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선덕여왕> 속 비담.
MBC
1일 방영된 드라마 <선덕여왕> 제56부에서는 명장 김유신이 모함을 받아 투옥된 사이에 설원이 유신의 군대를 이끌고 나갔다가 백제군에게 대패하여 유신이 '수군통제사'로 재기용됐다는 '신라판 이순신' 같은 이야기가 전개되는 가운데에, 한편에서는 비담이 나라가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선덕여왕에게 강렬한 눈빛을 날리며 구애작전에 박차를 가하는 장면이 묘사되었다.
비담의 애정공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적정 수위를 넘어섰다. 'MBC 카메라들'이 지켜보고 있는데도, 비담은 틈만 나면 여왕에게 끈끈한 눈빛을 보내고 여왕의 손등에 살짝 손을 얹어 보고 어떤 때는 아예 대담하게 여왕을 끌어안기도 한다.
지난 달 30일에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한 <성희롱 시정권고 사례집> 제2집에서는 "상대방의 손바닥을 손가락으로 긁는 행위는 비공식적으로나마 성관계의 제의를 의미한다고 널리 인식되고 있다"며 이런 행위 역시 성희롱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판단했다. '다행히' 비담은 여왕의 손바닥이 아닌 손등에 스킨십을 했다. '성희롱 논란'을 피해가며 애정공세를 계속하는 그 절묘함에 찬사를 보내야 할 것인가.
신하인지 스토커인지 도통 분간할 수 없는 비담의 애정공세 앞에서 여왕 덕만은 그저 '대략난감'할 뿐이다. "연모는 날아가는 새에게나 줘라"는 미실의 말을 "연모는 참으로 따뜻하고도 한가한 단어"로 변용하여 비담의 접근을 차단하는 덕만. 그러나 이따금씩은 비록 일순간이나마 여자가 되기도 하는 덕만. 흔들리는 갈대만큼이나 그의 마음도 그렇게 흔들리고 있을까.
끈적끈적 애정공세 비담, 실제로도 그랬을까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끊임없이 묘사되고 있는 비담의 애정공세. 과연 실제로도 그런 일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을까?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고 하지만, <선덕여왕>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비담-덕만의 애정문제를 보면서 역사 속의 비담 역시 정말로 그랬을까 하는 의문을 이따금씩 갖지 않을 수 없다.
비담은 <삼국유사>에는 전혀 나오지 않고 <삼국사기>에만 네 번 언급된 인물이다. 한편,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한 번 언급된 인물이다. <삼국사기>에 4회 언급되었다고는 하지만, 상대등 임명 건(1회)과 쿠데타 건(3회)과 관련하여 언급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의 인적사항이나 인간관계 같은 것은 명확히 알아낼 길이 없다.
하지만, 한 가닥 희망은 있다. 비담이 상대등에 임명된 사실로부터 '수사'에 착수하다 보면, 뭔가 중요한 단서가 잡힐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선덕여왕 시대(632~647년)에 총리급인 상대등 혹은 그에 상응하는 자리에 오른 인물은 모두 3명이다. 을제, 수품, 비담이 그 주인공들이다. 을제는 상대등이란 타이틀을 갖지는 않았지만, 여왕 1년(632) 2월에 국정총괄의 책임을 맡았다. 수품은 여왕 5년(636) 1월에 상대등이 되었다. 문제의 비담은 여왕 14년(645) 11월에 상대등에 올랐다.
이 3건의 총리급 임명 중에서 가장 큰 국제적 관심을 끌었던 것은 을제의 경우였다. 이것은 중국의 역사서에까지 기록될 정도로 '대단한 사건'이었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한 1145년으로부터 꼭 2백 년 전인 945년에 중국에서는 <구당서>가 완성되었다. 907년에 멸망한 당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원래는 <당서>라고 불려야 하지만, 1060년에 완성된 <신당서>와 구별하기 위해 <구당서>라고 부른다. 이 <구당서> 권197상(上) 신라열전에 "진평이 죽어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 딸 선덕을 세워 왕으로 삼고 종친 대신 을제가 국정을 총괄했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의 정사(正史)에 수록된 외국 열전에는 중국과 관련된 필수적인 내용들이 주로 기록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웃나라의 총리급 인사이동 같은 것은 별로 화젯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런 경향을 고려할 때에, 을제가 국정총괄 책임을 떠맡은 사실이 <구당서>에 기록됐다는 것은 그 인사이동이 국제적으로 큰 관심을 끌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것이 국제적 관심거리가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