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지곤지 찍고... 가마멀미가 얼마나 나던지"

[인생을 듣다 6] 일흔일곱 조광식 할머니(호적상 1934년생. 실제 나이 1933년생)

등록 2009.11.30 09:38수정 2009.11.30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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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이 맘 때면 누구보다 몸과 마음이 시린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홀로 지내는 어르신들입니다. 이 분들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과 몸 누일 방도 필요하지만 더욱 필요한 것은 이야기 나눌 사람입니다. 긴 세월 이어온 그 분들 생엔 한 시대가 고스란히 스며 있습니다. 사회복지법인 '우양'(www.wooyang.org)과 함께 그 분들을 찾아나섭니다. 어르신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으로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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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기를 좋아하시는 조광식할머니 ⓒ 김혜원


"나, 지금까지 한 번도 내 이야기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야. 그리고 이제 와서 다 지난 옛 이야기를 해서 뭐해? 그저 내 가슴 속에 묻어 두고 가는 거야. 날도 추운데 여기까지 왔으니 몸이나 녹이고 가."


마주 앉은 지 30분이 지나고 있지만 좀처럼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으시는 할머니. 가슴 속에 담아 둔 사연은 많지만 독거노인이라는 이름으로 사는 지금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겠느냐는 것이다.

도움의 손길이 없어서일까. 할머니의 방은 정리되지 않은 옷가지들과 살림살이들로 다소 어수선하다. 하지만 어수선한 와중에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손 때 묻은 가구들이 눈에 들어온다. 옷장과 반닫이 그리고 단아해 보이는 화초장. 지금은 칠이 벗겨지고, 장식과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 고물처럼 보이지만 한때 윤택했던 할머니의 살림을 짐작하게 하는 것들이다.

"예전(1984년) 망원동에 수해 났을 때 다 물에 잠겼던 거야. 자개장도 있었는데 물에 잠기니 자개가 다 떨어져 버려서 못쓰게 되더라구. 옛날 사진도 많았는데 그때 물에 다 잠겨버렸어."

갑작스런 물난리로 간직하고 있던 사진이 사라져 버렸지만 하나도 아쉽지 않다는 할머니. 설혹 가지고 있다한들 무얼하겠느냐며 차라리 잘 되었다고 하시지만 왜 서운한 마음이 없을까 싶다.

"내 고향은 충북 영동. 백두대간이 우리 집 앞마당을 지나간다고 어른들이 말하는 걸 듣고 자랐어. 태백산맥 소백산맥을 지나온 백두대간이 우리 집 앞마당을 지나 지리산으로 이어진다고 말이야. 설날이면 어머니가 손수 유똥치마에 자미사저고리를 해 입히곤 하셨지."(*유똥치마 : 견직물 가운데 하나인 유동으로 만든 치마, 자미사저고리=본견저고리)


양반가라는 창녕 조씨 집안에 맏딸로 태어난 할머니. 당시만 해도 드물게 '홈스펀' 양복을 입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셨던 하이칼라 신사 아버지를 둔 덕에 딸이었지만 학교 공부는 빼 놓지 않고 할 수 있었다.(*홈스펀 : 가정에서 만든 굵은 실을 이용해 수직기로 평직이나 능직 또는 삼능직으로 제직한 모직물)

"왜정 때 태어났으니 일본학교를 다녔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해방이 되더라구. 학교에서 부르던 일본 이름은 나쓰야마(夏山)였지. 65년 전 일인데 이상하게도 왜정 때 배운 노래나 글들은 아직도 생생해. 들어볼래?"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노래를 부르신다. "기미가요와 치요니 야치요니 사자레이시노 이와오토나리테 고케노무스마데~" 일제강점기에 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매를 맞아가며 기억에 새겨야 했다던 '기미가요'다. 그리고는 마치 국민의례를 하듯 바로 이어 눈을 감고 "우리는 대일본 제국의 신민입니다"로 시작하는 <황국신민서사>를 외우신다.

"이거 못하면 벌 세우고, 두드려 맞고 얼마나 혼났는지 알아? 죽기 살기로 외웠지. 맞지 않으려면 할 수 없었거든. 그 때(일제강점기)는 매일 아침 조회를 했어. 아침 조회 시간마다 기미가요를 부르고, 황국신민서사를 외우고 천황이 있는 동쪽을 보고 절을 하게 시키는 거야. 마을마다 신사를 만들어 놓고 신사참배도 시키고 말이야. 지금은 없어졌지만 옛날엔 남산 도서관 올라가는 계단에도 일본 놈들이 세워 놓은 신사가 있었어."

