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적끈적' 비담, 정말 선덕여왕 스토커였을까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선덕여왕>

등록 2009.12.03 11:29수정 2009.12.03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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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선덕여왕> 속 비담.
드라마 <선덕여왕> 속 비담. MBC
1일 방영된 드라마 <선덕여왕> 제56부에서는 명장 김유신이 모함을 받아 투옥된 사이에 설원이 유신의 군대를 이끌고 나갔다가 백제군에게 대패하여 유신이 '수군통제사'로 재기용됐다는 '신라판 이순신' 같은 이야기가 전개되는 가운데에, 한편에서는 비담이 나라가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선덕여왕에게 강렬한 눈빛을 날리며 구애작전에 박차를 가하는 장면이 묘사되었다.

비담의 애정공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적정 수위를 넘어섰다. 'MBC 카메라들'이 지켜보고 있는데도, 비담은 틈만 나면 여왕에게 끈끈한 눈빛을 보내고 여왕의 손등에 살짝 손을 얹어 보고 어떤 때는 아예 대담하게 여왕을 끌어안기도 한다.

지난 달 30일에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한 <성희롱 시정권고 사례집> 제2집에서는 "상대방의 손바닥을 손가락으로 긁는 행위는 비공식적으로나마 성관계의 제의를 의미한다고 널리 인식되고 있다"며 이런 행위 역시 성희롱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판단했다. '다행히' 비담은 여왕의 손바닥이 아닌 손등에 스킨십을 했다. '성희롱 논란'을 피해가며 애정공세를 계속하는 그 절묘함에 찬사를 보내야 할 것인가.

신하인지 스토커인지 도통 분간할 수 없는 비담의 애정공세 앞에서 여왕 덕만은 그저 '대략난감'할 뿐이다. "연모는 날아가는 새에게나 줘라"는 미실의 말을 "연모는 참으로 따뜻하고도 한가한 단어"로 변용하여 비담의 접근을 차단하는 덕만. 그러나 이따금씩은 비록 일순간이나마 여자가 되기도 하는 덕만. 흔들리는 갈대만큼이나 그의 마음도 그렇게 흔들리고 있을까.

끈적끈적 애정공세 비담, 실제로도 그랬을까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끊임없이 묘사되고 있는 비담의 애정공세. 과연 실제로도 그런 일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을까?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고 하지만, <선덕여왕>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비담-덕만의 애정문제를 보면서 역사 속의 비담 역시 정말로 그랬을까 하는 의문을 이따금씩 갖지 않을 수 없다.

비담은 <삼국유사>에는 전혀 나오지 않고 <삼국사기>에만 네 번 언급된 인물이다. 한편,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한 번 언급된 인물이다. <삼국사기>에 4회 언급되었다고는 하지만, 상대등 임명 건(1회)과 쿠데타 건(3회)과 관련하여 언급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의 인적사항이나 인간관계 같은 것은 명확히 알아낼 길이 없다.

하지만, 한 가닥 희망은 있다. 비담이 상대등에 임명된 사실로부터 '수사'에 착수하다 보면, 뭔가 중요한 단서가 잡힐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선덕여왕 시대(632~647년)에 총리급인 상대등 혹은 그에 상응하는 자리에 오른 인물은 모두 3명이다. 을제, 수품, 비담이 그 주인공들이다. 을제는 상대등이란 타이틀을 갖지는 않았지만, 여왕 1년(632) 2월에 국정총괄의 책임을 맡았다. 수품은 여왕 5년(636) 1월에 상대등이 되었다. 문제의 비담은 여왕 14년(645) 11월에 상대등에 올랐다.

이 3건의 총리급 임명 중에서 가장 큰 국제적 관심을 끌었던 것은 을제의 경우였다. 이것은 중국의 역사서에까지 기록될 정도로 '대단한 사건'이었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한 1145년으로부터 꼭 2백 년 전인 945년에 중국에서는 <구당서>가 완성되었다. 907년에 멸망한 당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원래는 <당서>라고 불려야 하지만, 1060년에 완성된 <신당서>와 구별하기 위해 <구당서>라고 부른다. 이 <구당서> 권197상(上) 신라열전에 "진평이 죽어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 딸 선덕을 세워 왕으로 삼고 종친 대신 을제가 국정을 총괄했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의 정사(正史)에 수록된 외국 열전에는 중국과 관련된 필수적인 내용들이 주로 기록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웃나라의 총리급 인사이동 같은 것은 별로 화젯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런 경향을 고려할 때에, 을제가 국정총괄 책임을 떠맡은 사실이 <구당서>에 기록됐다는 것은 그 인사이동이 국제적으로 큰 관심을 끌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것이 국제적 관심거리가 되었을까?

 드라마 <선덕여왕>
드라마 <선덕여왕>MBC

선덕여왕 시기의 상대등 3며의 삶을 추적해보니

우리는 문제해결의 단서를 필사본 <화랑세기> 속에서 찾을 수 있다. 필사본 <화랑세기>의 진위논쟁이 아직 종결되지 않았으므로, 현재로서는 이 책의 내용을 그저 참고로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 한계를 염두에 두고서 필사본 <화랑세기> 제13세 풍월주 김용춘 편을 열어보기로 한다.

김용춘 편에 따르면, 선덕여왕이 즉위한 632년에 신라 조정에서는 삼서지제(三婿之制)라는 것을 제정했다. '세 남편의 제도'라는 뜻의 이것은 여왕을 위해 세 명의 남편을 선정해두는 조치였다. 왕의 후사를 생산하기 위해 후궁을 따로 두듯이, 여왕의 뒷날을 위해 여러 명의 남편을 두었던 것이다.

