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주는 참 사악한 사람이죠"

[정연주의 증언 3] 나를 증오했던 사람들과 조중동의 공격

등록 2009.09.21 14:50수정 2009.10.01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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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11일, 대통령 선거를 엿새 앞두고 열린 확대간부회의에서 "바위처럼 자리를 지키겠다"고 말한 뒤 회의장을 둘러보았다. 긴장감이 팽팽했다. 공개석상에서 한 이런 발언은 나 자신에 대한 다짐이었을 뿐 아니라 간부들에게도 세상 바뀌어 간다고 이리저리 흔들리지 말고, 중심을 지켜달라는 당부의 뜻도 담겨 있었다. 간부들 중에는 나의 말이 힘이 됨직한 이들도 있었을 것이고, 세상이 바뀌려 하는데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두고 난처한 처지에서 고민한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 중 일부는 이른바 '친정연주 세력'이라 하여 잔인할 정도의 보복인사를 당했고, 또 일부는 KBS의 새로운 권력에 편승하여 세월이 바뀌어도 '자리'를 놓치지 않는 처신의 달인 경지를 보이기도 했다.

'반 정연주' 인사들의 행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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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주 전 KBS 사장 KBS 사장 재임시절 회사에 1,892억원의 손해를 끼친 혐의(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의 배임)로 불구속 기소된 정연주 전 KBS 사장이 18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 유성호 기자


앞자리에 앉아 있는 차00 센터장의 표정은, 내가 그리 생각해서 그랬을까, 화가 난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강00 전 KBS 감사(방송위원회 상임위원), 윤00 KBS 심의위원(후에 1직급인 고위직급 직원을 모아  KBS '공정방송노동조합'(공방노)을 만들어 대표가 된 인물, 언론에서는 '간부노조'라고 지칭) 등과 함께 'KBS 사장 정연주'를 인정하지 않았던 대표적인 '반정연주'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사내 게시판의 글을 통해, 성명서를 통해, 또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끈질기게도 나를 비방했던 인물이었다. 나는 그를 2006년 12월, 사장 연임 뒤 첫 인사에서 임원급인 시청자 센터장으로 발탁했다. 이른바 탕평 인사였다. 임원들은 대체로 찬성했는데, KBS 개혁파들은 "세상에 이런 망발 인사가 어디에 있느냐"며 노골적인 불만을 터트렸다.

화가 난 듯 보였던 차00 센터장은 내가 "바위처럼..."을 공개 석상에 밝힌 바로 다음 날, 센터장 보직 사퇴를 선언하는 기자 회견을 열고 나에 대한 험담을 다시 쏟아내었다. 한 가지 코미디 같은 사실은 KBS 사규에 의하면 정년퇴직 6개월 전에는 보직을 사임하게 되어 있는데, 그의 정년은 이듬해 6월이어서 기자회견을 한 날로부터 18일 뒤인 12월 말에는 자동적으로 시청자센터장 자리를 떠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마치 엄청난 자리를 포기하는 대결단을 내리는 것처럼 기자회견을 여는 등 야단법석을 떠는 것을 보고 인간적 비애를 느꼈다. 최소한 인간적인 진실성은 있어야 되는데 왜 저럴까 싶어 안쓰러웠다. <동아일보> 등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서특필했다. 그가 기자회견을 하는 자리에 윤00 공방노 대표도 자리를 함께하면서 동지적 유대를 보여주었다.

차00 센터장은 이보다 앞서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후보가 후보 토론 등 방송출연을 위해 KBS를 방문했을 때 가까이 가서 이런저런 '조언'을 하는가 하면, 이듬해 봄 고향인 경북에서 한나라당 공천으로 출마하려고 예비후보로 나섰으나, 후보가 되지는 못했다. 최근에는 금전이 오간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가 되어 불구속 기소되었다는 기사가 나기도 했다. 

정연주를 증오했던 사람들


어쨌든 차00 센터장이나 강 00 전 감사나 윤00 심의위원 등은 나를 정말 싫어했던 것 같다. 싫어했다는 표현보다는 '증오했다'는 편이 더 나을지 모르겠다. 이른바 '녹취록 사건'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윤00 KBS 심의위원은 문제의 녹취사건 때 "정연주라는 사람은 참 사악한 사람이거든요"라고 말했고, 강00 전 감사는 이를 받아 "사악한 놈이죠"라고 답했다.

'녹취록 사건'은 2006년 11월 9일 여의도의 한 음식점에서 강00 당시 방송위 위원, 윤00 KBS 심의위원, 유승민 한나라당 의원, 한 지역 방송사 사장, 제작사 대표 등 5인이 모여 '한나라당적 동지애'를 과시하면서 온갖 얘기를 나눈 자리의 대화록이 그대로 녹취가 되어 이듬해 공개된 사건이다. 이 자리에서 한 참석자가 "우리는 한 배"라고 하자 강00 전 감사는 "한 배가 아니라 우리 일이다"라고 답했다. 윤00 심의위원은 유승민 의원에게 "오늘 저 영광입니다. 근데 의원님 한 배입니다. 좌초되면 저희는 죽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내가 KBS를 떠난 뒤 편성본부 외주제작국장이라는 중요한 자리를 맡아 왔다.


