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지하철 '바바리맨'이 됐나

[동행취재] 서울광장 조례개정을 위한 주민발의 서명운동... 아직 8000명 부족

등록 2009.12.17 12:22수정 2009.12.17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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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조례개정 서명운동, 저도 했습니다 참여연대는 서울광장 이용 조례개정을 위한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서명은 19일까지 진행된다. 총 8만1000여 명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 ⓒ 참여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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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5호선에서 감시요원을 만났다. 이 감시요원은 합법적인 서명운동임을 확인한 후 자리를 떴다. ⓒ 박상규


남은 시간은 3일. 필요한 건 만 19세 이상 서울시민 8000명의 서명. 서울광장은 이미 차벽으로 둘러싸인 공터 혹은 정부 홍보행사를 위한 마당으로 전락한 상황. 서울광장을 이대로 둘 것인가, 아니면 시민의 품으로 되찾아 올 것인가. 

서울광장의 운영조례를 바꾸는 시민조례개정 청구운동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오는 19일, 조례개정 발의인 서명용지를 서울시청에 넘겨야 한다. 조례개정 청구가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서울에 거주하는 유권자의 1%인 약 8만1000명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

시민조례개정 운동을 이끌고 있는 참여연대는 16일까지 약 7만3000명의 서명을 받았다. 19일까지 총 8만1000여 명의 서명을 받지 못하면 지난 6월부터 약 6개월 동안 진행해 온 조례개정 운동은 무위로 끝난다.

이 운동의 핵심은 현행 서울광장 이용 허가제를 신청제로 바꾸는 것이다. 광장을 이용하는데 왜 굳이 오세훈 서울시장의 허락을 받아야 하느냐는 문제제기도 포함돼 있다.

어쨌든 서명 인원은 다 차지 않았는데 시간은 잘도 흐른다. 묘수는 없다. 결국 참여연대는 '지하활동'을 선택하고, 모든 조직원을 지하로 투입했다. 오전과 낮 시간에 지하철에서 서울광장 조례개정 필요성을 설명하고 시민들에게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 '지하활동'은 이미 지난 11월말에 시작됐고, 최근엔 거의 모든 간사들이 매일 지하철에서 서명을 받고 있다.

15일 하루 동안 참여연대의 '지하활동'을 동행 취재했다.

[오전 10시 참여연대 대책회의] 조당 250명씩!


이재근 참여연대 행정감시팀장이 회의를 진행한다. 이날의 목표량이 정해졌다. 5명씩 5개조로 나눠 지하철을 돌고, 조당 250명씩 서명을 받아오기로. 그래봤자 총 1250명이다. 1만 3000여 명(15일 기준)이 부족한데 목표량이 너무 적은 것 아닌가?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설명이다. 사람들이 붐비는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에서 서명을 받으면 민폐다. 그 시간을 제외하고 낮 시간에 서명을 받는 게 결코 수월하지 않다는 말이다.

이재근 팀장은 "오늘 잘하면, 부족한 서명인원이 1만 명 밑으로 떨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이 떨어지자 간사들은 "와~!"하는 탄성을 지르며 손뼉을 친다. 이제 지하활동 돌입이다. 250명을 채우지 못하면 지상으로 나오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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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이 피켓을 펼쳐 들고 시민들의 서명 동참을 호소하고 있다. ⓒ 박상규


[3호선 경복궁역부터 7호선 노원역까지] 새로운 '바바리맨'의 탄생

지하활동에도 나름의 법칙과 흐름이 있다. 서명용지를 무조건 들이밀면 안 된다. 그리고 물건을 파는 상인을 만나면 그 지하철에서 내리는 게 답이다. 이미 상인이 한 차례 훑었는데 또 서명을 부탁하면 시민들이 다소 귀찮아하기 때문이다.

오전 11시 무렵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수서 방면으로 향하는 지하철 맨 뒷칸에 오른 5명의 조직원이 드디어 활동을 시작한다. 이태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이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다 갑자기 일명 '바바리맨'처럼 접혀 있던 흰 피켓을 확 펼친다.

여기에는 "서울광장, 누구의 것일까요?"라고 적혀 있다. 차벽에 둘러싸인 텅 빈 서울광장 사진도 붙어 있다. 이 처장이 지하철에서 한 5년쯤 장사를 한 상인처럼 부드럽지만 커다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시민 여러분, 잠시 소란을 피우게 돼 죄송합니다."

꾸벅꾸벅 졸던 사람은 깜짝 놀라 눈을 뜨고, 신문을 보던 이는 고개를 돌리며, 멍하니 앞을 보던 이도 이 처장을 바라본다. 시민들의 눈길을 잡아끄는 데는 일단 성공. 살짝 부담스러운 상황이지만, 이 처장은 지체 없이 최대한 부드럽게(?) 말을 이어 나간다.

"저희는 참여연대라는 시민단체에서 나왔습니다. 이렇게 지하철에 선 이유는 시민들의 서명을 받아 서울광장 조례를 개정하기 위해서입니다. 현재 서울광장에서는 시장의 허가를 받은 행사, 4대강 사업 홍보 같은 관제 행사 등만 열리고 있습니다. 시민의 광장이 서울시청의 안마당이 돼버렸습니다.

