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부재를 견디지 못한 소녀의 자살

<우아한 거짓말>

등록 2010.01.05 08:04수정 2010.01.05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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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거짓말 소녀의 죽음으로 우아함으로 포장된 거짓말의 실체가 하나씩 드러난다. ⓒ 창비

▲ 우아한 거짓말 소녀의 죽음으로 우아함으로 포장된 거짓말의 실체가 하나씩 드러난다. ⓒ 창비

"도무지 엄마랑은 말이 안 통해!" "엄마는 몰라도 돼!"라며 가능하면  엄마와 말을 섞지 않게 되었던 때가 중학교 무렵이었던 것 같다. 엄마와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느낌, 아니 그 누구와도  말이 안 통한다는 답답한 느낌, 그 암담했던 사춘기 시절 외로움으로부터 나를  견디게 만든 것은 책이었다.  그나마 지금처럼 드러내놓고 누군가를 왕따 시키는 일이 없던 시절을 산 덕분에 그럭저럭  친구에 집착하지 않고 학창시절을 견뎌냈다.

 

소통 부재의 외로움을 혼자 견디다 못해 자살한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 <우아한 거짓말>은 <완득이>의 작가 김려령 신작 소설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중학교 1학년까지 교묘한 방법으로 같은 반 친구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천지라는 소녀가 자살을 한다. 천지는 다섯 개의 실 뭉치에 자살 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외롭고 힘들었던 상황을 알 수 있는 메모를 남겨 놓는다. 천지의 언니 만지는 다섯 개의 실뭉치에서 하나씩 발견되는 메모를 통해  동생 천지가  감내한 외로움과 고통을 이해하게  된다. 소통 부재를 견디지 못한 외로운 소녀 천지는 소통 부재의 시대를 힘들게 견뎌내고 있을 수많은 천지를 곁에 둔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일깨운다.

 

천지를 자살하게 만든 아이는 뜻밖에도 천지와 가장 가까워 보였던 화연이라는 아이, 천지의 엄마를 따라다니던 건달의 딸 미란, 그리고 무심한 언니인 만지, 두 딸을 먹여 살리느라  따뜻한 관심을 쏟지 못했던 엄마 등  가장 가까운 주변의 모든 이들이다. 직접 자살 원인을 제공한 화연은 4학년 때 전학 온 천지에게 맨 처음 말을 걸어 준 아이다. 자기가 왕따 되는 것이 두려워 다른 아이를 왕따로 만드는 영악한 화연에게 착하고 인내심 많은 천지는 새롭게 얻게 된  하나의 먹잇감에 불과했다.  중국집 딸 화연은 다른 아이들은 2시에 생일초대를 하면서 천지에겐 3시에 오라고 해 찌꺼기 음식을 먹이고 실수인척 하는 등 가지가지 교묘한 방법으로 천지를 괴롭히고 소외시킨다. 괴롭힘과 왕따를 당하면서도 꿋꿋하게 견뎌내는 어른스러운 천지가 얄미운 화연은 어떻게 해서든 천지가 굴복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그런데 천지가 어느날 자살을 하고 지난날의 흔적이 아이들에게서 들춰내진다.

 

아이들에게서 지난날의 흔적이 들춰지고 있었다. 맞장구치며 함께 떠들던 아이들은 이제 증인이 됐고 폭로자가 되었다. 화연은 자신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음을 깨달았다.

'사실대로 말하자...... 따지고 보면 별거 아니잖아.'

온 길을 다시 돌아가 처음으로 가는 것이 그래도 나았다. 다 뒤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작정 담을 탈 수는 없었다. 왕따를 시킨 것도 아니다. 이유야 어쨌든 항상 실패했으니까. 인터넷에 떠도는 영상처럼 잔인하게 때리거나 가두지도 않았다. 그저 장난을 좀 친 것 뿐이다. -책 내용 중-

 

실수인척 때론 위하는 척 우아하게 포장된 비방과 거짓말로 온갖 소문의 근거가 될 이야기들을 풀어 놓은 화연의 모습은 현대인의 굴절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상대를 인정하지 못하는 시기심 가득한 인간, 날카로운 발톱을 숨기고 앞에서 우아한 거짓말을 늘어놓는 수많은 현대인의 모습에 다름 아닌 것이다. 거짓말이 과연 우아할 수 있을까? 아무리 우아하게 포장된 거짓말이라도 상대방이 진의를 모를 수 있을까? 

 

"OO는 착하기는 한데 좀 맹하지 않니?" " XX는 공부는 잘하는데 이기적이야" 등 칭찬으로 교묘하게 포장한 비꼼, 은근슬쩍 깎아내리기식으로 수없이 내뱉었던 나의 질투심과 시기심을 포장한 거짓말들이 떠오르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진다. 나의 우아한 거짓말 속에 숨겨졌던 날카로운 가시는 누구의 심장에 비수가 되어 박혔을까?  가장 가까운  지인들에게 늘  우아함을 가장한 거짓말을 통해 날카로운 비수를 들이대며 산 것은 아닐까?

 

엄마와 말이 통하지 않는다며 소통을 스스로 거부했던 나와 달리, 천지는 엄마를 비롯한 주변인들과 간절하게 소통의 끈을 이어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주변의 그 누구도, 심지어 딸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던 엄마조차도 천지의 간절한 바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것이 비단 소설 속 이야기일까?   아들아이 역시  자기가 속한 사회의 소통 부재에 괴로운 한숨을  몰래 내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름대로 소통 창구를 열어 두었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이 아들아이에게는 사실 말이 통하지 않는 벽창호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들아이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 봐야겠다.

2010.01.05 08:04 ⓒ 2010 OhmyNews

우아한 거짓말

김려령 지음,
창비, 2009


#우아한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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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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