나를 그토록 싫어했던 그들의 눈에, 나는 기껏 '조그만 좌파신문'인 <한겨레> 논설주간 출신의, 방송이라고는 쥐뿔도 모르고, 조직 관리 경험이라고는 <한겨레> 논설위원실 정도밖에 없는 '무능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형편없는 비주류' 출신이 주류 언론의 본산이랄 수 있는 KBS의 사장으로 온 것 자체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수도 있다. 이런 종류의 주장을 회사 안팎에서 참 많이 들었다.

물론 한나라당과 조중동에서도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다. 나는 사실, 한나라당이나 조중동에서 가하는 공격이나 비판은 그리 아프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중동의 기사, 칼럼, 사설에서 가장 격렬한 비판을 한 인물 1위가 노무현 대통령이고 그 다음이 정연주 사장이라고 했을 때, 나는 그것을 영광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내가 하는 일, 가고자 하는 방향이 옳은 것이구나를 재확인해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세상을 보는 눈, 역사를 보는 눈,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가치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느껴온 터여서, 그런 쪽에서 비판을 하고 공격을 한다는 것은 뒤집어 보면, 내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을 확인해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조중동 공격이 아프지 않은 이유

나더러 "맷집이 아주 좋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더러 했는데, 그건 내가 맷집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조중동의 공격은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비판이라기보다 비방과 인신공격에 가까웠고, 때로는 언론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인 사실보도조차 왜곡하는 터여서, 그들의 공격이 아프지가 않았던 것 뿐이었다. 합리와 상식을 벗어난 욕설과 비방과 인신공격은 그다지 아프지 않은 법이다. 진실이 아니므로.

내 자신과 내가 믿는 신 앞에서 떳떳하다면, 진실은 언젠가 밝혀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리고 기자는 기사로 말을 하고, 판사는 판결문으로 말을 하듯, 방송사 사장으로서는 결과물인 방송 프로그램과 보도를 통해 말을 하면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조중동은 도무지 일관성이 없다. 한번 생각해 보시라.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시절, 위장전입, 탈세 등 고위공직자를 그토록 집요하게 파헤치던 조중동이 요즘 어떻게 바뀌었는지. 필요에 따라,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논조와 주장이 정반대로 뒤집히는 그런 언론이 과연 언론일 수 있을까.

'위장전입 소동' 언제까지 거듭할 건가 <동아일보>9월 16일자 사설 ⓒ 동아일보PDF


위장전입의 경우를 한번 보자. 2005년 국가인권위원장 내정인 부인의 위장전입 의혹이 불거지자, <동아일보>는 '약간의 흠도 최 위원장에겐 무겁다'는 사설(3월 19일)에서 "정부로부터 위원장 제안이 왔을 때 당연히 거부하는 게 최씨의 바른 처신이었다"며 강하게 압박했다. 그랬던 <동아일보>가 이번 고위공직자들의 위장전입 의혹에 대해 '위장전입 소동 언제까지 거듭할 건가'는 사설(9월 16일)에서 "공직 후보자가 유능한 사람이라면 위장전입 하나 때문에 일할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것이 국가적으로 득이 된다고 볼 수 없다"고 돌아섰다.

2006년 초, <조선일보>는 '대통령은 또 인사청문회 결과를 무시할 것인가'라는 사설(2월 9일)에서 "미국에선 내정자들이 사소한 불법이나 도덕성에 상처받는 사안이 불거지면 자진해서 사퇴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며 압박을 가했다. 그랬던 <조선일보>가 이번에는 '후보자 검증, 과거 자리서 무엇을 어떻게 했나 따져 보라'는 사설(9월 15일)에서 "공직 후보자 검증에서 도덕성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후보자의 업무 능력과 각종 현안에 대한 견해"라며 한결 관대해졌다.

<중앙일보> 역시 다르지 않다. 2005년 이헌재 당시 부총리의 위장전입 의혹에 대해 '위장전입, 이헌재 부총리가 직접 밝혀라'는 사설(3월 1일)에서 "어물쩍 넘어가기에는 일반 국민이 느끼는 좌절감과 열패감이 너무 크다"고 했다. 그런던 <중앙일보>가 이번에는 '한국사회의 부끄러운 자화상 위장전입'이라는 사설(9월 15일)에서 "흠집 없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점 또한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참으로 너그러운 현실론을 폈다(이상의 사례는 <한겨레신문> 9월 19일자 이문영 기자의 기사를 참조했음).

이렇듯 이중적이고 서로 모순되는 주장을 하는 신문들의 인신공격과 비방이 뭣이 그리 아팠겠는가.