광장은 미우나 고우나, 즐거운 행사든 아니든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역동적인 공간이 돼야 합니다. 서울광장은 누구의 것일까요? 잘 아시겠지만 지난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때 서울광장은 닫혔습니다. 하지만 서울시장이 허락한 문화행사는 열렸습니다. 시민 여러분의 참여가 있으면 서울광장을 다시 자율적인 공간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 처장이 설명하는 동안 나머지 네 명은 서명용지와 펜을 들고 시민들에게 서명을 부탁한다. 시민이 내리기 전에, 그리고 짧은 시간 안에 다시 조례개정의 필요성을 설명한다. 책을 보던 한 시민이 "주민번호도 꼭 적어야 돼요?"라고 김성진 간사에게 묻는다.

김 간사는 "주민번호는 나중에 신원확인을 위해 꼭 필요하구요, 서울시 제출 외에는 절대 외부로 유출되거나 하지는 않는데...."라고 열심히 설명한다. 하지만 시민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됐어요, 안 해요"라고 고개를 돌린다.

김 간사는 재빨리 옆에 앉은 30대 중반의 남자를 탐색(?)한다. 귀찮은 것일까. 이 남자, 두 눈을 감고 잠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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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광장 이용 조례개정 발의 서명에 참여하고 있는 시민들. ⓒ 박상규


[7호선 노원역] "<한겨레21> 읽고 있으면 100%"

김 간사와 손연우 간사는 불과 일주일 전에 참여연대에 들어왔다. 하지만 지하활동은 벌써 네 번째다. 종일 서서 지하철을 도는 게 쉽지 않다. 그래도 벌써 나름의 노하우가 생겼다.

"우선, 할아버지들은 호응이 적은 편이구요. <한겨레21> 같은 주간지를 읽고 있는 시민들은 거의 100% 서명을 해줘요."

경복궁역에서 지하철에 올라 충무로역에서 4호선으로 환승해 다시 북쪽으로 향한다. 그리고 노원역에서 7호선으로 환승해 다시 남쪽으로 내려간다. 노원역에서 중간 점검을 실시한 결과 총 33장의 서명을 받았다. 시간은 오전 11시 38분.

5명이 약 40분 동안 활약한 결과치고는 실적이 좋지 않다. 이태호 처장은 "그 시간이면 4호선 평균은 적어도 50장은 돼야 하는데"라며 동료들을 독려한다. 이어 "서명 250장 못 채우면 지상에 있는 집에 못 들어가"라고 '협박'도 한다.

단 3장으로 실적이 저조한 김민수 간사는 "옷차림이 신뢰를 주지 못하나?"라며 옷매무새를 고친다. 박효주 간사는 "금방 할 수 있어!"라며 김 간사를 위로한다.

[7호선 노원역에서 2호선 건대역까지] 드디어 '그분'을 만나다

손연우 간사는 대학원에서 비교정치학을 전공했다. 한국국제협력단 활동을 하며 버마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손 간사는 서명을 받을 때 다소 부끄러움을 타는 편이다. 설명도 조근조근 한다.

손 간사가 하계역 부근에서 한 시민에게 서명을 받았다. 그런데 표정에 아쉬움이 남아 있다. 이유가 있었다.

"친절하게 서명해 주셨는데, 경기도민이네요.(웃음)"

서울광장 시민조례개정 발의엔 서울시민만 참여할 수 있다. 그것도 유권자여야 한다. 인터넷 서명은 안 된다. 인터넷에서 서명용지를 내려받아 작성할 수는 있지만, 팩스나 이메일로 보낼 수는 없다. 직접 전달하거나 우편을 통해야 한다. 6개월 동안 약 7만 명의 서명을 채우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손 간사가 다소 부끄러움을 타듯이 사람마다 서명 받는 방식이 다르다. 명광복 시민참여팀장은 과감하게 들이대는 스타일이다. 서명용지를 펼쳐들고 시민과 눈을 마주치며 바로 돌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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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광장 이용 조례개정 발의 서명에 참여하고 있는 시민. ⓒ 박상규


반면 박효주 간사는 "서명을 잘해줄 것 같은 사람을 집중 공략"하는 스타일이다. 박 간사의 주요 '고객'은 20~30대 여성이다. 실제 나이보다 동안이고 피부도 하얀 김민수 간사는 일단 시민을 향해 웃고 본다.

태릉역에서 먹골역으로 가는 길에 드디어 '그분'을 만났다. 60대의 '그분'은 서명을 받는 간사들에게 조용히 타일렀다.

"이게 무슨 짓이야?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어! 옛날에 비하면 많이 좋아진 세상이잖아! 데모를 얼마나 더 하려고 하는 거야! 추운데 그냥 다들 어서 집에나 들어가!"

낮 12시 20분이 넘은 시간. 건대입구역에서 다시 점검해보니 총 66장의 서명을 받았다. 김민수 간사가 "건대왕돈가스 유명한데"라며 입맛을 다신다. 하지만 다른 동료들은 별 반응이 없다. 이젠 2호선을 타고 다시 출발이다.

