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흔아홉인데 누가 살았겠어?"

[인터뷰] 이산가족상봉 신청을 포기한 황덕성 할아버지

등록 2009.09.27 12:48수정 2009.09.27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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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우산을 고치고 계신 할아버지 젊어서 우산가게를 했던 할아버지는 이 일이 '반기술 반노동'으로 힘이 많이 들지 않아서 계속할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우산을 고치고 계신 할아버지 젊어서 우산가게를 했던 할아버지는 이 일이 '반기술 반노동'으로 힘이 많이 들지 않아서 계속할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 신민자


"이건 전라도 칼이네. 남원에서 나오는 칼이야. 이 칼이 안 알려져서 그렇지, 독일제 쌍둥이 칼보다 나아."


맡기고 가는 칼의 모양새만 보고도 '원산지'를 단박에 알아차린 황덕성(79) 할아버지가 칼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돋보기 너머로 희미하게 웃는다.

"이거 갈려면 내 어깨 좀 아프겠네."

우뚝한 아파트 사이로 난 공원길. 4개의 아파트 단지가 만나는 열십자 모양의 길에 장이 섰다. 매주 금요일마다 열리는 알뜰시장이다. 색색의 천막이 늘어서고 그 아래엔 생선이며 채소, 과일이며 어묵 따위를 파는 전들이 펼쳐져 한적하던 길이 활기를 띤다. 소일 삼아 푸성귀를 다듬어 나온 할머니들은 보이지 않고 젊은 장사꾼들이 차지했다는 점이 시골장과 다르다면 다르지만 손님과 주고받는 왁자한 흥정은 제법 그럴 듯하다.

그 장터의 한 귀퉁이에 깔린, 절반으로 접은 돗자리가 황 할아버지의 자리다. 공구들을 펼치고 고르기가 다른 숫돌들을 나란히 늘어놓은 후 물 한 바가지를 떠오면 장사 준비는 끝난다. 무뎌진 칼과 가위를 갈고 망가진 우산을 고치는 일이 황 할아버지의 장사다.

"요새 돈 2천 원으로 할 게 없잖어?"


a 할아버지의 일터 귀퉁이에 돗자리를 펴고 공구를 늘어놓으면 장사준비는 끝난다. 깔고 앉을 종이상자만 하나 있으면 된다.

할아버지의 일터 귀퉁이에 돗자리를 펴고 공구를 늘어놓으면 장사준비는 끝난다. 깔고 앉을 종이상자만 하나 있으면 된다. ⓒ 신민자


"내가 싸게 고치니까 손님들이 꽤 있어. 요새 돈 2천 원으로 할 게 없잖어?"

구멍 난 우산에 다른 우산조각을 덧대어 붙이고, 못 쓰는 우산의 살을 제각각 분해하느라 황 할아버지의 손은 쉴 짬이 없다. 아파트 단지를 옮겨가며 매일 열리는 장을 따라 주5일 근무를 시작한 지 올해로 5년째. 장이 서는 날을 기다렸다 칼을 가는 사람들도 생겼다. 따로 천막이 없어 비 오는 날이 쉬는 날이다.


젊어서 타월 공장이며 우산가게, 운전으로 쉬는 날 없이 열심히 사셨으니 이제 좀 쉬셔도 되지 않느냐는 물음에 당치않은 걸 묻는다는 듯, 혀를 끌끌 차신다.

"논대는 게 그만치 힘들다는 것은 늙어봐야 알지. 노는 게 힘들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말쑥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식칼 과도 등속의 칼 다섯 자루를 황 할아버지에게 맡긴다. 칼 다섯 자루를 가는 데 한 시간이 걸릴 거란다. 그 말에 남자는 곧 총총히 사라지고 황 할아버지만의 작업이 시작된다. 주르륵 칼을 늘어놓고 직접 만든 붓(?)으로 숫돌에 물을 적셔 서억서억 소리를 내며 간다. 한참 갈고 날을 들여다보고 또 갈고 엄지로 스륵 만져보다 고르기가 다른 숫돌에 대고 그 과정을 처음부터 되풀이 하신다.

"새벽마다 한 시간씩 운동해. 영하 10도가 돼도 꼭 하지. 이것도 건강해야 할 수 있는 거니까."

칼을 가시는 어깨의 근력과 집중력이 젊은 사람들 부럽지 않다.

스무 살에 떠나온 고향... 저녁이면 눈물 바다로 보낸 세월

a 할아버지의 연장(!) 5년전 이 일을 처음 시작할 때 구입한 것들로 손잡이마다 길이 잘 들어있다.

할아버지의 연장(!) 5년전 이 일을 처음 시작할 때 구입한 것들로 손잡이마다 길이 잘 들어있다. ⓒ 신민자


평안남도 덕천군. 스무 살 때 떠나온 황 할아버지의 고향이다.