물론 조중동이 심어놓은 '정연주 KBS 사장'에 대한 인식이 우리 사회 일부, 특히 조중동 독자들과, 그들과 비슷한 가치와 역사관을 가진 이들에게 무지막지한 힘을 발휘한다는 점은 잘 알고 있다. 그들 사이에 나는 '빨갱이'이고, 회사 돈 1800여 억원을 사적 이익을 위해 포기한 '파렴치한 중죄인', '인격 파탄자'이며, 공영방송 KBS를 '좌파 진지'로 만든 '괴물'이었던 것이다.

"정연주는 보수 꼴통·미국 CIA 앞잡이"

그런데 이들은 나더러 '빨갱이' '괴물'이라 하는데, 우리 사회의 또 다른 한쪽에서는 나를 '보수 꼴통', 심지어 '미국 CIA 앞잡이'라고 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지난해 6월 말, 감사원의 특별감사 실시, 검찰의 잇따른 '배임혐의' 소환, KBS 이사회의 교체 등으로 나에 대한 사임, 해임 압박이 한창 고조되고 있을 때, 인터넷에서 이런 글이 떠올랐다고 비서팀에서 내게 보여준 적이 있다. 스스로 '좌파'라고 한다는 김00 씨의 글이었다.

"'존중할 수 없는 것을 지켜야 하는' 시절은 슬프다. 정연주씨는 미국생활을 오래 하기도 했지만, 전형적인 미국식 민주주의의 신봉자였다. 한겨레 시절 조선일보를 맹렬히 공격하곤 했지만, 동시에 좌파에게도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곤 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적절한 사고와 행태 덕에 KBS 사장이 되었는데, 오늘 그가 방송 공공성의 수호자처럼 일컬어지는 건 좀 민망한 일이다. 이명박이 KBS 사장을 제 사람으로 갈아치우려는 건 참 더러운 일이지만(그러나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김대중 노무현이 그랬듯), 착한 사람들이 밤을 새우며 고작 정연주 같은 자를 지켜야 한다는 건 슬픈 일이다. 개인 정연주가 아니라 공영방송 사장으로서 정연주? 싱거운 소리들 마라. 어느 정도 먹고살만한 사람들에겐 KBS가 공영방송인지 모르겠지만 대다수 인민의 처지에서 KBS는 공영방송인 적이 없다. 이를테면, KBS가 FTA나 비정규직노동자 문제를 반대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공영방송이란 '사장과 대통령이 사이가 안 좋은 방송'이 아니라, 힘없는 대다수 인민의 편에 서서 자본/지배계급과 긴장을 이루는, 그래서 세상이 돈과 힘을 가진 자들의 입맛대로 돌아가지 않도록 돕는 방송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정연주와 이명박은 원수처럼 으르렁거리지만 '미국식 민주주의'와 '미국식 자본주의'로 역할을 분담한, 결국 같은 세상을 소망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왜 이명박과 같은 세상을 소망하는 사람을 지켜야 하는가?"

나머지 부분은 개인의 이름이 등장하니, 생략하자. 이런 종류의 비판을 나는 사장 재임 시절 심심찮게 들었다. 그것도 내가 잘 아는 사람들로부터.

'정연주가 무슨 얼어 죽을 진보냐, 껍데기만 진보 흉내일 뿐, 속은 보수꼴통이야.'

그러니까 우리 사회 한 편에서는 나를 '빨갱이'라 했고, 다른 한 편에서는 '보수꼴통' '이명박과 역할을 분담한, 결국 같은 세상을 소망하는' 인물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조중동의 인신공격과 마찬가지로 이런 비판도 그냥 피식 웃으며 넘어갔다. 한편으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생각의 틀은 참 경직되어 있구나 하는 생각은 떨쳐버릴 수 없었다.

나에 대한 인식과 비판은 우리 사회에서 이처럼 극과 극을 이루어 왔다.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 나의 KBS 재임 시절 나와 KBS가 나름대로 균형을 이루려 노력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확인해준 셈이 되었다.

재임 기간 동안 KBS에 대한 평가

객관적 평가가 이러한 역설적 확인을 뒷받침해준다. 나의 재임 기간 동안 KBS가 각종 여론조사에서 신뢰도 1위, 영향력 1위라는 평가를 받았던 점이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가장 신뢰하는 언론사 <2004-2008> ⓒ 정연주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매체 <2001년-2008년> ⓒ 정연주


나는 후배들에게 자율의 공간을 최대한 넓혀주려 했고, 그 넓어진 자율의 공간에서 능력과 열정의 후배들이 공영방송인으로 제 몫을 다한 결과였다고 나는 믿고 있다. 그랬던 KBS가 불과 1년이 지난 지금은….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연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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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주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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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동아일보 기자, 한겨레 워싱턴 특파원, 논설주간, kbs 사장. 기록으로 역사에 증언하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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