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면 뭐해, 지푸라기라도 잡아야지

전통수공예 열풍의 근원지 태안군 원북면 대기경로당을 가다

등록 2009.12.30 14:39수정 2009.12.30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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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싸리비 충남 태안군 원북면 대기경로당 어르신들은 겨울철 농한기가 되면 어김없이 직접 싸리비와 갈퀴, 왕골자리 등을 만든다. ⓒ 정대희




농한기 시골마을, 경로당으로 모이는 어른신들

일 년 농사가 마무리되는 겨울철 농한기에 시골마을을 거닐다 보면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라고는 짧게 머리를 깎은 벼들이 전부다. 봄, 여름, 가을 그토록 분주하게 농로길을 달리던 경운기도, 아스팔트 위를 점령해 정체현상을 만들어 내던 농기계들도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하물며 시골 마을의 터줏대감 노릇을 하는 농사꾼의 모습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싸늘한 겨울. 시골 마을의 풍경은 참으로 한적하기 그지없다. 도대체 모두들 어디로 사라졌을까?

고요한 시골 마을을 돋보기를 이용해 사물을 자세히 관찰하듯 들여다보면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대개 겨울철이면 농번기에 텅 비어 있던 마을 경로당과 회관 등에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진다.

젊은 사람(시골마을의 경우 60세 이하의 경우를 젊은 사람이라고 부른다)과 특별히 볼일이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나이가 지긋한 70~80대 대부분의 노인들은 경로당과 회관 등에 모여 치매 예방에 탁월한 효과(?)를 보고 있다는 고스톱을 하거나 우리 전통 민속놀이인 윷놀이 등을 하며 하루를 보낸다.

신기한 것은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오전 9~10시 무렵이면 오토바이를 탄 할아버지와 지팡이를 든 할머니들이 어김없이 하나 둘 경로당과 회관 등으로 모인다는 것이다. 경로당과 회관 등에 모인 어르신들은 각각 '할아버지 방'과 '할머니 방'으로 나뉘어 저녁 무렵 집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함께 식사도 하고 놀이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전통수공예의 부활, 짚·싸리 공예 열풍이 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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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골자리 작업 대기경로당의 조세현 할아버지(75세)는 충남 태안군에 짚, 싸리 공예 열풍을 일으킨 일등공신이다. ⓒ 정대희


그러나 최근 몇 년 전부터 충남 태안군내 경로당에는 새로운 놀이문화가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짚과 싸리를 이용해 생활용품을 만드는 짚·싸리 공예다. 가히 전통 수공예의 부활이라고 할 만큼 짚·싸리 공예는 열풍이다.

대한노인회 태안군지부에 따르면 올해 3번째로 개최한 짚·싸리 공예 전시회에는 태안군 8개 읍·면 15개 경로당에서 무려 50여점의 작품이 출품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마저도 2개 경로당이 출품작을 만들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이유로 출품을 포기한 점을 감안할 때 2년 전 10개 경로당에 20개 작품만이 출품됐던 1회 전시회와 비교할 때 꽤나 성장한 모습이다.

짚·싸리 공예 열풍이 시작된 곳은 충남 태안군 원북면 대기경로당. 어떤 매력이 그토록 어르신들을 사로잡았는지 궁금해 열풍의 근원지인 대기경로당을 지난 24일 찾아가 보았다.

경로당 입구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가기 전부터 미닫이문을 통해 새어나오는 시끌벅적한 소리가 적잖은 사람들이 모여 있음을 짐작케 했다. 곧이어 문을 열자 흔히 집에서 거실로 사용되는 공간에 네다섯 명의 어르신들이 둘러앉아 싸리비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눈으로 대략 갯수를 세어보니 수북이 쌓인 싸리비가 대략 10여개는 넘을 듯하다.

이곳 대기경로당이 시골마을에 짚·싸리 공예 열풍을 몰고 온 근원지이지만 이곳에서도 처음 짚·싸리 공예를 시작한 어르신이 있으니 그는 다름 아닌 경로당의 회장직을 맡고 있는 조세현(75) 할아버지다.

처음 짚·싸리 공예를 시작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 조 할아버지는 "요즘 세상엔 버려지는 물건들이 많아 주변에서 흔히 버려지는 것들을 재활용해보자는 생각에 짚과 싸리를 이용해 간단한 생활용품을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서 "쓰레기를 치우기 위해 사용되는 용품들도 결국 쓰레기가 되지만 싸리비를 이용하면 그런 일은 없지"라고 덧붙인다. 저탄소 녹색성장 시대에 걸맞는 친환경적 답변이다.

