묶음표에 갇힌 한자말 (48) 병(病)

[우리 말에 마음쓰기 811] '설검무舌劍舞'와 '혀칼춤'

등록 2009.12.05 14:52수정 2009.12.05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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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병(病)

.. 그의 내면을 어둡게 물들였을지도 모르는 어떤 병(病)에 내가 한없이 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이승훈-너의 행복한 얼굴 위에》(청하,1986) 104쪽


"그의 내면(內面)"은 "그 사람 마음"이나 "그이 속마음"으로 손질합니다. '한(限)없이'는 '그지없이'나 '끝없이'로 다듬습니다.

 ┌ 병(病)
 │  (1) 생물체의 전신이나 일부분에 이상이 생겨 정상적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아
 │      괴로움을 느끼게 되는 현상
 │   - 병이 낫다 / 병이 중하다 / 병을 고치다
 │  (2) '질병'의 뜻을 나타내는 말
 │   - 간질병 / 심장병
 │  (3) 기계나 기구 따위가 고장이 나서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 기계가 병이 들었는지 전혀 작동을 하지 않는다
 │  (4) = 병집
 │   - 소심한 것이 바로 너의 병이다 / 얼렁뚱땅 넘어가는 병
 │
 ├ 어떤 병(病)에
 │→ 어떤 병에
 │→ 어떤 아픔에
 └ …

아픈 사람이 찾아가는 곳은 '병원'입니다. 이 병원을 놓고 '病院'이라고 적어 놓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적는 분이 꽤 되었으나, 이제는 모두들 한글로만 '병원'이라고 합니다.

몸이 아픈 일을 가리켜 '병'이라고 합니다. 병은 '병'입니다. '病'이라는 한자를 모른다고 해서 이 말을 못 알아듣거나 못 나타낼 일은 없습니다. 예전에는 거의 모든 글쟁이가 한자로 '病'을 적었으나, 오늘날에는 "한자를 더없이 사랑하는 글쟁이(와 이런 글쟁이가 많이 있는 신문까지)"들조차 굳이 '病'이라 적지 않고 '병'이라고만 적습니다. 학교를 '학교'라 적으면 그만이지 '學校'처럼 적을 까닭이 없듯, 병은 '병'일 뿐입니다.

 ┌ 병이 낫다 → 아픔이 낫다 / 아픈 곳이 낫다
 ├ 병이 중하다 → 아픔이 깊다 / 몹시 아프다
 └ 병을 고치다 → 아픔을 고치다 / 아픈 곳을 고치다


때에 따라서는 '아픔'이나 '앓이'로 걸러낼 수 있는 '病'입니다. 이 자리에서는 "어떤 아픔에"로 적어도 제법 어울립니다. 그러나 굳이 '아픔'이나 '앓이'로 고쳐써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간질앓이'나 '심장앓이'처럼 고쳐쓰는 일도 괜찮고, '간질병'이나 '심장병'처럼 그대로 쓰는 일도 괜찮습니다.

더 따지고 보면, 우리들 누구나 '간질병'이지 '癎疾病'이 아닙니다. '심장병'이지 '心臟病'이 아니에요. 다만, 오늘 우리들은 이렇게 한글로 '간질병-심장병'처럼 적고 있는데, 앞으로 스무 해나 쉰 해가 흐른 다음에는 '간질앓이-심장앓이'로 바뀔 수 있습니다. 백 해나 이백 해가 지난 다음에는 아예 '간질'과 '심장'마저 좀더 살갑게 다듬어 낼 수 있습니다.


ㄴ. 설검무舌劍舞

.. 그가 나에게 협객의 외로움을 토로하면 / 비장의 설검무舌劍舞를 추어 / 그를 위무한다 ..  《서정민-망가진 기타》(삶이보이는창,2006) 46쪽

보기글을 손대기는 어렵습니다. 다른 글도 아닌 시 문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몇 군데 살짝 건드려 주고 싶습니다. "협객의 외로움을 토로(吐露)하면"은 "협객다운 외로움을 내뱉으면"이나 "협객으로서 외로움을 털어놓으면"으로 건드려 놓고, '비장(秘藏)의'는 '숨겨 둔'이나 '감춰 놓은'으로 건드려 봅니다. '위무(慰撫)한다'는 '달랜다'나 '어루만진다'로 건드려 주고요.

 ┌ 설검무 : x
 ├ 설검(舌劍) : 칼과 같이 날카로운 혀끝이라는 뜻으로, 남을 해하려는 뜻이
 │   담긴 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검무(劍舞) = 칼춤
 │   - 검무를 추다
 │
 ├ 설검무舌劍舞 (x)
 └ 혀칼춤 (o)

'설검'은 '칼과 같은 혀'이고, '검무'는 '칼춤'이라고 합니다. 국어사전에 '설검무'라는 낱말은 안 실려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 한자말은 시 쓰는 분이 남달리 지어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를 쓴 분은 두 가지 낱말 '설검'과 '검무'를 더한 '舌劍舞'를 읊습니다. 혀로 추는 칼춤이라는 소리이고, 칼춤과도 같은 혀라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왜 '설검무'여야 할까요? 아니, 이 시에서는 더더구나 '설검무舌劍舞'여야 할까요? 시를 쓴 분이 한글로 '설검무'라고 적어 놓을 수 없는 까닭은, 당신 시에서 '설검무'라고만 적으면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시쓰기란 말로 빚어내어 이루는 아름다운 잔치라고 하는데, 이와 같은 시쓰기는 얼마나 아름다운 말잔치가 될 수 있을는지요?

 ┌ 숨겨 놓은 혀칼춤을 추어 / 그를 달랜다
 ├ 감춰 놓은 혀칼춤을 추어 / 그를 어루만진다
 ├ 깊이 묻어 둔 혀칼춤을 추어 / 그를 다독인다
 └ …

우리네 시쟁이들이 조금 더 생각을 기울여 우리 말맛을 사랑해 주면 좋겠습니다. 우리네 시꾼들이 조금 더 마음을 쏟아 우리 말멋을 살려 주면 고맙겠습니다. 우리네 시님들이 조금 더 넋을 실어 우리 이야기꿈을 펼쳐 주면 반갑겠습니다.

어설프게 주저앉는 말놀이가 아니기를 바랍니다. 어줍잖게 뇌까리는 말재주가 아니기를 바랍니다. 어리숙하게 용두질하는 말다툼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말로 이루는 놀라운 예술이 되기를 꿈꿉니다. 말로 이끌어내는 아름다운 문화가 되기를 꿈꿉니다. 말로 보여주는 슬기로운 삶이 되기를 꿈꿉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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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묶음표 한자말 #한자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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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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