 듯 안부를 묻는가하면 보낸 포도의 맛과 가치를 확인하곤 했다.

문학이 이어준 음성과의 인연

a  '정신적 엄마'라고 부르는 반숙자(사진 왼쪽) 수필가와 이복수 대표

'정신적 엄마'라고 부르는 반숙자(사진 왼쪽) 수필가와 이복수 대표 ⓒ 이화영


주인공은 충북 음성군 음성읍 용산리에서 '향기로운 포도원'을 운영하고 있는 이복수(52) 대표다. 그는 '이수안'이란 또 다른 이름을 가졌다. 이 이름은 '몸으로 우는 사과나무', '그대 피어나라 하시기에' 등의 수필집을 낸 반숙자(76) 수필가가 지어줬다.


이 이름을 가지게 된 동기는 9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글쓰기를 좋아하던 그녀는 평소 존경하던 반 선생이 창작교실을 연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평택에서 난생처음 물어물어 음성을 찾았다.

a  수필가 반숙자 선생이 제자인 이복수 대표에게 새로 쓴 책을 선물하기 위해 서명하고 있다.

수필가 반숙자 선생이 제자인 이복수 대표에게 새로 쓴 책을 선물하기 위해 서명하고 있다. ⓒ 이화영

이 대표가 문학의 깊이를 더듬어 갈 때 쯤 반 선생으로부터 "같은 이름으로 문학계에서 활동하는 선배가 있으니 후배가 이름을 바꾸는 것이 예의"라는 말을 듣고 개명을 감행했다. 이때 이름을 지어준 이가 반 선생이다.


그렇게 음성과 정을 쌓아가며 오가길 6년. 가정에 문제가 있어 죽을 것 같았던 지난 2006년 6월 25년간의 결혼 생활을 정리하고 아무런 연고도 핏줄도 없고 오직 문학으로 인연을 맺은 음성행을 결심한다.

이 대표는 23년간 포도를 재배한 기술력을 밑천으로 과수원을 운영하기 위해 2000㎡ 규모의 과수원을 구입해 사과나무를 모두 캐내고 바닥을 골랐다. 하지만 비가림 시설비 1억5천만원을 구하지 못해 사업을 포기해야하는 위기를 맞는다.

이때 평택에서 알고 지내던 지인이 선뜻 외상으로 시설을 해줬다. 이 대표는 "그분이 내가 성공해야 자기도 기쁠 것 같아 시설을 해주는 것 이라고 했다"며 "시설을 하지 않으면 나무를 키우기 어렵다는 걸 아는 지인이 오히려 부담스러워하는 나를 설득해 시설을 한 특이한 경우"라며 웃어 보였다.

이 대표가 음성에서 뿌리를 내리고 농사를 지은 지난 3년 동안 팔이 부러지고 농기계 조작이 서툴러 어려움을 겪는 등 고통이 많았다. 이때마다 지역의 문인들과 반 선생은 든든한 버팀목이 돼 줬다. 그녀는 반 선생을 '정신적 엄마'라고 부른다.

주변 사람의 많은 도움과 이 대표의 노력으로 올해 8월 음성에서 첫 수확의 기쁨을 맛보게 됐다.

글쓰길 좋아하는 시골아낙에서 어엿한 문학회 회장님으로

a  포도 과수원으로 취재를 나온 한 방송사 제작팀과 인터뷰를 하고 있는 이복수 대표

포도 과수원으로 취재를 나온 한 방송사 제작팀과 인터뷰를 하고 있는 이복수 대표 ⓒ 이화영


이 대표는 인터뷰를 하는 중간 중간 문학적 표현으로 대화의 맛을 살렸다. 그녀는 몸 안에서 꿈틀대는 감성에 포도 향을 담아 언어로 녹여냈다.

a  이복수 대표가 주문된 포도를 정성스럽게 포장하고 있다.

이복수 대표가 주문된 포도를 정성스럽게 포장하고 있다. ⓒ 이화영

"포도농사는 틈직한 큰형님이나 맏아들 같지 않고 사춘기 딸을 기르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어려워요. 조금만 관심을 갖지 않아도 줄기를 다른 곳으로 뻗잖아요. '제발 저 좀 봐 주세요'라고 외치는 것 같아요"

이 대표는 2004년 문예지 '문예운동'으로 등단해 문단에 나왔으며, 현재 충북문인협회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2005년 농협중앙회가 주최한 2회 농촌사랑 주부 글 잔치에서 최우수상을 받는 등 탄탄한 실력을 인정받았다. '세계 식품과 농업'이란 잡지에 1년간 글을 싣기도 했다.

이 대표는 지난 3월 전국에서 170여명의 회원이 활동하는 농어촌여성문학회장에 뽑혔다. 이 단체는 19년의 세월을 이어온 연륜 있는 단체로 문학 활동을 통해 사라져 가는 농어촌 문화를 되살리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정기적으로 문집을 내고 있다.

그녀는 "농촌이 어려워지면서 인구가 줄어들고 이에 따라 신입회원 확보가 어렵다"며 "흙을 사랑하고 문학에 애정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다"고 농촌여성들의 관심을 호소했다.

"포도는 나의 인생이면서 희망이고 꿈"

a  '향기로운 포도원'에서 수확된 포도. 데라웨어, 힘로드씨드리스, 자옥, 홍서보(사진 우측부터)

'향기로운 포도원'에서 수확된 포도. 데라웨어, 힘로드씨드리스, 자옥, 홍서보(사진 우측부터) ⓒ 이화영


이곳에서 재배되고 있는 포도는 데라웨어, 힘로드시드리스, 경조정, 블랙올림피아, 홍서보, 자옥 등 모두 6종류다. 이중 데라웨어가 이 과수원 면적의 1/3을 차지한다. 이 품종은 당도가 높고 신맛이 적어 모든 층에서 좋아하고 특히 씨가 없어 유아들이 먹기에 무리가 없다.