'삼서지제'의 서(婿)는 오늘날에는 주로 '사위'를 의미하지만 과거에는 '남편'을 의미하기도 했다. 중국 후한시대(25~220년)의 허신이 만든 유명한 한자사전인 <설문해자>에서는 "여자의 남편을 서(婿)라 한다"고 했다.

서기 632년에 여왕의 남편으로 선정된 사람들은 용춘·흠반·을제였다. 용춘이 제1남편이고, 흠반·을제는 '부남편' 같은 존재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여왕의 남편으로 선정되었다고 해서 오로지 여왕 한 사람만 바라보도록 강제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여왕의 언니인 천명공주와 관계를 갖고 있던 용춘이 여왕의 남편으로 선정된 점을 볼 때에 그러하다. 또 일처다부와 일부다처가 중첩적으로 혼합된 신라왕실의 중혼 풍속을 볼 때에도 그러하다.

2008년에 <아내가 결혼했다>라는 영화가 나온 적이 있다. 632년에 신라에서 벌어진 상황을 영화로 만들면, 아마 <남편이 결혼했다>가 될 것이다.

선덕여왕이 복수의 남편을 세운 데에는 그들을 국정운영의 파트너로 삼으려는 의도가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용춘이 제1남편 자리를 고사하자 그를 대신해서 을제가 국정을 맡았다는 <화랑세기> 기록을 볼 때에 그러하다. 제1남편 자리와 국정총괄 책임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던 것이다. "을제에게 국정을 총괄하게 했다"라는 인사이동의 밑바탕에 여왕과 을제의 부부관계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육체적으로 가까운 남자를 정치참모로 활용한 사례는 선덕여왕이 공주였을 때에도 발견된다. <화랑세기> 김용춘 편에서는 용춘이 덕만공주의 연인 겸 정치참모로 활동한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연인을 정치참모로 활용하는 패턴이 여왕 즉위 후에 '부남편' 을제의 국정총괄로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신라 왕실에 부남편이라는 특이한 제도가 생겼고 부남편들 중 하나가 국정총괄 책임을 떠맡았다는 사실이 당나라 사관(史官)들에게 매우 인상적으로 비쳐졌던 모양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을제의 국정총괄이 <구당서>에까지 기록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을제 이후에 국정총괄 책임을 맡은 상대등 수품 역시 을제와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수품의 족보에서 그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다.

 드라마 <선덕여왕>.
드라마 <선덕여왕>.MBC

여왕의 정치파트너는 대부분 남편 혹은 연인이었다

<화랑세기> 제24세 풍월주 천광공 편에 따르면, 수품은 미실의 외손자인 동시에 사도태후(진흥왕의 부인)의 친손자였다. 미실과 사도태후는 왕비족인 대원신통 소속이었다. 여자가 아닌 수품은 자기 대에 한해 대원신통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들 왕비족의 최대 관심사는 왕족과의 혼인이었다. 왕비족은 자기 집안의 딸뿐만 아니라 아들까지도 왕실에 장가보내려고 했다. 진평왕의 딸인 양명공주가 미실의 후원 하에 미실의 아들인 보종과 밤을 보내고 그 사이에서 보라·보량 두 딸이 태어난 것은, 미실을 포함한 왕비족의 핵심 관심사가 왕실과의 혼인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화랑세기> 천광공 편에 따르면, 대원신통 소속인 수품 역시 왕실 여인과 혼인했다. 그의 부인인 천장낭주는 진흥왕의 손녀인 동시에 지도태후(진지왕의 부인)의 딸이었다. 지도태후는 진지왕 외에 천주라는 남자와도 관계를 가졌고 거기서 천장낭주라는 딸이 태어났다. 신라 왕실의 중혼풍습을 고려할 때에, 수품이 왕실 여인과 혼인을 했다는 것은 그가 또 다른 왕실 여인과도 관계를 가졌을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원신통에 속했을 뿐만 아니라 왕족 여인과 혼인한 수품이 부남편 을제에 이어 국정총괄 책임을 맡았다는 사실. 물론 이 사실은 수품이 선덕여왕의 제1남편 혹은 부남편이 되었음을 증명하는 직접적인 자료는 아니다. 하지만, 남편 혹은 연인을 정치참모로 삼은 선덕여왕의 패턴을 고려할 때에, 수품 역시 여왕의 남편 혹은 연인 역할을 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선덕여왕 시대에 총리급을 지낸 3명의 남자인 을제, 수품, 비담. 그 3명 중의 한 명은 여왕의 남편이었고 또 한 명은 여왕의 연인 혹은 남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면, 나머지 한 명인 비담도 그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기록이 불충분한 상태에서 뭐라 단언할 수는 없지만, 위와 같은 정황을 볼 때에 그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묘사되는 여왕과 비담의 '묘한 분위기'는 개연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모종의 관계가 밑바탕이 되어 여왕이 비담을 상대등에 임명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과 감정적 끈이 없는 정치참모에게 확신을 갖지 못하는 <화랑세기> 속의 선덕여왕을 생각할 때에 더욱 더 그러하다.

<이산>에 나온 조선 정조는 학자적 군주의 이미지에 걸맞지 않게 매우 감각적인 멘트로 성송연을 유혹했다. 그와 얼굴이 비슷하게 생긴 <다모>의 좌포청 종사관 황보윤 역시 아주 달콤한 멘트로 다모 채옥을 유혹했다.

드라마 속 정조와 황보윤에 비해 연애 노하우가 현저히 떨어지는 비담은 그저 '저돌적'인 눈빛과 스킨십으로 여왕에 대한 유혹의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어찌 보면 좀 '무식한 방식'일 수도 있지만, 그런 무식한 방식이 선덕의 여심을 움직여 그에게 상대등 자리를 내주도록 만드는 상황으로까지 연결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선덕여왕 #비담 #용춘 #을제 #수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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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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