낼 모레가 마흔인데 왜 공부하느냐고?

매섭게 세워진 날카로운 칼날로 세상 유익하게 하는데 일조하고 싶어

등록 2009.09.25 15:52수정 2009.09.25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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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유학하던 시절, 내가 속한 과에서 졸업생 선배들을 초청해서 현재 학교에 있는 후배와의 유대관계를 맺는 모임이 있어 참가했다. 잘 보일 양으로 있는 멋 없는 멋을 다 내며 옷장 구석에 밀어놨던 먼지가 수북히 쌓인 치마 정장을 꺼내 입고 떨리는 마음으로 학교 안에 있는 호텔로 황급히 발길을 옮겼다.

 

내가 배정받은 테이블에는 동양인이 나 하나였다. 마치 나를 중심으로 식품산업 현장에서 이름을 날리고 계신 기라성같은 분들이 나를 인터뷰하고 계신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 더군다나 미국으로 처음 공부하러 나와 살이 많이 쪄서, 오래된 정장이 꼭 끼어 불편했다. 떨리는 손으로 한손에는 나이프로 고기를 썰고, 다른 한손으로는 포크로 고기를 찍으면서도 소리 안 나게 최대한의 예의를 지키느라 얼마나 떨렸던가!

 

내가 가장 어린고로, 어르신들 앞에서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혹시나 부끄러운 영어 발음이 분위기를 더 어색하게 하지는 않을까라는 긴장감속에서 많이 망설였다. 그러다가, 처음 내뱉은 질문은 그야말로 찬물을 쫘아악 끼얹고도 남을 정도였다.

 

"코넬에 갔을 때 전공이 뭐였나요?(uhm, what was your major when you went to Cornell?)"

 

질문을 들은 식품관련 업체 사장님이시라는 선배님이 내 질문에 어색한 웃음을 지으시면서 답하셨다.

 

"나도 당신과 같은 공부를 했어요(I did the same study as you are doing)."

 

속으로, 오 이런(Oh, my God)! 이라는 감탄사가 질러졌지만 꾹 참았다. 식품학(food science) 선후배만 모인 자리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고작 한다는 질문이 식품학 전공자만 모인 자리에서 전공이 뭐냐고 물었다니.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잠시 후, 이상한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선배님이 내게 질문을 하셨다.

 

"Ithaca is gorgeous, isn't it? where is your favorite place?"

 

'이타카라는 도시는 너무 아름답지 않느냐'고 물으시면서 '어디가 제일 좋으냐'고 물으셨다. 이번엔 아까의 실수를 교훈 삼아 잘해보겠노라고 다짐하면서 답했다.

 

"Water Falls"

 

폭포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선배님이 물으셨다.

 

"What water falls?"

 

 어디 폭포? 라고 물으시기에 또박또박 다시 답했다.

 

"W-a-t-e-r f-a-l-l-s"

 

"yeah, I know but...(잠시, 뜸을 들이시면서 최대한 내가 무안하지 않게 주변을 살피시면서 목소리 톤을 낮추셨다.) water fall is generic name."

 

water falls 는 일반적인 이름, 즉 폭포라는 뜻이야라고 친절하게 답하셨다. 사실, 나는 water가 폭포 이름인 줄 알았다. falls가 폭포니까 당연히 water falls 물폭포라고 생각하면서.

 

두 번째 찬물을 끼얹는 시원한 실수에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지만 억지로 썩소(썩은 미소)를 휘날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Oh, I see~~ I love 'Taughannock Falls', That's my favorite falls!"

 

하고 더 어색하게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리고, 더 깊은 침묵이 우리 테이블을 감쌌다. 이렇게 귀한 자리에서 실수 빼곤 아무것도 한 것이 없구나를 생각하니 나 홀로 절망스러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뭐라도 건지고 가야, 추운 겨울날 휘날리는 눈발을 가로지르며 기숙사에서부터 입고 나온 치마정장에게 할 말이 있지 않겠는가!

 

언제 실수했냐는 듯이, 마지막 의미심장한 질문을 선배님들께 했다.

 

"What did you learn from school? Was it helpful when you are working in the real world?"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셨는지, 그게 세상에 나가서 일하실 때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를 물었다.

 

"I learn discipline"

 

나는 나를 어떻게 다스려야하는지, 훈육을 배웠다고 하셨다. 언제까지 시험이면 그 전에는 이것과 저것을 하루 전날 마쳐야 하고, 숙제는 기한 내에 제출해야 하고, 학기가 시작하면 무엇을 해야하고, 운동도 게을리할 수 없으니,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면서 지혜롭게 시간을 다스려야 하는데, 학교 다니면서 익혔던 모든 훈육이 현실 속에서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모른다면서 구구절절 학생 때의 추억을 되살려 말씀해 주셨다.

 

2004년 학교를 마치고, 다시 정식 학교로 근 6년 만에 돌아왔다. 유학생에서 이민자로, 화려한 싱글에서 여유만만한 더블 (?) 아줌마로 내 신분은 변했다.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엔 오늘은 뭘 해먹을까, 가는 길에 콩나물하고 쑥갓을 사야지. 맛나게 저녁먹고, 남편왈, 설겆이 놀이를 한 다음, 우아하게 차를 마시고, 공부방으로 들어와 숙제를 하고 시험공부를 한다.

 

혹자는 낼모레가 마흔인데, 지금 하는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박사는 해서 뭐하냐, 다 쓰레기다라며 현실 직시를 하란다. 오늘 읽은 머릿기사도 박사출신 60%가 비정규직에서 전전긍긍하고 있으며, 특히 여성은 형편이 더 어렵다고 했다.

 

박사과정 들어가서, 첫 오리엔테이션 때 학과장님이 새로운 박사과정 신입생들만 따로 모아놓고 하셨던 말씀이, 지금 박사를 마쳐도 10만불 (1억) 연봉 받기는 힘들다고 하셨다. 지적으로는 머리가 방대해져가는데, 그와 더불어 세상의 돈은 따라가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이니, 공부할 때 그 점은 명심하라고, 오늘부터 시작되는 고생이 내일 돈으로 환전되어서 돌아오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고 슬프고도 진지한 표정으로 말씀해 주셨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 중부 아이오와, 오지로 들어와 공부를 한다고 야단법석인가?

 

나름대로 내가 지치고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울 정의가 필요했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와, 이 과정을 통해, 세상의 명예를 얻기 위함도 아니요, 그에 따른 물질 보상을 받기 원함도 아닌, 나 자신을 바로 세우는 법, 훈육(discipline)을 배우기 위함이다.

 

말 그대로, 정해진 틀에 야생마같은 나 자신을 맞춰놓고, 시간안에 공부를 하고, 숙제를 내고, 강의를 듣고 따라가면서 나 자신을 훈육하길 원한다. 무딘 칼로 겁없이 세상에 뛰어드는 돈키호테가 아닌 매섭게 세워진 날카로운 칼날로 세상을 유익하게 만드는데 일조하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늦은 밤 컴퓨터 앞에서 나 자신과 씨름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다음 블로그에 중복 게재합니다.

2009.09.25 15:52 ⓒ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다음 블로그에 중복 게재합니다.
#공부 #코넬 #아이오와 #박사 #훈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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