과수원의 포도 가격대는 4kg들이 한 상자에 3만원에서 3만5000원 정도다. 다른 포도에 비해 고가라고 하자 이 대표는 "정직하게 농사짓고 정성을 쏟은 만큼,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책정한 가격"이라며 "농사는 귀한 일이고 전문가로써 받는 노력의 대가"라고 밝혔다. 올해 첫 수확으로 7000만원의 매출을 예상했다.

수입 농산물과 경쟁력에 대해 이 대표는 "맛, 신선도, 안전성 등에서 우리는 월등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며 "우리 소비자들은 현명하기 때문에 농민들이 믿을 수 있는 질 좋은 농산물을 생산하면 경쟁에서 반드시 이길 수 있다"고 단언했다

그는 "외국산이 국내에 오기까지 어떤 약품처리를 하고 오는지 알아야 한다"며 "보기에는 깨끗하고 좋아 보이지만 우리 것처럼 짓무르지도 않고 초파리도 안 생긴다"고 꼬집었다. 이어 "곤충조차 거들 떠 보지도 않는 걸 사람이 먹으면 되겠나?"고 반문했다.

대화를 지켜보던 한방문객은 "여기 포도 먹어본 사람은 다른데 포도 못 먹는다"며 "맛보고 감동해서 넘어져도 다치기 않도록 스펀지를 깔아놔야 한다"고 농을 쳤다.

a  이복수 대표가 회장으로 있는 농어촌주부문학회 회원들이 포도를 먹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이복수 대표가 회장으로 있는 농어촌주부문학회 회원들이 포도를 먹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 이화영


여러 종류의 포도 재배에 대해 이 대표는 "포도는 입뿐만 아니라 눈과, 코, 마음으로 먹는 과일"이라며 "포도를 포장해 보낼 때 색깔과 크기, 맛을 고려해 종합선물세트처럼 포장해 보내 주고 있다"고 밝혔다.

이 농원에 들어서면 좌측으로 원두막 3동이 자리 잡고 있다. 어린이들이 자연체험 학습을 위해 올 경우 쉴 곳을 제공하고자 지인의 도움을 받아 손수 만들었다. 그녀의 섬세함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요즘 그녀에게 든든한 동지가 생겼다. 언니와 단둘이 짓던 농사에 둘째딸 유수경(26) 씨가 합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유 씨는 인터넷 포털사이트 블로그를 통해 베란다용 포도 화분을 분양하는 등 벌써 농사에 참여하고 있다.

a  그녀의 얼굴에선 늘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지인들은 "그를 보고 있으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고 말한다.

그녀의 얼굴에선 늘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지인들은 "그를 보고 있으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고 말한다. ⓒ 이화영

딸의 합류를 처음에는 많이 말렸다. 이 대표는 "서울에서 좋은 대학 장학생이였고, 졸업해서 훌륭한 직장에서 인정받으며 생활하던 딸이 포도농사 짓겠다는데 어느 부모가 반기겠냐"며 "하지만 정직한 땅에 정성을 다하면 이곳만큼 기쁨을 주는 곳이 없는 걸 알기에 받아들였다"고 전했다.

그녀는 이곳을 지친사람들의 쉼터로 사람냄새가 물씬 풍기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꿈이다. 따뜻하고 정이 넘치는 곳, 행복바이러스가 샘솟는 '향기로운 포도원'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추억되길 바란다.

"저는 복숭아도 좋아하지만 포도 농사를 짓다보니 포도가 정말 좋아 졌어요. 포도는 넝쿨이 예쁘지만 포도 순이 자랄 때는 행복하기까지 해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나와 보고 밖에 일이 있어 나갔다가도 과수원을 제일 먼저 들러요. 자식을 키우는 마음이에요. 하하하"

그녀의 환한 표정만큼이나 생명산업인 우리 농업이 함박웃음을 머금길 기대한다.

a  포도를 사기 위해 과수원을 찾은 지인 이명용(78) 옹이 원두막을 손봐주고 있다.

포도를 사기 위해 과수원을 찾은 지인 이명용(78) 옹이 원두막을 손봐주고 있다. ⓒ 이화영


a  주문전화를 꼼꼼히 기록하고 있는 이복수 대표

주문전화를 꼼꼼히 기록하고 있는 이복수 대표 ⓒ 이화영



 "형부가 언니 보고 싶다고 보내 달라는데 내가 못가게 해요", "동생아! 그러니까 월급 많이 줘야도 돼", "...", "ㅠ.ㅠ" 때론 친구같고 때론 모녀같은 이남수, 이복수 자매의 대화다. 남매의 진한 사랑이 있어 이곳의 포도향이 더욱 그윽했던 걸까?

"형부가 언니 보고 싶다고 보내 달라는데 내가 못가게 해요", "동생아! 그러니까 월급 많이 줘야도 돼", "...", "ㅠ.ㅠ" 때론 친구같고 때론 모녀같은 이남수, 이복수 자매의 대화다. 남매의 진한 사랑이 있어 이곳의 포도향이 더욱 그윽했던 걸까? ⓒ 이화영

덧붙이는 글 | 향기로운 포도원에는 지난주에 다녀왔습니다.


덧붙이는 글 향기로운 포도원에는 지난주에 다녀왔습니다.
#이복수 #향기로운 포도원 #음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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