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에이, 씨"라고 말했다면?

[웬수 같은 자식, 마녀 같은 엄마 ④]

등록 2009.09.15 13:30수정 2009.09.15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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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안 통해. 짜증나 죽겠어."

부모와의 대화에 대한 아이의 소견이다. 부모와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아이의 확신 앞에서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저게 내 자식 맞나 싶은 절망감에 속만 바짝 타들어갈 것이다. 도대체 왜 말이 안 통하는 걸까. 말이 안 통하기는 부모도 마찬가지다. 어찌 말하고 행동하는 게 저리 철딱서니가 없을까 하는 갑갑함을 부모 역시 느끼고 있다.

인간의 의사 소통은 본질적으로 지성보다는 감성에 더 의존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정서적 상태가 상대방에 의해 이해(공감)되어질 때, 비로소 소외감(무시당한다는 느낌)으로부터 오는 절망과 반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벽은 지적인 차이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 일치감의 결여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따라서 부모와 자녀 사이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자녀의 말과 행동에 대한 간섭에 앞서, 부모가 자녀가 처한 감정적 상황에 우선적으로 동조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디서 그 따위 말버릇이야?"라고 호통 치기 전에...

엄마가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아이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그러자 아이가 대번 "에이, 씨." 하고 혼자말로 반응을 보였다. 이 상황에서 엄마는 화가 날 수밖에 없다. 아니 어디다 대고 저런 막말을 막 해댈 수 있는가. 저게 제 정신이 아닌가봐.

부모로서의 권위를 묵살당한 데서 오는 화도 화지만, 아이의 버르장머리없는 태도를 고쳐야 한다는 부모로서의 사명도 만만치 않다. 저런 아이의 태도를 그냥 보아 넘긴다면, 부모로서 적절한 의무와 사명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 최소한 부모로서의 역할을 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이 마음 한 편에서  아우성을 친다.


여기서 엄마는 과연 어떤 방식으로 대응해야 할까.

엄마 갑 : 어디서 그 따위 말버릇이야. 엄마가 네 친구냐?
엄마 을 : 심부름 시킨 게 불만스러운가 보구나. 물론 즐거운 일은 아니지. 그렇다고 그런 식으로 말하면 되겠냐?


엄마 갑의 경우는 아이의 감정 상태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말함으로써 아이와의 단절을 심화시키고 있다. 엄마로서는 감정적인 울분을 해소하는 시원함(?)을 맛볼 수 있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과연 엄마의 분노에 찬 질책이 아이에게 어떤 교육 효과를 가져 올 수 있을는지는 의문이다.

아마도 아이는 엄마의 분노에 찬 질책을 겉으로는 수용하는 척 할지도 모른다. 안 그랬다가는 어떤 후폭풍을 맞을지 몰라서, 아니면 말대꾸하고 싸우기 싫어서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엄마의 지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자신의 잘못된 태도에 대한 판단보다는 엄마가 보여주는 공격성에 대한 방어에 더 관심이 쏠려, 어떤 이유로든 자신을 합리화하려는 무의식적인 시도가 우선적으로 앞설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대응은 아이들에게 엄마는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감정적 확신을 키워줄 소지가 많다. 그 결과는 '엄마와는 말이 안 통해' 라는 확신으로 각인된다.

그렇다면 아이의 돼먹지 못한 태도를 보고도 할 말도 못하고 가만히 참고 있어야만 한다는 말인가. 결단코 그렇지는 않다. 부모가 자녀의 모든 요구를 다 들어주려고 하거나, 자녀의 감정(혹은 비위)을 맞추느라 전전긍긍해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요구를 들어 줄 것이냐 말 것이냐의 최종적 선택 여부를 떠나서, 우선적으로 최소한 자녀의 현 감정 상태를 공감해 줄 필요는 있다는 말이다. 즉, 다시 말해서 자녀의 요구를 들어주지는 못하더라도 그 아이의 감정에 대해서는 인정해(알아)주는 면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단 감정에 공감하라, 그리고 할 말을 하라

상대의 감정에 대해 공감한다고 해서 꼭 모든 요구를 다 들어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가 울며불며 통곡하고 있을 때, 그 아이의 슬픔을 공감해준다는 명분 아래 아이의 요구를 다 들어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감정 상태에 공감하는 것과 요구를 들어주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우리 아이들의 그 어떤 친구도 우리 아이의 모든 요구를 다 들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자기 친구에게는 자기 속을 털어놓게 되는 진짜 이유는, 전후 상황이 어찌되었든지 간에 자기의 정서적 상태에 대한 공감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따라서 자녀의 심적 상태에 공감조차도 하지 않는 부모의 태도는, 자녀가 '더 이상 대화 불능'이라는 딱지를 붙이기에 딱 좋은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전문적인 상담을 하기 위해 상담자를 찾아오는 사람도, 사실은 상담을 통해 반드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공감(들어줌)해 줄 수 있는 상대를 찾기 위해서 오는 것이다. 비록 해결은 못해 주더라도 같이 울어 주고 걱정해줄 수 있다면, 충분히 의사소통이 되었다고 믿는 게 사람이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논리적 설명보다는 감정적 공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러므로 자녀와의 진정한 의사소통을 원한다면, 부모는 우선적으로 자녀의 감정 상태를 공감해 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아이가 어떤 감정 상태에서 저런 식의 반응을 보인 것인지를 먼저 헤아려 보는 것이 우선이다. 아이의 어떤 욕구가 좌절되어서 그렇다면, 욕구의 좌절이 가져다 준 심리적 상처를 우선 공감해 줄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 비로소 어떤 타당한 이유를 들어가면서 아이의 요구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자녀와의 대화 가능성을 손상시키지 않는 지혜로운 대응방식이라 할 수 있겠다. 아이가 그렇게 감정적으로 공감을 받고 난 다음에는, 훨씬 더 부모의 의견 제시에 잘 따를 확률도 높아지게 마련이다.

아이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는 없으며, 제멋대로 감정에 휘둘려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친구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그랬다가는 '왕따'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애나 어른이나 자신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 줄 친구를 잃고 싶지는 않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아이의 잘잘못을 판단하고 정죄하기에 앞서서, 아이의 심적 상태에 누구보다도 잘 공감해 주는 대상이 바로 부모라면, 아이인들 그런 부모를 잃고 싶겠는가.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뉴스앤조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뉴스앤조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자녀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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