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궂은 한자말 덜기 (88) 표현

[우리 말에 마음쓰기 810] '-라고 표현했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다듬기

등록 2009.12.04 15:46수정 2009.12.04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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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라고 표현했어

 

.. "방금 넌 자신을 '저 같은 남자'라고 표현했어. 앞으로는 조심해." "예? 앗." ..  《오자와 마리/서수진 옮김-PONG PONG (3)》(대원씨아이,2009) 37쪽

 

 '자신(自身)'은 그대로 두어도 되나 '스스로'로 다듬어도 됩니다. "앞으로는 조심(操心)해"는 "앞으로는 잘못하지 마"나 "앞으로는 살펴서 말해"나 "앞으로는 똑바로 해"로 다듬어 봅니다.

 

 ┌ -라고 표현했어

 │

 │→ -라고 말했어

 │→ -라고 얘기했어

 │→ -라고 했어

 └ …

 

 한자말 '표현'은 '겉 表 + 나타낼 現'입니다. "겉으로 나타낸다"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우리 말로는 '나타내다'일 뿐인데, 이렇게 말뿌리를 살피면서 우리가 올바르고 알맞게 쓸 말이란 어디에 어떻게 있는가를 살필 줄 아는 분은 대단히 적습니다.

 

 ┌ 나타내다 / 드러내다 / 보여주다 / 알리다 / 선보이다 / …

 └ 말하다 / 이야기하다 / 들려주다 / 꺼내다 / 밝히다 / …

 

 우리 스스로 우리 말로 어떻게 나타내야 좋을지를 잊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글로 어떻게 적어야 할는지를 잃습니다. 우리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으니 잊을밖에 없습니다. 우리 넋으로 생각하지 않으니 잃을밖에 없습니다.

 

 그때그때 올바르게 쓸 말을 놓치고, 이곳저곳 알맞게 넣을 글을 모릅니다. 뭉뚱그리는 말과 흐리멍덩한 글만 떠돕니다. 어줍잖은 말과 어설픈 글만 판칩니다.

 

 기쁘고 환하게 나눌 말이란 자리잡지 못합니다. 즐겁고 맑게 주고받는 글이란 뿌리내리지 못합니다. 반갑고 아름다이 오가는 이야기는 태어나지 못합니다.

 

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 나는 나 같은 백인 아닌 한 남자 곁에 앉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거대한 장관을 지켜보고 있었다 ..  《팔리 모왓/장석봉 옮김-잊혀진 미래》(달팽이,2009) 9쪽

 

 '백인(白人)'은 그대로 두어도 되고, '흰둥이'로 고쳐 적어도 됩니다. "한 남자 곁에"는 "남자 곁에"나 "사내 곁에"로 손질해야 올바릅니다. '한'은 함부로 넣을 수 없습니다. "없을 정도(程度)로"는 "없을 만큼"이나 "없도록"으로 손보고, "압도적(壓倒的)인 거대(巨大)한 장관(壯觀)을"은 "놀랍도록 어마어마한 모습을"이나 "꼼짝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모습을"로 손봅니다.

 

 ┌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

 │→ 말로 나타낼 수 없을 만큼

 │→ 말로 다 할 수 없도록

 └ …

 

 말이나 몸짓으로 어떠한 느낌을 '나타내는' 일을 가리켜 한자말로는 '표현'이라고 적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말뜻이나 말풀이를 제대로 아는 이는 그리 안 많습니다. 우리 스스로 '표현' 같은 낱말은 국어사전에서 안 찾아보기도 하지만, 국어사전에서 이 낱말을 찾아본다 한들 우리 말씀씀이를 바로잡거나 추스르지 않아요.

 

 "말로 나타내는" 일이 '표현'이니까, "말로 표현할"처럼 적으면 올바르지 않습니다. 잘못 쓰는 겹말입니다. 한자말을 쓰고 싶다면 "표현할"이라고 적어야 하며, 굳이 한자말로 안 적어도 되겠다고 여긴다면 "말로 나타낼"처럼 적어 주면 됩니다. 짧게 다듬어 "말로 할"이나 "말할"처럼 적을 수 있고, 느낌을 살리면서 "말로 담아낼"이나 "말로 보여줄"이나 "말로 알려줄"로 손질해 주어도 됩니다.

 

 이 보기글을 곰곰이 헤아려 보면서 우리가 예부터 어떤 말투로 우리 느낌과 생각을 담아내고 있었는가를 돌아봅니다. 모르는 노릇인데, 으레 "이루 말할 수 없도록"이나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처럼 이야기해 오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도무지' 같은 꾸밈말을 앞에 넣기도 했을 테고, '더없이'나 '그지없이'나 '나로서는'이나 '어느 누구도' 같은 말마디를 앞에 살며시 넣기도 했으리라 봅니다.

 

 ┌ 이루 말할 수 없도록

 ├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 도무지 말로 나타낼 수 없을 만큼

 ├ 도무지 말로는 나타내기 어렵도록

 └ …

 

 그리고 또 어떻게 우리 느낌을 나타내 왔을까요? 이밖에 또 어떠한 말씨로 우리 생각을 보여줘 왔을까요? 우리는 우리 말을 얼마나 사랑해 왔을까요? 우리는 우리 글을 어떻게 아끼면서 지내 왔을까요?

 

 국어사전에서 숨죽이고 있는 토박이말을 캐내어 널리널리 살려쓰자고 하는 몸짓 또한 '우리 말 운동'이기는 할 텐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 말결과 말투와 말씨를 알차고 곱게 여미는 데에는 마음을 안 쏟고, '새로운 낱말 지식'을 짜맞추는 데에만 깊이 빠져 있지 않았나 궁금합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쓰는 말마디는 얄궂거나 안타깝지만, 고쳐쓰자고 내놓는 '순화 대상 목록'부터 자꾸자꾸 틀에 박힌 테두리에 머물고 있지 않나 궁금합니다.

 

 우리 말을 살리는 길은 토박이말을 더 쓰는 일에 머물러야 할까요? 우리 글을 가꾸는 길은 한자만 안 쓰면 되는 길에 지나지 않을까요? 우리 말삶을 북돋우는 일은 영어 미친바람만 막으면 될까요? 우리 글삶을 살찌우는 길은 한글날이 국경일이 되고 한글문화관을 큼직하게 올려세우면 이룰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들은 어떠한 매무새로 우리 생각을 말 한 마디에 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우리 아이들 앞에서 우리 스스로 한결 싱그럽고 즐겁고 살갑게 가장 깨끔하고 맑은 글줄로 우리 삶을 적바림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삶이 말이 되도록 힘쓰고, 말이 삶으로 이어지도록 애써야 한다고 느낍니다. 겉치레 삶이 아닌 속가꿈 삶이 되어야겠고, 겉치레 말이 아닌 속가꿈 말이 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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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4 15:46ⓒ 2009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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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말 #한자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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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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