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말 '존재'가 어지럽히는 말과 삶 (54)

[우리 말에 마음쓰기 855] '가장 먼저 사람이 존재하는', '자신의 존재' 다듬기

등록 2010.02.09 15:57수정 2010.02.09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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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가장 먼저 사람이 존재하는

 

.. "귀사 같은 스포츠 메이커는 회사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고객입니다. 가장 먼저 사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메이커는 눈앞의 이윤을 쫓는 것만이 아니라, 고객의 행복을 위한 노력이, 결과적으로 이익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  <다카하시 신/박연 옮김-좋은 사람 (1)>(세주문화,1998) 27쪽

 

'스포츠 메이커(maker)' 같은 말은 워낙 자주 쓰니 그대로 두어야 할는지 모릅니다만, '운동용품 회사'쯤으로 고쳐쓰면 어떠할까 싶습니다. "회사 주위(周圍)의 모든 사람"은 "회사 둘레에 있는 모든 사람"으로 손보고, '고객(顧客)'은 '손님'으로 손봅니다.

 

'메이커'는 '회사'로 다듬으며, "눈앞의 이윤"은 "눈앞에 있는 이윤"이나 "눈앞에 보이는 이윤"으로 다듬고, "고객의 행복(幸福)을 위(爲)한 노력(努力)이"는 "손님을 즐겁게 하려는 땀방울이"로 다듬습니다. '결과적(結果的)으로'는 '마침내'나 '끝내'로 손질하고, "이익(利益)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는 "돈을 벌어들일 수 있습니다"나 "우리한테 도움이 됩니다"로 손질해 봅니다.

 

 ┌ 가장 먼저 사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

 │→ 가장 먼저 사람이 있습니다

 │→ 가장 먼저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 가장 먼저 사람이 우리 둘레에 있습니다

 └ …

 

회사가 돈을 벌어도, 사람이 일을 해서 돈을 법니다. 사람이 물건을 만들고 사람이 물건을 팝니다. 그리고 이 물건을 사람이 사서 사람이 씁니다. 만드는 물건 하나에 들어가는 모든 감은 사람이 거두어들이고 다루고 손질합니다. 회사가 돈을 버는 까닭은 돈을 벌고자 함일 텐데, 돈은 바로 회사를 꾸리는 사람들한테 도움이 됩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회사일이든 사람과 얽히는 일입니다.

 

사람이 있고 회사가 있지, 회사가 있고 사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있은 다음 돈이 있고, 돈이 있은 다음 사람이 있지 않은 흐름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세상은 사람을 앞에 놓지 못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바로 이곳에 있는 사람을 고이 껴안지 못합니다. 늘 곁에 있는 사람을 꾸밈없이 헤아리지 못하고, 언제나 서로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을 느끼지 못합니다.

 

먼저 우리 스스로가 사람임을 느끼고, 우리 가까이 있는 이웃과 식구와 동무 모두 사람임을 느끼며, 우리한테 낯설고 새로운 모두를 똑같은 사람으로 느껴야지 싶습니다. 사람됨을 찾고 사람다움을 가꾸며 사람길을 가야지 싶습니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이 땅에 우뚝 서 있을 때, 사람이 펼치고 사람이 듣는 말이 튼튼해집니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즐거이 어깨동무를 할 때, 사람이 나누고 사람이 함께하는 글이 아름다워집니다.

 

 

ㄴ. 자신의 존재가

 

.. 할머니는 오요시 때문에 집안에서 자신의 존재가 희미해지는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  <시모무라 고진/김욱 옮김-지로 이야기 (2)>(양철북,2009) 210쪽

 

"희미(稀微)해지는 것 같아"는 "흐려지는 듯해"나 "옅어지는 듯해"나 "사라지는 듯해"로 다듬어 줍니다. '자신(自身)'은 그대로 둘 수 있으나, 이 자리에서는 '내'로 손질할 수 있습니다.

 

 ┌ 자신의 존재가

 │

 │→ 자기 모습이

 │→ 내 모습이

 │→ 내 자리가

 │→ 내 그림자가

 └ …

 

우리 자리는 언제 어디에서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옅어지지 않습니다. 흐려지지 않습니다. 지워지지 않습니다. 다만, 다른 이들이 알아주지 않는다 하며 서운하게 느낄는지 모르나, 몇몇 사람이 오래도록 떠올리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 자리가 씻은 듯이 사라진다거나 없는 듯이 흐려지는 일이란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마음을 알뜰히 간직하고 있기만 하면 우리 자리는 늘 그곳에 튼튼하게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네 말과 글 또한 언제나 제자리를 고이 지키고 있지 않느냐 싶곤 합니다. 갖은 비바람에 흔들리고 찌들리고 무너지기도 하지만, 이런 비바람이야 으레 있지 않았냐는 듯이 슬기롭게 버틴다고 할까요. 아니, 버티는 말이 아니라 껴안는 말이라고 할까요. 비가 몰아치면 비를 온몸으로 맞아들이고, 바람이 불어대면 바람을 온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할까요.

 

 ┌ 할머니 당신 모습이 흐려지는 듯해

 ├ 할머니 당신 자리가 사라지는 듯해

 ├ 할머니 당신 그늘이 줄어드는 듯해

 ├ 할머니 당신 그림자가 옅어지는 듯해

 ├ 할머니 당신이 설 땅이 좁아지는 듯해

 └ …

 

글다듬기란 '이런 말은 털어내고 저런 말만 쓰자'는 일이 아닙니다. 가장 싱그러운 말이란 없고, 가장 깨끗한 말투 또한 없습니다. 글다듬기란 '이러할 때에는 이렇게 받아들여 보자'는 일입니다. '저러할 때에는 저렇게 맞아들여 보자'는 몸짓입니다. 이 흐름을 맞아들이고 저 물결을 받아들이면서, 우리가 선 이곳에서 기꺼이 껴안자고 하는 삶입니다.

 

한자말 '존재'를 털어내어 우리 말과 글을 싱싱하고 푸르게 빛낸다는 글다듬기가 아닙니다. 한자말 '존재'를 우리 삶으로 고이 녹여내면서 받아들인다는 글다듬기입니다. 더없이 따뜻하게 바라보고, 그지없이 따숩게 쓰다듬으면서, 우리 삶으로 살포시 삭여내면서 맞아들인다는 글다듬기입니다. 내 하루를 돌아보고, 이웃 한삶을 헤아리면서, 서로서로 즐겁게 어깨동무할 말길을 찾는 글다듬기입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2010.02.09 15:57ⓒ 2010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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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한자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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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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