내 나라 말을 썼다는 이유로 매를 맞고, 벌을 서고, 반성문을 써야 했다던 그 시절 할머니. 역사책에서만 보았던 일본인의 황국신민화정책이 얼마나 치밀하고 가혹하게 이루어졌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학교에서는 일본말만 가르치고 일본말만 쓰게 하니 '가갸거겨'(한글)를 배우지 못한 거야. 한글을 배운 건 해방 후 중학교를 다니면서였지. 세일러복 블라우스에 주름치마를 입고 학교에 가면 남학생들이 서로 쳐다보고 그랬어. 워낙 여학생이 귀하던 시절이니 그랬겠지."

중학교에 입학한 후 조국은 해방을 맞았지만 할머니는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한 채 한국동란을 맞는다.

"한강철교가 끊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부산으로 피난을 갔어. 부산 동대신동에 친척이 살고 있어서 그리로 갔다가 휴전이 된 후 다시 고향에 돌아왔지."

전쟁이 끝나 고향으로 돌아 온 후에도 삶은 여전히 순탄했다. 전쟁 통에 다하지 못한 학업을 마치면 되었고, 학업을 마친 후에는 부모님이 정해 주신 남자와 결혼을 해서 부모님들처럼 그렇게 살아가면 되는 거려니 생각했었다. 아버지 몰래 연애소설을 빌려 보며 가슴 두근거리던 꿈 많은 소녀시절. 할머니 기억 속에 가장 아름답게 남아 있는 시간들이다.

"아버지는 소설책을 읽지 못하게 하셨지만 이불속에 들어가서 몰래 몰래 다 읽었어. 이광수의 <사랑>도 읽었고, 김내성의 소설 <청춘극장>은 5권까지 다 봤지. 서울로 공부하러 갔던 친구들이 고향에 내려올 때면 소설책을 한 자루씩 가져오는 거야. 그러면 동네친구들이 돌려 읽고 그랬지. 아버지가 가져오신 <월간 아메리카>라는 미국잡지를 보면서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도 조금씩 알게 되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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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환경에서도 의류를 기증하는 등 남을 위한 봉사도 열심인 조광식할머니 ⓒ 김혜원


지난날을 회상하며 흐려졌던 할머니의 눈이 현실로 돌아오는 듯 하더니 방문 앞에 밀어두었던 답배 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이신다.

"후우~" 한숨처럼 깊게 담배 한 모금을 빨고 나신 할머니가 문득 쓸쓸한 노래를 부르신다.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 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1950년대 말 유행한 노래 <동심초>다.(*1950년대 조남사가 쓴 주간연속극 <동심초>의 주제가. 김성태가 곡을 만듬. '산장의 여인'을 부른 가수 권혜경이 노래를 불러 크게 인기를 끔.)

"속 깊이 담아 두었던 지난 이야기. 이제야 처음으로 꺼내 보내. 가슴속에 담아 두고, 담아 두고, 누르고 또 눌러 이제는 병이 된 이야기들이야. 이거 주책이 아닌지 몰라. 뭐 좋은 이야기라고..."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우신 후에야 할머니의 결혼 이야기가 이어졌다. 스무살 언저리 신랑 될 사람 얼굴도 보지 못하고 혼례를 치렀다는 할머니는 친정에서 몇 시간 거리인 시댁까지의 가마 길을 잊지 못했다. 굽이굽이 거친 산길을 돌아 시집가는 길. 다가올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기대 그리고 설렘 때문이었는지 참기 힘든 어지러움을 느꼈다고.

"연지 곤지 찍고 족두리 쓰고 몇 시간을 꼼짝없이 가마에 앉아서 가는데 흔들림도 심하고 긴장도 되고... 가마멀미가 어찌나 나던지..."

결혼식 모습이 70년대 흑백TV시절 인기 있었던 드라마 <아씨>의 한 장면 같다고 하니 할머니는 또 노래를 하신다.

옛날에 이 길은 꽃가마 타고
말 탄 님 따라서 시집가던 길
여기던가 저기던가
복사꽃 곱게 피어있어 있던 길
한세상 다 하여 돌아가는 길
저무는 하늘가에 노을이 섧구나

외부에 나가 친구들 만나는 일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도 그리 즐기지 않는다는 할머니. 그래서 거의 많은 시간을 혼자 보내지만 원래부터 수줍음이 많은 성격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독거어르신들이 그렇듯 외롭고 구차한 환경에 놓여 있다 보니 자존감과 자신감이 상실되어 성격마저 그렇게 바뀌어 가는 것이다.

"난 시댁에서 쫓겨나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야. 칠거지악을 저질렀으니 말이지. 딸만 낳았거든. 아들도 낳아주지 못했고 새파란 청춘에 남편을 먼저 보냈고...  칠거지악이지."

얼굴도 안보고 시작했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당시로서는 많이 배운 여성에 속하는 아내를 얻은 남편은 자격지심에서인지 사사건건 무시하지 말라는 투로 싸움을 걸어왔고 싸움 끝엔 욕설과 폭력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그나마 결혼생활도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10년을 채우지 못하고 끝이 나고 말았다.

