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상처는 영원히 치유되지 않는다

[리뷰] 데니스 루헤인 <신성한 관계>

등록 2010.01.22 16:52수정 2010.01.22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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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관계> 겉표지 ⓒ 황금가지

▲ <신성한 관계> 겉표지 ⓒ 황금가지

사랑하는 가족과 애인이 한 달 간격으로 차례대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 일을 겪으면 당사자는 당연히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충격이 워낙 커서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난 죽음이 마치 사실이 아닌 것 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자신에게 닥친 끔찍한 비극을 현실로 인식하게 된다. 그러면 충격은 슬픔 또는 절망으로 변할 것이다.

 

문제는 이 슬픔이란 감정이 다른 감정들까지 지배한다는 사실이다. 기쁨, 질투, 탐욕, 심지어 사랑까지 모두 슬픔에게 잡혀먹히는 것이다. 결국에는 슬픔만 남게 되고, 슬픔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기력한지 깨닫게 된다.

 

데니스 루헤인의 '켄지 & 제나로 시리즈' 세번째 작품인 <신성한 관계>에서도 그런 비극이 연달아 일어난다.

 

그 주인공은 20대 초반의 여성인 데지레 스톤. 막대한 부를 소유한 아버지 트레버 스톤과 인자한 어머니 사이의 외동딸이다. 부러울 것 하나 없이 자라난 그녀에게 어느날 비극이 넝쿨채 굴러 들어온다.

 

슬픔을 안고 사라진 억만장자의 외동딸

 

동네의 양아치들에게 어머니가 총격을 받아서 죽는다. 그 충격도 잠시 이번에는 아버지가 림프절 암 판정을 받고 시한부인생을 선고 받는다. 얼마 후에는 그동안 사귀어왔던 애인이 물에 빠져 익사한다. 한 달 동안 줄초상을 치른 것도 부족한지, 몇 달 뒤에는 아버지마저 저 세상으로 보내고 고아 신세가 되는 셈이다.

 

데지레 스톤은 세 가지 비극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허물어진다. 먼저 불면증에 시달리고, 몸무게가 급속도로 줄어들었으며, 하루 종일 말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정신과 상담을 권하지만 그 약속도 번번히 깨뜨린다. 그저 하릴없이 다운타운을 혼자 돌아다니는 것이 그녀의 일과다.

 

그러던 어느날 데지레 스톤이 실종된다. 다급해진 트레버는 사립탐정 켄지와 제나로 커플에게 이 사건을 의뢰한다. 켄지와 제나로는 처음에는 거절하려 하지만 거액의 수임료가 그들을 유혹한다. 트레버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 대가만으로 각자에게 2만 달러씩을 주겠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제나로가 트레버의 슬픔에 공감한다. 제나로는 시리즈의 전편인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에서 갱들의 폭력에 전남편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 사건의 후유증으로 켄지와 제나로는 4개월째 일을 안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당연히 거액의 수임료는 그들을 움직이게 할 강력한 동기가 된다.

 

켄지와 제나로는 사건의뢰를 승낙하고 조사에 들어가자마자 이상한 점들을 발견한다. 이 사건을 앞서서 조사했던 사립탐정 제이 베커가 실종된 것이다. 제이는 켄지의 스승이자 실종사건전문 최고의 탐정이다. 그런 제이가 수사도중 사라졌다는 것은 사건의 이면에 뭔가 구린 구석이 있다는 이야기다. 켄지와 제나로 역시 수사를 해나갈수록 관련자들이 자신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확신하는데...

 

실종사건의 진상은 무엇일까

 

작가 데니스 루헤인은 시리즈의 전편에서와 마찬가지로 잔인한 악당들을 등장시킨다. 켄지와 제나로는 별다른 동기없이 자기만족을 위해서 범죄를 행하는 인간들과 다시한번 대결하는 것이다. 싸움의 강도도 더 높아졌다. 달리는 차에서 굴러 떨어지기도하고 땅 속에 파묻히기도 한다.

 

켄지는 트레버에게 '다시는 사람을 죽이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그것도 말처럼 지키기 쉬운 일이 아니다. 켄지와 제나로의 활약상을 알고 있는 트레버는 그들에게 '두 사람은 악과 싸워 이긴 분들'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켄지에 의하면 자신들은 악과 싸워 이긴 것이 아니라 비긴 것이다. 그것도 상처만 잔뜩 남긴 채로.

 

물론 그들 덕분에 많은 미래의 희생자들을 악마로부터 구해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탐정은 그 과정에서 상처받는다.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다보면 보고 싶지 않은 황량한 열병, 도덕적 부패와 마주친다. 자신들을 해칠 추악하고 역겨운 진실과 맞닥뜨리게 될수도 있다.

 

탐정들은 그래서 두려워한다. 악당에게 맞아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아니다. 모든 진상이 밝혀졌을 때, 그 진실이 자신들에게 줄 상처를 꺼려하는 것이다. 타락한 세상속에서 온갖 더러운 인간들을 상대해온 켄지와 제나로도 마찬가지다. 영혼은 육체보다 치유가 느리다. 어떤 상처는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 수도 있다.

덧붙이는 글 | <신성한 관계> 데니스 루헤인 지음 / 조영학 옮김. 황금가지 펴냄.

2010.01.22 16:52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신성한 관계> 데니스 루헤인 지음 / 조영학 옮김. 황금가지 펴냄.

신성한 관계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황금가지, 2009


#신성한 관계 #데니스 루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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