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남선의 삶을 통해본 근대 민족주의의 자화상

[책 속으로 떠난 역사 여행 57] 류시현 <최남선 연구>

등록 2010.02.02 08:35수정 2010.02.02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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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니혼대(日本大)를 졸업하고 학병으로 나갔던 백남권은 이광수, 최남선 등의 메이지대 강연회를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1943년 11월 중순경에 동경의 명치대 강당에서 학병 나가라는 궐기대회가 있었습니다. (…) 우리가 명치대 강당에서 그러한 강연을 듣는데 최남선은 어찌나 열변을 했던지 허리띠가 끊어져버리기도 했습니다. (책 속에서)

최남선. 약관의 나이로 '기미독립선언서'를 집필했던 조선의 젊은 천재인 그가 해방 직전 일본에서 조선인 유학생들 앞에서 학병 지원 독려 연설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일제의 강요에 못이겨 마지못해 끌려가 하는 연설이 아닌 온몸에서 우러나는 열변이었다고 연설을 들었던 당시 유학생들은 회상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일제의 전쟁 수행을 지지하고 미화하는 정치적 글쓰기를 계속했다. 일제가 수세에 몰려 더 이상 전선을 확장하지 못하고 후퇴하던 시기에도 최남선의 글쓰기는 계속됐다. 1944년 <도의(道義)는 이긴다>라는 글을 통해 최남선은 일본의 전쟁이 물질주의, 이기주의, 권력주의, 차별주의, 착취주의적 세계관을 타파하기 위한 도덕적 전쟁이기 때문에 반드시 승리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지극정성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패망했다. 친일 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최남선에게 일본의 패망은 위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남선의 글쓰기는 계속되었다. 반성과 사죄의 글쓰기가 아니라 변명과 자기 정당화의 글쓰기였다.

친일에 대한 변명과 자기정당화의 글쓰기

1948년 10월 각도 학무국장 회의에서 이광수와 최남선의 저서를 학원에서 교과서나 부교재로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의 어느 중학교에서 최남선의 <조선역사>가 사용되어 물의를 빚자 당시 문교부 편수국장 손진태는 "최씨의 저서를 그대로 사용함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해방 공간에서 이광수와 최남선의 책이나 글이 공식적으로 추방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남선의 글쓰기는 멈추지 않았다. 일제시대 출판된 것을 재 발행한 <조선상식>, 국민을 대상으로 한 한국사 개설서 <국민조선역사> 발행, 일제시기 민족운동을 정리한 <조선독립운동소사> 편찬 등 글쓰기와 책 출간은 계속되었다. 무슨 생각에서였을까?


그전부터 이러한(영광되고 부끄러운 - 인용자) 경험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훌륭한 국민 노릇을 하게 하고, 나라로 하여금 빛난 명예를 가지게 하려는 것이 국사 공부의 목적 (…) 역사는 다만 옛날 묵은 일을 알자고 배우는 것 아니라, 진실로 우리가 국민으로서 어떻게 나라에 유조한 일을 하겠느냐 하는 그 길을 알려하는 공부이다. (<성인교육 국사독본> 중 - 책 속에서)

최남선의 책이 교육계에서 사용될 수는 없었지만, 그의 책을 찾는 사람은 여전히 많았다. 해방공간에서 일제시대 침묵했던 다양한 목소리가 표출되던 상황에서 최남선처럼 다양한 주제로 다양한 역사 관련 서적을 저술해서 출간한 예를 찾아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1949년까지도 최남선의 책을 찾는 수요는 꾸준히 이어졌다. 출판업자들은 수요가 있으니 출판을 계속했고, 최남선은 이런 상황을 친일 행위에 대한 변명과 자기 정당화의 명분으로 활용했다. "내가 친일파인가 아닌가는 나의 저서가 굉장히 팔리는 것으로 보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라고 주장하면서.

최남선을 통해 본 근대 민족주의의 모습

a 표지 <최남선 연구>

표지 <최남선 연구> ⓒ 역사비평사

한말 근대를 지향했던 지식인, 3·1운동을 전후해서 민족주의자, 1930년대 중반 친일 인사, 해방 후 대한민국 우파 이데올로그로 활동했던 최남선은 상황 변화에 따라 끊임없는 자기부정을 거듭했다. 그의 삶을 쫓다보면 우리 근현대 지식인들이 살아갔던 삶의 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주어진 상황에 맞서 싸우기도 하지만 끝내 친일과 변절의 길로 뚜벅뚜벅 걸어갔던 지식인, 해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과거에 대한 사죄와 반성보다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지식을 이용해서 변명과 자기정당화를 앞세웠던 인물.

최남선 개인의 삶일 수도 있지만 같은 시대 그와 유사한 길을 걸었던 지식인들 또한 적지 않았다. <최남선 연구>는 최남선의 삶과 학문을 통해 우리 근현대사 속에 남아 있는 근대와 민족주의의 의미를 되짚어본다. 우리의 근대 민족주의의 모습 가운데 버려야 할 바가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덧붙이는 글 | 류시현/역사비평사/2009.7/28,000원


덧붙이는 글 류시현/역사비평사/2009.7/28,000원

최남선 연구 - 제국의 근대와 식민지의 문화

류시현 지음,
역사비평사, 2009


#최남선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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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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