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에 하얀 '빵모자'를 씌웠나?"

[사진] 첫눈 내린 날 우리마을 풍경

등록 2009.12.19 14:40수정 2009.12.19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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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드디어 우리 마을에도 첫눈이 내렸습니다. 작년에는 11월 19일에 내렸으니까 한 달 가까이 늦게 내렸고, 적설량도 훨씬 적었지만, 산과 들이 하얗게 변해 체면은 세워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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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 방범등에 쌓인 눈. 어렸을 때 같았으면 당장 올라가 눈, 코, 입 등을 멋있게 그려 넣었을 것입니다. ⓒ 조종안


아침에 일어나 세상이 하얗게 변한 것을 보니까 어린아이처럼 엉덩이가 들썩여 못 견디겠더군요. 해서 카메라를 챙기고, 옷도 따뜻하게 입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대문 기둥의 방범등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눈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지요.

사람이 드나드는데 편리하도록 불을 환하게 밝혀주는 등으로만 알았던 방범등에 눈이 쌓이니까 다양한 형체의 상징물로 변하더군요. 소나무와 숯으로 화장해놓지 않아서 그렇지, 눈사람에 하얀 빵모자를 씌워놓은 것 같기도 해서 웃음이 절로 나왔습니다.   

집을 나서니까 나지막한 야산이며 개여울이며 온통 새하얗고, 차가운 공기가 가슴속 폐부까지 파고들어 상쾌했는데요. 흰 눈이 소복하게 쌓인 사일리지 위로 보이는 풍경이 무척 평화스럽게 다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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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앞에서 바라본 건너마을. 사일리지 위로 보이는 건너 마을은 항상 평화스럽고 고즈넉하게 보입니다. ⓒ 조종안


녹았다 얼면 스케이트라도 지칠 눈 쌓인 들녘으로 달려가 뒹굴고 싶었는데요. 고즈넉한 마을, 눈꽃이 만발한 야트막한 뒷산, 하얗게 변한 지붕, 가끔 들려오는 강아지 짓는 소리가 전형적인 한국의 농촌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함박눈이 펄펄 내리면 강아지와 아이들이 제일 좋아한다고 합니다. 어른이라고 다를 게 없지요. 만나자는 사람도 없는데 누군가 만나고 싶고, 자꾸 밖으로 나가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도 첫눈이 내릴 때마다 가슴이 설레는 걸 보면 마음은 아직도 청춘인 모양입니다.


이리저리 뒹구는 노란 은행나무 이파리들 사이로 불어오는 칼바람이 손등을 꽁꽁 얼게 하더군요. 피사체를 발견하고 호주머니에서 카메라를 꺼낼 때마다 감각이 둔해졌는데 입으로 호호 불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오랜만에 내린 눈을 손님처럼 반기며 촬영할 장소를 찾아다녔지요. 

차와 사람이 많이 다니는 지방도는 이미 녹아 있었고, 호젓한 농로와 학교 운동장도 누군가 밟고 지나간 발자국들이 이리저리 나있어 안타깝더군요. 하지만, 게으른 저를 탓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눈이 조금은 녹았지만, 잔디 위에도 눈꽃이 피었고, 벽돌담에도 피었고, 화단에 빨갛게 열린 예쁜 열매 위에도, 녹슨 농기계 위에도 탐스럽게 피어 있었습니다. 측백나무 울타리에도 하얀 눈꽃이 반발해서 온통 눈꽃세상이더군요. 자연이 주는 선물이라는 생각에 고개가 숙여지기도 했습니다.

높이 솟은 나뭇가지에서 한가로움을 즐기는 까치 부부가 유달리 다정하게 보였는데요. 두둥실 피어오르는 뭉게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살은 눈에 부셔서 하늘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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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싸움 하는 아이들. 나포초등학교 운동장에 있으려니까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고픈 충동이 일더군요. ⓒ 조종안


 

나포 초등학교 운동장에 들어서니까, 왠지 외롭게 보이는 미끄럼틀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는데요. 운동회 날 100m 달리기를 하던 꼬마들의 일그러진 얼굴과 400m 이어달리기를 하든 학부모들을 촬영하던 당시 광경이 떠올라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조금 있으니까 수업이 끝난 아이들이 교실에서 나와 시끄럽게 조잘대더니, 가방을 한쪽에 쌓아놓고는 손 시린 것도 모르고 눈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싸움을 하면서도 꼭 '언니', '형'이라고 부르더군요. 다가가 칭찬해주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이 추위도 모르고 눈밭에서 뛰노는 모습을 보니까 문득 영화 '러브스토리'와 '졸업'(sound of silence)이 떠오르고, 주인공이 하얀 눈밭에 넘어지는 장면이 눈앞에 그려져 운동장에 한참 서 있었습니다. 70년대 초 친구와 관람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졸업'의 배경음악 '스카브로의 추억'은 저에게 영원한 명곡으로 남을 것입니다. 닥터 지바고의 하얀 설원과 지바고로 출연했던 오마샤리프 모습, 은은히 울려 퍼지는 '라라의 테마'곡도 생각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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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눈 속에서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생명을 끈질기게 이어가는 잡초. 여름과 달리 보였는데요. 내가 밟았다고 생각하니까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 조종안


촬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남이 낙서하는 것을 보면 따라서 하고 싶은 어린아이 심정이라고 할까요. 저도 남들처럼 눈밭에 흔적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해서 발을 디디니까 발바닥에 눈이 달라붙어 올라오더군요.

그런데 발을 떼는 순간 작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여름의 색깔을 유지한 연녹색의 잡초가 차디찬 눈 밑에서 생명을 유지하려고 몸부림치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자연으로부터 물려받은 생명은 모두 고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밤에는 땅이 꽁꽁 얼어버릴 텐데, 그 속에서 자기 색깔과 생명을 지켜가는 잡초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요. 사과하는 마음으로 추운 겨울을 잘 견뎌나가기를 기원하면서 발길을 돌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첫눈 #우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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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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