어르신들, 공예품 재료 얻기 위해 산과 들판으로 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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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골과 할아버지 조웅상(78세)할아버지는 최근 타 지역 경로당에서 호시탐탐 종자보급 기회를 노리고 왕골 종자를 보관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 정대희


대기경로당을 찾는 어르신들은 주변에 위치한 7개 부락에 살고 있는 70여명으로 이중 약 절반에 가까운 어르신들이 짚·싸리 공예품 만들기에 참여하고 있다.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어릴 적 전통 수공예를 배웠지만 세월이 지나고 시대가 변하면서 차츰 익혔던 기술이 노쇠하면서 수공예 기술을 갱신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따라서 장롱 기술인 어르신들의 경우는 주로 만들기가 가장 쉬운 싸리비 만들기에 참여한다. 반면 숙련된 손놀림을 자랑하는 어르신들은 갈퀴와 왕골자리 등 비교적 고급 기술이 필요한 작업이 맡겨진다.

조 할아버지는 "갈퀴는 대나무를 물에 삶은 후 사용하기 적당한 각도로 구부려야 하는데 이때 각 날이 일정하게 필요이상 구부러지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웬만한 정성과 기술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공예품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대나무와 싸리, 왕골 등은 어르신들이 직접 밭에서 재배하거나 주변 산 등에서 얻는 데 재료가 필요한 시기가 도래되면 삼삼오오 모여 낫과 톱 등 장비를 들고 산과 들판으로 향한다. 조세현 할아버지는 "최근에 중국산 제품인 공예품이 대량 판매되고 있어 국산 재료를 사용해 공예품을 만드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모아져 직접 재료를 재배하거나 주변에서 얻고 있다"고 말했다.

어르신들 가운데 조웅상(78) 할어버지는 경로당에서 공예품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집 앞 작은 면적을 할애해 왕골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조웅상 할아버지의 임무는 왕골 종자를 보관하는 중요임무를 맡았다.

대한노인회 태안군지부에 따르면 최근에 왕골 종자를 얻으려 하는 주변 경로당의 문의가 이어지고 있어 내년부터는 왕골자리를 만드는 경로당의 수가 늘어날 듯하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최근 조웅상 할아버지의 왕골 종자를 얻기 위해 호심탐탐 기회를 엿보는 경로당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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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손, 희망의 손 경로당 어르신들은 자신들이 직접 만든 공예품을 대부분 기증하지만 일부 판매해 수익이 발생하면 인근 초등학교와 불우이웃 성금으로 기증한다. ⓒ 정대희


공예품 판매수익, 장학금 및 성금으로 전달

어르신들이 만드는 공예품 가운데 가장 기간이 오래 걸리는 작품은 왕골자리로 대략 한 사람이 작업을 할 경우 15일이 걸린다. 이는 비교적 작업이 어려운 갈퀴가 하루 5개 정도 만들어진다고 하니 꽤나 오랜 정성과 노력이 필요한 작품인 것이다. 요즘 세상에 왕골자리를 찾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 싶겠지만 조 할아버지의 귀띔에 의하면 대도시에서 주문이 솔솔치 않게 들어오고 있어 판매까지 하고 있다고 한다.

어르신들은 올해부터 새로운 공예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김 또는 파래 등을 말릴 때 사용하는 발을 만들어 인근 바다에서 생산되는 파래를 말려 '파래김'을 판매한다는 계획이다. 이렇게 공예품을 판매해 얻은 수익은 경로당 운영비를 제외하고 인근 초등학교에 장학금으로 전달하거나 불우이웃돕기 성금 등으로 사용한다.

조세현 할아버지는 "대부분의 공예품을 기증하다보니 판매수익이라야 얼마 되지는 않지만 매년 인근 초등학교에 장학금을 전달하고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지출하고 있다"며 "우리들(어르신들)은 공예품 만들면서 무료함도 달래고 건강도 챙길 수 있어 좋고 아이들과 어려운 이웃은 희망을 품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 아닌가"라며 흐뭇한 미소를 머금는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한낱 지푸라기가 어르신들의 손에 닿으면 훌륭한 공예품으로 변하듯 쓸쓸하게만 보이던 시골 마을의 풍경이 한없이 따뜻해 보인다.
#태안군 #경로당 #수공예품 #싸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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