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 즈음에 읽어야 할 시... 보따리 풀다

[서평] 김수열 시집 <생각을 훔치다>

등록 2009.12.29 13:39수정 2009.12.29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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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훔치다' 시집 '생각을 훔치다' ⓒ 김강임

혼자서는 갈수 없는 줄 알았다
설운 서른에 바라본 쉰은
손잡아주지 않으면 못 닿을 줄 알았다
비틀거리며 마흔까지 왔을 때도
쉰은 저만큼 멀었다

술은 여전하였지만
말은 부질없고 괜히 언성만 높았다
술에 잠긴 말은 실종되고
더러는 익사하여 부표처럼 떠다녔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몇몇 벗들은 술병과 시름하다
그만 샅바를 놓고 말았다
팽개치듯 처자식 앞질러 간 벗을 생각하다
은근슬쩍 내가 쓰러뜨린 술병을 헤아렸고
휴지처럼 구겨진 카드 영수증을 아내 몰래 버리면서
다가오는 건강검진 날짜를 손꼽는다
          - 책속에서

내숭... 술과 시로 토해내는 건 아닐까 

나이 쉰이면 하늘을 뜻을 아는 나이라 한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즐길 줄 알고, 고뇌까지 껴안을 줄 아는 나이가 바로 나이 쉰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나이 쉰에 내뱉는 말은 곰삭은 맛이 난다. 나이 쉰에 마시는 술은 알코올이 아니라, 자신의 과거를 마시고 주변 사람들의 아픔을 마시는 한 잔의 물과도 같다.

여기 한 시인이 쉰 자신의 희로애락과 제주의 아픔을 노래한 한권의 시집이 있다. 시인 김수열. 그는 1982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하여 <어디에 선들 어떠랴>, <신호등 쓰러진 길 위에서>, <바람의 목례>, 산문집 <김수열의 책읽기>, <섯마파람 부는 날이면>등이 있다. 현재는 '깨어 있음의 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기축년이 저물어 갈 무렵 아침, 시집 한권을 건내 주는 김수열 시인은 평소 말 한마디 붙여본 사실이 없는 사람이다. 그저 지나가면 목례만 나눌 뿐. 뻐쭉한 키에 말을 아끼는 화자는 평소의 내숭을 술과 시로 토해낸 건 아닐까.


"저 인간은 어떤 인간일까"

교직에 몸담고 있으면서 많은 시련을 겪었던 그의 과거가 궁금했다. 그러던 와중에 그가 건 낸 시집을 통해 그의 생각을 훔치고 그를 해부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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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열 시인 김수열 ⓒ 김강임

생각을 훔치는 독자의 공감대

3부로 엮어진 시집은 1부는 '생각을 훔치다'와 2부는 '시가 사라졌다', 그리고 3부는 '차르륵! 차르륵!'이다.

1부 '생각을 훔치다'에서 화자는 자신의 일상에서 얻었던 생각들을 훔쳐 시로 표현하여 독자로부터 공감대를 형성했다. 2부 '시가 사라졌다'에서는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자서전을 쓴 것 같았다. 나이 쉰에 쓰는 자서전은 어떤 내용일까 궁금했다. 3부에서는 '차르륵! 차르륵!'에서는 제주의 자연을 통해 쉰의 나이에 뱉고 싶었던 제주인의 정서와 아픔을 통곡하듯 뱉어 냈다.

차르륵! 차르극! 제주인의 정서와 아픔 담긴 노래

특히 1950년 북촌의 '잔칫날'은 '곱디 운 이밥에 비갈비갈 돗궤기 양껏 먹는 날'로 표현 제주의 정서가 그려져 있다. 더욱이 '서우봉 쑥밭'에 그려진 4·3의 통곡은 시를 읽는 동안 가슴을 쓸어 내려야만 했다.

나이 쉰 즈음에 읽어야 할 시, '생각을 훔치다'는 쉰에서 겪는 사랑과 쉰에서 바라보는 자연, 쉰의 고뇌와 통곡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공간이다.

생각을 훔치다

김수열 지음,
삶창(삶이보이는창), 2011


#생각을 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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