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감록. 정감록 필사본. 참설과 풍수지리, 도교가 혼재되어 있는 참서
이정근
노성천과 연산천이 만나는 초포를 한눈에 내려다보고 있는 산채는 이심(李沁)과 정감(鄭鑑)이 탐내는 천하의 비지(秘地)였다. 늙은 호랑이가 죽음 앞에 가쁜 숨을 몰아쉬듯이 운이 다한 이씨 왕국이 망하면 양반과 상놈이 없는 세상을 이끌어갈 새나라의 약속된 땅이라는 것이다.
"야, 근데 넌 대장을 보지 않고 어디를 보고 있냐?"
열변을 토하는 권대식을 넋이 나간 듯 쳐다보고 있는 사나이를 털보가 바라보고 있었고 털보의 옆구리를 꺽쇠가 찔렀다.
"나하고 같이 노비 잡으러 밤섬에서 예까지 왔다가 그 노비의 언변에 녹아버려 여기 눌러앉은 저 형님, 침 흘리고 있는 모습 좀 봐라. 내 얼굴에도 침 흐르냐?"
털보가 얼굴을 디밀었다.
"치워라. 털 침에 상판 상하겠다."
"팔도에 밤섬도 하고 많은데 어디 밤섬이냐?"
"삼개 밤섬."
"거기에는 새들만 사는 줄 알았는데 사람도 사냐?"
"이 쉐이가 칵!"
털보가 꺽쇠의 멱을 짚으려 했다.
"지~지송. 내가 실수했어. 밤섬에 사람 산다 하고…."
꺽쇠가 두 손을 비볐다.
물타고 물 빼먹는 짓은 못해먹겠더라"가진 것 없고 기댈 곳 없는 사람들이 물주대신 매 맞아 주고 돈 받거나, 사람 잡아다 패주는 것으로 먹고 살긴 하지만 세곡에 물 부어 화수(和水)해 먹는 놈들보다 낫고 사당년 아랫도리 판 돈 뜯어먹는 모가비보다 떳떳하다."
"조운선도 타보고 사당패도 해봤어?"
"밤섬 천한 것들이 안 해본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물도 부어보고 물 값도 빼먹어 봤지만 그 짓은 못해먹겠더라."
털보가 먼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의 망막에 애비 없는 애 떼려고 독한 약초를 너무 많이 끓여먹어 피를 쏟다 죽어간 화심이의 얼굴이 스쳤다.
"건 그렇고, 노비는 누구냐?"
"난리 통에 노비들은 '살판났다.'고 도망가 버렸고, 전답은 있으나 농사지을 손이 없으니 지주들은 폴짝 뛰다가 까무라쳤고, 재산이나 다름없는 노비들이 도망갔으니 사대부들이 아우성을 쳤고…."
털보가 말끝을 길게 느렸다.
"고, 고, 하지 말고 빨리 말해라."
털보의 입을 바라보던 꺽쇠가 마른침을 삼켰다.
"고녀석 대장간에 메 기다리는 쇳물처럼 성질은 되게 급하네."
꺽쇠를 살피던 털보가 여유를 부렸다.
노비 추포는 송파 것들이 해먹었고 로비 잡는 것은 밤섬 짭새들 몪이었다"도망간 노비를 잡아들이려고 나라에서 추쇄도감을 설치하면 뭐, 그들이 노비 잡아들이는 줄 아느냐? 우리가 잡지."
"네깐 놈들을 뭘 믿고 노비 잡아들이는 일을 시키냐?"
"그러니까 언감생심 원청은 꿈도 못 꾸지."
"그렇게 잡아다 주면 얼마 봤는데?"
"위에서 내려오는 행하야 많겠지만 우리 손에 들어오는 것은 서른냥."
"겉보리 숭년에 서른 냥이면 크네."
"그러니까 처자식 떼어놓고 이렇게 팔도를 싸다니지."
털보가 북녘하늘을 쳐다보았다. 지아비가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여인의 얼굴이 그려졌다 사라졌다.
"너희가 다 해먹느냐?"
"관노비와 사노비 잡아들이는 일은 아름아름 손을 거쳐 송파 것들이 해먹고 청로 잡아들이는 일은 칠패와 삼개를 거쳐 우리들 몫이지."
"청로(淸虜)는 또 무엇이냐?"
"병자년 난리에 청나라로 붙잡혀 간 포로들은 속환을 치러야 풀려나는데 그곳에서 도망 나와 조선에 숨어사는 놈들이 있다 그 말이다. 청국에서 도망포로를 속환하라 호통 치면 나랏님이 고뿔에 걸려 개짖머리 하고, 조정에서 포청에 포로들을 잡아들이라 하면 우리들이 '휭'하고 뛴다 그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 대장이 청로란 말이냐?"
꺽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등짝에 찍힌 불도장도 못 보았느냐?"
산채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권대식의 등판에 새겨진 불도장을 본 사람이 많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