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가 더럽히는 우리 삶 (91) 무브

[우리 말에 마음쓰기 847] '움직여'나 '어서'라 말하지 못하는 교사들

등록 2010.01.28 16:14수정 2010.01.28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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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브(move)

 

.. 나는 빨리 쉬고 싶어서 아이들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자, 종 치겠네. 무브, 무브! 빨리 서둘러!" ..  <고은우,김경욱,윤수연,이소운-이 선생의 학교폭력 평정기>(양철북,2009) 109쪽

 

제 어릴 적을 떠올려 보면, 국민학교 다닐 때 학교 안팎에서 영어를 뇌까리는 동무는 없었습니다. 교실에서고 골마루에서고 운동장에서고 놀이터에서고 영어를 뇌까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야구놀이를 할 때에는 텔레비전 사회자가 영어로 읊던 말마디를 흉내내기는 했습니다. 그무렵에는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텔레비전에서나 '섣불리 함부로 영어를 외는' 일이 퍽 드물었습니다.

 

그러다가 중학교에 접어드니, 처음 영어를 배우는 동무들은 장난삼고 재미삼아 영어를 곧잘 읊습니다. 교사들 또한 우리들 앞에서 영어 낱말을 섞으며 이야기를 합니다. 고등학교에 들어서니, 장난삼거나 재미삼는 영어는 마찬가지로 쓰는 가운데, 여느 말마디로 손쉽게 영어를 섞어서 썼습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퍽 마땅하다는 듯이 영어를 내뱉었습니다.

 

 ┌ move

 │  1a 움직이다, 위치를 옮기다, 이동시키다

 │   b <손발을> 움직이다

 │   c <기 등을> 흔들다;뒤흔들다

 │   d <기계·기구 등을> 시동시키다, 작동시키다, 운전하다

 │  2 감동시키다;감동시켜 …시키다, …할 마음이 일어나게 하다

 │  3 <동의(動議)를> 제출하다;<…할 것을> (동의로서) 제의[제안]하다

 │  4【체스】 <말을> 움직이다, <한 수> 두다

 │  5 <창자에> 변이 잘 통하게 하다

 │  6 <상품을> 팔다, 처분하다

 │

 ├ 무브, 무브! 빨리 서둘러!

 │→ 어서, 어서! 빨리 서둘러!

 │→ 얼른, 얼른! 빨리 서둘러!

 │→ 움직여, 움직여! 빨리 서둘러!

 │→ 가만히 있지 말고! 빨리 서둘러!

 │→ 움직이라고! 빨리 서둘러!

 └ …

 

공부를 마치고 교실을 치우는 아이들 앞에서 "무브!"를 외치면서 얼른얼른 움직이며 일을 끝내라고 외치는 교사 모습을 헤아려 봅니다. 이이는 이런 자리에서뿐 아니라 다른 자리에서도 으레 "무브!"를 외쳤겠구나 싶습니다. 또한, '무브'뿐 아니라 숱한 다른 영어를 손쉽게 외치거나 이야기했겠구나 싶습니다. 그런데, '무브'라고 외면서 '허리 업'을 외지 않은 대목은 놀랍습니다. 앞뒤 아귀를 맞추자면, '무브'에 걸맞는 다른 영어를 외쳐 주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 모두들 빨리 서둘러!

 ├ 놀지 말고 빨리 서둘러!

 ├ 딴청 그만 피우고 빨리 서둘러!

 ├ 딴짓 좀 하지 말고 빨리 서둘러!

 └ …

 

어쩌면, '무브'를 들먹인 교사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할 수 있습니다. 딱히 영어를 쓰려는 마음은 아니었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 앞에서 우스갯소리 삼아, 또는 재미있게 하려고 영어 낱말을 꺼내었는지 모릅니다. 딱딱하게 말하고 싶지 않아서, 아이들 힘을 북돋워 주려고, 서로 사이좋게 쓸고 닦고 치우자면서 '무브'를 찾았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참말 이 말마디를 읊어야 했을까 궁금합니다. 어쩌다가 이 말마디를 읊고 마는지 궁금합니다. 이이는 언제부터 이런 영어 말마디에 익숙했는지 궁금합니다. 이이한테 '무브'라는 말마디를 들은 아이들은 제 삶터에서 어떤 말마디를 쓸는지 궁금합니다. 아이들끼리도,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 자리에서도 스스럼없이 '무브'를 외치지 않을까 궁금합니다.

 

 ┌ 느릿느릿 하지 말고 빨리 서둘러!

 ├ 굼벵이처럼 기지 말고 빨리 서둘러!

 ├ 부지런히 움직이며 빨리 서둘러!

 ├ 구경만 하지 말고 빨리 서둘러!

 └ …

 

어릴 적을 다시 되새겨 봅니다. 그무렵 저나 또래 사내아이들은 오락실을 자주 들락거렸습니다. 오락실 놀이틀은 늘 'game over'나 'the end'라는 말마디가 뜨면서 끝났습니다. 우리들이 따로 어떤 영어 말마디를 들먹이는 일은 없었지만, '게임 오버'나 '더 앤드('디 앤드'가 맞지만, 꼬맹이였을 때 뭘 알았겠습니까)' 같은 말마디는 가끔 읊기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늘 보았으니까요. 늘 보니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니 입에서 저절로 튀어나옵니다.

 

언제나 마주하고 언제나 듣거나 보면 차츰차츰 눈에 익고 귀에 익고 손에 익습니다.

 

바르고 알맞고 살가운 말마디를 늘 들으면 내 마음속에는 바르고 알맞고 살가운 말마디가 자리를 잡으며 익숙하고 맙니다. 얄궂고 뒤틀리고 짓궂고 못난 말마디를 언제나 들으면 내 마음밭에는 얄궂고 뒤틀리고 짓궂고 못난 말마디가 뿌리를 내리며 익숙하고 맙니다.

 

말버릇이 됩니다. 말버릇을 넘어 생각을 하거나 마음을 기울일 때에도 옮아 갑니다. 생각과 마음에서 꼬리를 물고 내 삶자락 어느 곳에서나 흘러넘칩니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말은 괜한 말이 아닙니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은 괜스런 말이 아닙니다. 티끌 모아 큰산이 된다는 말은 괜히 하는 말이 아닙니다. 때와 곳에 따라 다 다르게 받아들이고 돌아볼 말입니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어떤 말마디와 삶자리와 매무새에 익숙해지거나 길들고 있는지 곰곰이 되짚을 노릇입니다. 우리는 우리 둘레 사람들한테 무슨 모습과 말투에 익숙해지도록 하는지 찬찬히 살펴볼 노릇입니다. 우리들 말 한 마디는 큰 기쁨이 될 수 있는 한편, 깊은 어두움이 될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2010.01.28 16:14 ⓒ 2010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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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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