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색된 남북관계, 20년 전 그들을 떠올린다

등록 2009.09.30 14:39수정 2009.09.30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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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문규현 신부가 1989년 8월15일 임수경씨와 남북분단 이후 민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판문점 남북경계선인 군사 분계선을 넘은 지 20년째가 되는 해다.

 

문익환 목사가 방북한 그해 여름, 한국외국어대 4년생으로 임수경이 세계대학축전에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로 파견되었다. 그녀는 당국의 눈을 피해 일본 도쿄와 독일 베를린을 거쳐 평양 땅을 밟는 데 성공했다. 지름길을 지척에 두고도 먼 길 돌고 돌아서 평양에 도착하던 날 공항 풍경이 눈에 선하다. 낭랑한 목소리로 당당하게 전대협의 도착 성명을 발표할 때는 얼마나 가슴이 뛰었던지, 얼마나 자랑스러웠던지. 환영의 물결은 또 얼마나 뜨거웠던지.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려 평양에 나타나 전대협기를 들고 혼자서 운동장을 행진하고 있는 모습이 TV화면에 비쳤을 때, 그 충격과 감동을 무슨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있을까. 그녀는 47일 동안 북한 전역을 누비고 다니며 "조국은 하나다"라고 외쳤다. 그녀의 당찬 언행은 남과 북 모두에게 큰 충격과 흥분, 긴장과 감동을 던져주었다. 대한민국의 딸은 참으로 당차고 자랑스러웠다. 그 누구도 하지 못하는 놀라운 일을 어린 여대생이 해낸 것이다. 이후 그녀의 이름은 '통일의 꽃'으로 불리어졌다.

 

그녀의 방북은 충격과 감동으로 대한민국을 소용돌이치게 했다.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있던 시기였으니 돌아오는 대로 구속될 것이었다. 모든 일정을 마치자 북측은 그것을 염려하며 올 때처럼 다른 길로 돌아가기를 권유했으나 그녀는 판문점으로 가겠다며 단식투쟁으로 고집을 꺾지 않았다. 같은 해 한 발 앞서 방북했던 '늦봄 문익환 목사'도 그 길을 통해 귀환하고자 했으나 북측에서 민감한 분위기를 생각해 돌아갈 것을 권유하자 이를 받아들여 어쩔 수 없이 타국으로 돌아서 귀국했었다. 그녀가 취한 북한에서의 행동들은 결코 어린 여대생이 아니었다. 내내 가슴 졸이며 지켜보면서 이 문제가 어찌될 것인지 조마조마했다.

 

그때 정의구현사제단에서 문규현 신부를 극비리에 파견했다. 홀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어린 양인 임수경 수산나를 사제가 돌봐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라 안은 또 한 번 술렁거렸다. 8월15일, 남쪽을 향하여 둘이서 손목을 묶고 판문점을 통해 군사 분계선을 넘던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가슴이 벅차고 뜨거웠던지. 민간인이 이곳을 지난 것은 남북분단 이래 처음 있는 역사적인 대사건이었다. 그녀가 붉은색 티셔츠에 흰 바지 차림으로 판문점을 넘던 그 장면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모습은 이제는 고인이 되어버린 노무현 전 대통령님과 권양숙 여사가 노란 군사 분계선을 넘던 장면과 오버랩 되어 감개가 무량했다.

 

온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분단의 벽'을 넘은 그들은 귀국하자마자 그 길로 바로 안기부에 의해 구속되었다. 통일된 나라를 위해 했던 행동이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것이었다. 당시 문규현 신부는 개인으로나 교회로나 역할이 크게 기대되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난의 길을 선택했다.

 

모순되게도 그 길을 권유한 것은 문규현 신부의 형님인 문정현 신부였다. 동생을 북한에 보낸 이후 문정현 신부는 어머니에게 할 말을 잃었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안은 그것밖에 없음을 알기에 두 형제는 권유하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문규현 신부의 삶이 바뀌어버렸다.

 

두 형제 신부는 길 위의 신부로 살고 있다. 문규현 신부는 새만금 삼보 일배, 4대강 정비를 반대하는 오체투지로 전국을 몇 차례 순회했고, 은퇴한 백발의 문정현 신부는 지금 용산참사 현장에서 용산가족들과 함께 하고 있다.

 

임수경의 인생도 그로 인해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투옥 되었다가 가석방으로 풀려나 사회운동을 하면서 결혼했으나 결국 이혼했다. 이혼 당시 그녀는 '우리 부부의 벽은 남북의 벽보다 높았다'고 했다. 이미 평범한 삶을 살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거기다 하나뿐인 아들 재형이도 잃었다고 한다. 통일의 다리를 놓기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며 결행했던 방북으로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그들의 이런 희생 위에 남북공동선언이 나오는 등 남북문제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현 정권 들어서 다시 경색되고 있는 남북문제를 바라보며 안타깝기 그지없다. 금강산 관광도 발이 묶이고,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이 철수하거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국가적 손실이 어디 있는가. 남북 모두 부디 민족이 대결 아닌 공생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나가길 기대한다.

2009.09.30 14:39 ⓒ 2009 OhmyNews
#남북분단 #군사분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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