밥술 깨나 먹는 집에 육남매 중 막내로 자랐지만 1946년 시작된 북한의 토지개혁으로 온 집안이 숙청대상이 되었다. 논밭이든 산이든 가진 땅이 5정보(1만5천 평) 이상이면 그 대상이었다.

"집이 있어도 내 집에서 살지 못하게, 문 걸어 잠그고 내쫓는 게 숙청이야."

그 후로 "자본가 자식으로 낙인"이 찍혀 공부도 다 마치질 못하고 "계속 살아봤자 좋은 데로 갈 수가 없"어 1950년 12월, 형님, 조카와 함께 피난민 틈에 섞여 내려왔다. 이렇게 오래 될지 모르고 "대동강 아래 중화까지만 갔다가 평양이 해방되면 올라오라"는 부모님 말에 인사 나눌 경황도 없이 헤어졌다. 대동강을 건널 때는 입던 옷을 머리에 동여매고 팬티만 입은 채였다.

그렇게 헤어진 후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는지, 남쪽으로 내려왔는지도 알 수 없는 채로 "저녁이면 그냥 눈물바다"로 세월을 보냈다. "돈이 있나, 누가 오라는 사람이 있나. 내가 벌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여태껏 살아왔다. 그래서 지금도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아무 거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매일 일을 나온다.

"그런 거 해서 뭐해요?"

2년 만에 재개된 이번 추석 이산가족상봉에 신청은 해보셨냐는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나온 답이다. 내내 수굿하게 들려주시던 목소리에 강단이 서린다. 떠나올 때 스무 살이었던 청년이 팔순을 눈 앞에 둔 지금, 그 세월동안 누가 살아남았을까 싶어 마음 접은 지 오래여서 일까?

"미련없어요. 인생이 한 번 살다가 죽게 마련이고…."

"내가 일흔 아홉인데, 누가 살았겠어?"

황 할아버지가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온 나라가 KBS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을 보며 자기 일처럼 눈물짓던 1983년, 혹시 남으로 내려온 가족이 있을까 싶어 찾아 나섰을 때는 아무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나처럼 (좌·우가) 완전히 구별된 사람"이 찾겠다고 나섰다가 혹여라도 살아있는 이북 가족들을 "위급한 상황"으로 만들까 싶은 마음에 드러내놓고 찾지도 못했다. 2000년에는 그런 걱정은 덜었지만 이젠 찾을 사람이 없다.

"망넹이(막내)인 내가 일흔 아홉인데, 누가 살았겠어?"

통일부 발표에 따르면 1988년부터 지난달 말까지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한 사람은 모두 12만7321명으로 이 중 3만5484명이 사망했다. 올해에만 2184명이 숨졌다. 생존자의 76%는 70대 이상 고령자이다. 황 할아버지는 그 가운데 한 명이다.

곁에서 한담을 나누시던 이북사투리가 섞인 말투의 할아버지가 이 체념을 증명이라도 하듯 불쑥 말을 꺼냈다.

"나는 이번에(추석 이산가족상봉) 신청했는데, 아무도 없대. 우리 집 자리는 강산이 되버렸대."

사람의 온기가 스몄던 집 자리가 '강산'으로 변해 흔적만 남게 될 만큼의 시간이 황 할아버지에게도 흘렀다. 인간이면 당연히 누려야 할 가족과 함께 살고 싶다는 기본적인 권리마저 인도적 차원이 아닌 남북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이용당해왔고 그 때마다 이산가족들은 마음을 졸여야 했다. 그럼에도 황 할아버지는 떠나온 지 60년 가까운 고향 집의 주소를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황 할아버지가 칼을 다 갈고 자리를 걷을 시간이 되어서도 칼을 맡긴 남자는 쉬이 오지 않았다. 연장 짐을 정리해 자전거에 묶어놓고 그 곁에 앉아 칼 임자를 기다렸다. 인터뷰마치고 돌아서는 내 귀에 친구를 책망하는 황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린다.

"죽고 싶다고 죽어지나?"

칼 다섯 자루 덕분에 할아버지의 하루 2만 원벌이가 오늘은 좀 더 쏠쏠했을 것이다. 다행이다.

a 날이 잘 선 칼 다섯자루 이 다섯자루의 칼을 가는데 한 시간이 걸렸다.

날이 잘 선 칼 다섯자루 이 다섯자루의 칼을 가는데 한 시간이 걸렸다. ⓒ 신민자

덧붙이는 글 | 지난 9월 11일 만나 인터뷰한 내용입니다.


덧붙이는 글 지난 9월 11일 만나 인터뷰한 내용입니다.
#칼가는할아버지 #이산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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