[2호선 건대입구역에서 충정로역까지] 기자, '지하활동'에 도전하다

출발하기 전 이태호 처장이 다시 동료들을 독려한다.

"연우씨는 너무 부끄러움을 타고, 민수씨는 열심히 하는데 '아웃풋'이 별로야. 그리고 명 팀장은 너무 들이대는 것 같아.(웃음) 너무 들이대면 별로고, 그렇다고 안 들이대는 것도 문제야."

명광복 팀장이 "들이대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라며 웃는다. 다른 간사들도 "어렵네"라며 고개를 흔든다. 다시 출발. 점심은 시청역 주변에서 하기로 했다.

뚝섬에서 지하철 상인을 만났다. 일단 내리는 게 답이다. 다음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승객이 너무 많으면 그냥 보낸다. 좌석은 꽉 차 있고, 약 10여 명이 서 있는 지하철 칸이 서명을 받는 데 제격이다.

왕십리역부터는 기자도 '지하활동'에 직접 도전해 봤다. 즉석에서 진행한 '기자가 뛰어든 세상'인 셈이다. 수첩을 덮고 서명용지를 펼치니, 먼저 눈앞이 캄캄하다. 스스로 검열을 하듯, 사람들의 얼굴을 살핀다. '저 사람은 좀 온화해 보이니 해줄 것 같고, 저 여자애한테 서명해달라고 하면 치근덕대는 줄 알겠지?' 등등. 짧은 순간에 별 생각을 다 한다.

"저, 서울광장 조례개정을 위한 서명을 받고 있는데요."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시민이 "예? 뭐라고요?"라고 물으면 말은 더 꼬여 버린다.

"요즘 광장 이용이 좀 그렇잖아요? 스노보드 행사 같은 것만 열리고..."

열심히 설명했더니 이 남자 "나 그거 재밌게 봤어요"라고 답한다. 일단 그냥 '패스'. 옆에 앉은 40대로 보이는 남성에게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남자, 손을 흔들며 그냥 고개를 돌려 버린다. 내 얼굴은 조금 빨개진다. 이런 나를 보고 뭐가 그리 좋은지 김민수 간사가 실실 웃는다. 충정로역에 도착할 때까지 난 단 3명의 서명을 받았다. 그것도 아주 힘겹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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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는 현재 지하철에서 서울광장 이용 조례개정을 위한 서명을 받고 있다. ⓒ 박상규


[5호선 충정로에서 공덕역까지] 어르신들의 격렬한 논쟁

가장 무섭다는 일명 '보수 노인'들을 공덕역에서 만났다. 그것도 여러 명. 먼저 한 노인이 큰 목소리로 포문을 열었다.

"무슨 자율적인 광장 이용이야! 데모질이나 자유롭게 하려고 하지? 당장 여기서 내리지 못해! 순 빨갱이들!"

이 말이 떨어지자 노약자석에 앉은 한 70대 노인도 가세했다. "빨갱이"라는 말이 난무하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참여연대 간사들은 "데모질이나 하려는 좌파세력"이 됐다.

일단 옆 칸으로 후퇴. 하지만 이번엔 노인들끼리 논쟁이 붙었다. 노약자석에 앉은 한 노인은 "왜 무조건 빨갱이라고 그러는 거야! 생각이 다를 수 있지!"라고 앞 좌석의 노인을 타박했다.

타박을 받은 노인도 지지 않고 "뭐? 빨갱이들의 속성을 모르는 거야? '나 빨갱이야', 이렇게 이름 써 붙이고 다니는 줄 알어?"라고 받았다. 간사들은 공덕역에서 내렸지만 지하철 안에서 노인들은 여전히 서로 삿대질을 하며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서명은 5호선을 왕복으로 왔다갔다 하다가 오후 4시 40분께 광화문역에서 끝났다. 250장을 채우는 데 5시간 넘게 걸렸다. 5시간 만에 맛본 지상의 공기는 차갑지만 상쾌했다.

참여연대 간사들은 "시간이 얼마 없는데, 꼭 8만1000명을 채워 광장 조례개정을 위한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으면 좋겠다"며 시민들의 관심과 적극적인 참여를 당부했다.

이날 서명에 참여한 김모(1969년생)씨는 "광장을 잃고 나서야 지난날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그리워졌다"며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민주주의 광장을 시민들이 다시 찾아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8만1000명을 채우기 위해서는 아직 8000명의 서명을 더 받아야 한다.

서울광장조례개정청구운동 바로 참여하기
http://www.openseoul.org/
▶ 서명참여방법
- 서명용지를 [다운로드] 받아 본인은 물론 주변 서울시민의 서명을 받아 사무국으로 보내주세요
- 보내실 주소 : 110-043 서울시 종로구 통인동 132번지 참여연대 5층 행정감시센터 앞
- 연락주시면 서명용지를 보내드립니다(전화 : 02-723-5302, 이메일 tsc@pspd.org)
#서울광장 #조례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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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랭은 고양이를, 저는 개를 업고 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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