두 딸만 남겨두고 먼저 간 남편. 대를 이을 아들도 낳지 못했으며 남편까지 먼저 보낸 며느리가 시댁에 가족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기란 쉽지 않은 일. 결국 칠거지악을 이유로 시댁 문을 나오게 되었지만 두 딸을 데리고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친정으로 돌아갈 순 없었어. 그 놈의 양반집 체면이라는 것 때문에... 나 때문에 친정집 가문에 먹칠 할 순 없다고 생각했고..."

사별 후 두 딸을 데리고 나와 50년 넘게 살아온 할머니. 혼자 몸으로 두 딸을 키우며 살아온 지난날들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는지 그 시간을 떠올리는 것조차 고통스러워 하신다. 결국 할머니의 파란만장 했을 홀로서기는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여자가 혼자 돼서 할 수 있는 일이 뭐 있겠어. 그냥 장돌뱅이라고 해두지 뭐. 내가 가진 살림이며 옷들이며 보면 알겠지만 한때 돈도 좀 벌고 써보기도 했어. 80년대엔 빵장사를 해서 제법 돈도 모았었지. 하지만 인생이란 게 그렇더라. 버는 놈 따로 있고 쓰는 놈 따로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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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십이 넘어도 여전히 고운 것이 좋다며 손톱에 분홍 메니큐어를 칠하신 할머니. 머리는 백발이나 마음은 소녀다. ⓒ 김혜원


수 십 년 전에 구입한 모피코트를 소중히 간직하고 계신 할머니.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오며 털이 다 빠지고 윤기도 사라져 볼품이 없어졌지만 파란만장했던 시절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옷이라 쉽게 버려지지가 않는단다.

"오래된 건 사오십 년 됐지만 다른 건 일이십 년 된 옷도 있거든. 돈을 좀 벌 땐 좋은 옷도 많이 사 입었지. 곱게 입어서 지금도 새 것 같은 옷이 많아. 그래서 내가 <우양>에 기부를 했어. 다른 할머니들하고 나눠입으면 좋잖아. 그런데 공연히 그랬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내가 뭐 가진 게 많아서 그러는 줄 알고 집으로 조사를 나오질 않나..."

좋은 일을 하고도 오해를 받는 것이 속상하시다는 할머니는 구청이나 동사무소 사회복지과에서 가정방문조사를 나온 것이 혹시 당신의 헌옷 기부 때문이 아니었는지 공연한 의심이 된다고.

"뭐를 얼마나 줄려고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집에 와서 이리 들쳐보고, 저리 들쳐보고 이것 물어보고, 저것 물어보고... 사람 속을 슬쩍 떠보기도 하고. 가난하면 남에게 줄 것도 없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아. 오래된 옷을 기부했더니 살기가 넉넉해서 그러는 줄 오해를 하는 것 같더라구. 이런 말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나라에서 노인 수당이나 생계비 같은 거 타먹으려면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지 몰라."

"줄지 안 줄 지도 모르는데 자식처럼 젊은 사람들에게 "네, 네" 하며 굽실 굽실하는 것도 참 못할 짓이야. 거기다 대면 우양은 양반이야. 한 번 주겠다고 결정하면 두 번 다시 묻지도 않고 주거든. 매달 날짜도 틀리지 않고 같은 날에 쌀 7kg 받는데 그게 얼마나 든든한 줄 알아? 가난해도 쌀만 있으면 밥은 먹잖아."

사별 후 혼자 살아오신 이야기에 대해서는 끝내 입을 떼지 않으시는 할머니. 비록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말로 다 할 수 없는 아픔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당신 삶의 이야기는 속 시원히 들려주지 못했지만 언젠가 좋은 자리에서 다시 만나면 당신 마음을 담은 멋진 노래 한 자락을 선물로 들려주겠다며 악수를 청하신다.

"기회가 되면 내가 노래 한 번 불러 줄게. 그럼 됐지? 늙은이 찾아와 줘서 고마워. 그리고 내 이야기 들어줘서 고맙고..."    

조광식 할머니는?
마포구 망원동의 한 주택에 월세로 거주(500/24만원). 기초생활수급자로 매달 30만원의 생계비를 지원받고 있지만 대부분 월세로 지출되고, 딸들이 부정기적으로 보내주는 약간의 용돈과 우양에서 지원하는 쌀7kg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음. 

덧붙이는 글 | * 어르신들 친구가 돼주세요. 이 글을 읽고 어르신들에게 답글을 보내주세요. 사회복지법인 우양(www.wooyang.org/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460-1, 02-324-0455)으로 편지나 이메일을 보내주시면 어르신들에게 전해드리겠습니다. 한 끼 식사보다, 하루 잠자리보다 더 큰 선물이 될 것입니다. 더불어 우양에도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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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식할머니 #독거노인 #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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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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