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집 아저씨' 김피디, 아프리카로 떠나다

[책으로 읽는 여행 42] 김영희 피디가 쓰고 그린 <헉! 아프리카(Hug! Africa)

등록 2009.11.09 20:05수정 2009.11.09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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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헉! 아프리카> ⓒ 교보문고

김영희 피디는 <이경규의 몰래 카메라>,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등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프로그램을 제작한 연출자다. 재미를 뛰어넘어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켰던 이런 프로그램 덕분에 그는 피디연합회상, 백상 예술 대상, 골든 로즈본 상 등 온갖 상을 휩쓴 것으로 모자라 방송 역사상 초고속 승진, 최연소 국장 등의 화려한 경력을 얻었다.

그런 그가 2009년 국장, 협회장 등의 무거운 직함을 벗어던지고 무작정 여행을 떠났다. 살아 있다는 것, 꿈틀거리는 생명력을 느끼기 위해 그가 선택한 곳은 바로 아프리카다. 아프리카 여행 끝에 살아 있음은 곧 희망과도 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쌀집 아저씨 김 피디의 재미난 여행기를 들여다보자.


제일 먼저 도착한 아프리카 나이로비의 첫인상은 이러하다. 길거리에 사람들이 서 있다. 자기들끼리 얘기하며 몇 시간이고 서 있다. 어쩌다 누가 먹을 것이라도 구해 오면 사이좋게 나눠 먹는다. 그러다가 날이 저물면 집으로 돌아간다.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돈 백 오십 원이 없어 몇 시간 거리를 걸어서 출퇴근하는 이들의 행렬이 줄을 잇는다.

맨 처음 맞닥뜨린 아프리카의 가난한 현실은 저자를 서글프게 한다. 자본주의적 시각에서 볼 때 아프리카는 참 불쌍하다. 그러나 거대한 자연을 품에 안고 있는 검은 대륙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는 웅장함을 지니고 있다.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면 킬리만자로의 별이 내 품으로 쏟아져 내리는 아름다움에 저자와 독자는 함께 감탄할 수밖에 없다.

아프리카의 구석구석을 훑으며 저자는 자신의 느낌과 여정을 그림과 함께 기록했다. 방송국 피디라 어설플 법도 한데 그림 솜씨가 아주 뛰어나다. 다른 여행서적과는 다르게 사진이 별로 없는 게 이 책의 특징이다. 단순한 그림과 이야기만 담긴 여행기라 지루할까 싶었는데 의외로 이를 통해 아프리카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저자가 '아프리카 타임' 이라는 별명을 붙일 정도로 불규칙적이고 엉망인 교통 시스템. 치안이고 복지고 아무것도 제대로 된 게 없는 나라들. 이런 곳을 여행하려면 웬만한 담력이 어려울 듯하다. 그럼에도 저자는 씩씩하다. 사하라 사막에서 노숙을 하고 우리에겐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곳에 들어가 탐험을 한다.

재미있는 일도 많다. 아프리카가 추울 거란 예상을 누가 하겠는가! 간단한 차림으로 여행을 시작한 저자는 털이 달린 겨울 파카를 사야 할 정도의 추위에 웃음을 날린다. '이 세상에 겪어 보지 않고 알 수 있는 것이란 없다'는 진리를 다시금 깨달았기 때문이다.


야생동물들이 사는 델타 지역에서의 캠핑은 그야말로 동물의 왕국을 실감케 한다. 야생동물의 습격을 받을까봐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밤, 자려고 텐트에 누우면 온갖 동물들의 소리가 텐트 주변을 감싼다. 공포의 밤을 보내며 저자는 쿵쿵거리는 코끼리의 앞발이 텐트를 짓밟는 꿈까지 꾼다.

세계 최고의 빈민가라 불리는 남아공의 쏘웨토를 방문하면서 저자가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아프리카인들의 가슴에 있는 '화'다. 다이아몬드가 펑펑 넘치는 땅에 살면서도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고 온갖 병마와 에이즈가 만연한 사회.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백인이 들어와 살면서 천대 받은 흑인들의 멍든 가슴.

남아공의 첫 흑인 대통령 만델라마저도 가슴에 화가 많아 젊은 시절 권투를 했다고 한다. 그만큼 이들의 삶은 멍투성이라는 뜻이다. 누구에 대한, 무엇에 대한 화인지도 이제는 확실치 않지만, 흑인들은 모두 가슴 속에 화를 지니고 살아간다. 단지 화를 가리고 살 뿐이다. 그러고 보니 아프리카인들의 검은 눈동자에 담긴 슬픔 또한 이런 처지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싶다.

역시 혼자 여행은 외로운 법, 식구들에게 전화를 걸다

책을 읽으면서 궁금한 사실은 '아니, 이렇게 멋진 경치를 혼자서 무슨 재미로 보러 다녔나?' 하는 것이다. 나도 한때 여행을 즐기는 사람이라 혼자 미국과 캐나다를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면서 괜한 후회가 들었다. 너무 좋은 풍경을 나 혼자 보고 있는 것이 아쉬웠기 때문이다.

여행기의 후반부에 접어들어도 책에서는 전혀 그런 아쉬움을 찾아 볼 수 없다. 여정도 꽤 긴 편인데, 혼자임을 철저히 즐기는 게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웬걸. 역시 혼자는 외로운 법이다. 생일을 맞이해서 라면과 김치를 먹으며 저자는 갑자기 자신의 모습이 초라해짐을 느낀다. 식구들이 보고 싶어서다.

아무리 맛난 음식도 아무리 멋진 경치도 혼자서는 별로 의미가 없다는 진리를 깨달은 그. 결국 집에 있는 아들에게 전화를 한다. 저자는 아들의 목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뜀을 느낀다. 게다가 아들이 아빠 생신이라고 하며 노래를 불러주어 가슴이 뭉클하다. 전화로 이런 감동을 느낄 수 있다니, 문명이 때로는 우리에게 행복을 주기도 한다.

사하라의 붉고 고운 모래를 콜라병에 담아 오는 저자. 그는 이 모래를 어디에 쓸까? 여행을 좋아하셨던 아버지의 제사 때 향 꽂는 모래로 사용하기 위해 사하라 모래를 소중히 간직했다는 사연 또한 가슴이 찡하다.

난 김영희 피디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지만, 그가 만들어낸 프로그램과 책을 보니 마음이 따뜻하면서 열정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프리카의 안타까운 현실에 가슴 아파하고 멋진 풍경에 아낌없이 감동하며 주어진 현실을 즐길 줄 아는 모습이 아름답다.

누구나 아프리카를 쉽게 떠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이 책을 통해서라면 얼마든지 아프리카의 진면모를 엿볼 수 있을 듯하다. 저자가 긴 여행을 마치고 어떤 프로그램으로 복귀할지는 모르지만 그가 겪은 또 다른 세상 경험이 멋지게 녹아든 좋은 프로그램을 기대해 본다.

헉hug! 아프리카

김영희 지음,
교보문고(단행본), 2009


#여행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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