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소설] 동굴 속의 탱고

제 1화 - 보카(Boca)의 입 속으로

등록 2010.03.05 11:14수정 2010.03.06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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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오늘부터 소설을 연재합니다. 형식은 가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판타지 장르이며 소설 속 화자인 '나'를 통해 전개 됩니다. 22세 미대생이 겪는 현실 및 과거, 꿈,책을 통한 가상의 세계를 통해 낯선 세계를 여행하는 기쁨을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이 소설은 실제를 바탕으로 한 허구 입니다.

 

"에잇! 냄새야.하루 종일 넌덜머리 난단 말야."

비 오는 어느 저녁,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 그 동남쪽의 항구 도시 보카(Boca)의 골목길이다.  세계 제1차 대전 후 '아르헨티나 드림'을 좇아 이곳으로 몰려든 노동자 페르도는 이제야 퇴근하고 있다. 더럽고 음습한 공장에서 정어리의 머리와 꼬리를 떼고 캔에 담아서 통조림으로 만드는 것이 그의 하루 일과이고, 그 비린내 나는 일상은 지금 내리는 이 비처럼 청승맞기만 하다. 이제 그는 술 한잔에 근심을 잊을 겸 까미니토 거리 골목으로 들어서려는 참이다. 그런데 때마침 울리는 아코디언 소리가 발길을 붙잡고, 그는 끌리듯 그 열정의 음악을 따라가 바(Bar)의 문을 연다.

 

"어라? 이런 곳이 있었던가?"

페르도는 각종 음식 냄새로 쩔어있는 식당 앞 쪽에서 두 남녀가 몸을 밀착한 채 춤을 추고 있는 것을 보았다. 우아하고 격정적인 춤! 붉은 빛의 스커트 사이로 희멀건 다리를 드러낸 채 스텝을 밟는 여자는 이곳의 종업원이고 남자는 이 골목의 건달이다. 남자가 여자의 허리를 휙 하고 젖히자 좌중에선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와 환호가 울려 퍼진다. 경쾌한 음악의 향연! 악보를 읽을 줄 모르는 단원들을 밤새 연습시켜서 곡을 암보하게 만든 피아니스트는 새 창작곡이 홀을 에워싸자 흡족한 얼굴로 건반을 뚱땅거린다. 이에 따라 음악과 춤, 관객이 일체가 되어 댄스홀은 열광의 도가니가 된다.

 

"꽤 멋진데요." 페르도는 자리에 앉으며 옆자리 노동자에게 한마디 건넨다.

"그렇죠. 아프리카 노예들이 추던 캄돔베, 쿠바 선원들의 무곡인 아바네라, 아르헨티나 목동들의 노래인 플라야다스가 뒤섞여서 탄생한 것이 바로 저 탱고라오!"

페르도는 넋을 잃고 남녀의 춤을 지켜보며 술을 천천히 마신다. 목구멍에서 쏴하게 감도는 술기운은 탱고와 어울려 격정적인 키스를 그의 목구멍에 퍼붓는다.

 

"어이! 안주도 좀 먹어가며 마셔요. 내가 먹던 거라도 좀 드리리다." 

어느 틈에 아까의 남자는 친구라도 되는 양, 테이블로 와서 엠파나다가 담긴 접시를 내민다. 그리고는 자신도 그 고기 만두를 한 입 베어 물며 말을 잇는다.

"당신, 저 춤이 얼마나 비판 받고 있는지 모르죠? 부둣가 하층민이나 추는 더럽고 음탕한 춤이라고 상류사회에서는 무척 멸시를 한다니까..그 대신 상류층 애들 중에 좀 난잡한 것들이 몰래 이 춤을 배우러 술집에 드나들기도 하지. 그 애들이 배타고 여행하면서 외국에다 탱고를 알리고도 있으니 뭐, 일종의 애국인 셈이지. 탱고를 배우겠다고 외국인들이 오기도 하고, 상류층에도 배우는 부류가 점차 늘고 있으니...

 

'그만 읽을까?'

나는 책에서 눈을 떼고 벽시계를 바라본다.

오후 3시.

공강 시간에 본관 앞 중앙도서관으로 왔었다. 한 시간 정도는 오빠를 기다릴 수 있다 생각했었으니까.

'정수연, 나랑 한 약속 꼭 지켜야 해. 그래야 우리 사이가 오래간다는 것 잊지 마.'

그는 협박하듯 수시로 일깨운다. 자신의 일상은 절대 양보하지 않는 그다. 아, 넌덜머리 난다. 전화나 문자를 하지 않고 그를 기다리기 위해선 다른 집중거리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는 3년간 내게 입시 미술을 지도해 주던 선생이었다. 그리고 내가 대학 입학을 하고 학원에 이따금 들를 때면 '영화 보러 갈래?'하고 물어왔다. 지독한 영화광인 그는 혼자서는 영화를 잘 보지 않는다고 했다. 고교 시절 혼자 영화보러 갔다가 노는 패거리들에게 둘러싸인 적이 있는데, 그때의 악몽 때문이라고도 했다. 그러면 나는 터지는 웃음을 참으며  '네'하고 함께 따라나서곤 했다. 그리고 어느 틈에 '우리가 사귀는 건가?' 반문해 보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그가 이미 몇년 전에 이혼한 남자란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다.

 

그는 최근부터는 시골 어느 대학의 시간 강사가 되었다. 그래서 만날 시간도 부쩍 줄어들었다. 아홉 살이라는 나이 차이 만큼이나 길고 지루한 시간을 견디며, 혼자서 커피숍에 앉아 있노라면, 겨울 바람을 뚫고서, 혹은 여름의 소나기를 맞고서 그가 돌아왔다. 옆구리엔 그날 수업한 노트와  학생들에게 받아온 과제물을 잔뜩 낀 채였는데, 그 과제란 것도 도통 시원찮은 것 투성이라서 남에게 잘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

 

"얘들이 그린 건 순수한 눈으로 봐야 이해할 수 있어."

하고는 말도 안되는 두둔을 해주기도 하면서 슬그머니 감추기도 했다. 그리곤 입가에 거품을 잔뜩 묻혀가며  카푸치노를 마시고, 별 재미도 없는 드라이브를 하고 시덥잖은 농담을 하다보면 하루가 가버렸다.

 

그런 데이트를 위해서 오늘도 이렇게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무심히 집어든 책이 이거다. 먼지를 뒤집어 쓰고 서가 뒤쪽에 꽂혀 있던, '아르헨티나 문화에 관한 알짜 연구' 라는 우스꽝스럽게 길고 지루한 제목을 달고 있는.

 

'이따위 걸로 시간이나 죽치고 있어야 하나?'

하면서 사뭇 화가 치밀기도 하지만 한 두장 넘기다 보니 제법 재미가 있다. 그건 바로 나만의 책읽기 방식 덕분이기도 하다. 나는 글자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혼자만의 체로 거르고, 그렇게 통과된 지식의 알멩이만을 진짜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마구 공상을 하며 책을 읽는 것이 그 비법이다. 그래서인지 단순한 정보성 글조차도 소설로 만들어서 읽고 싶어한다.

 

따분한 걸 싫어하는 것, 그건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 아닌가? 연애를 할 때는 단순한 것에도 의미를 덧씌워야 정말 사랑을 하고 있다는 안심이 드는 것처럼... 그리고 사람이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삭막한 세상을 조금이라도 덜 지루하게 여기기 위해서라고 어느 소설가가 그랬었다. 그래서 제법 지루한 글도 나만의 시각으로 바꿀 능력이 내게는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건 짜증나는 30대 시간 강사를 애인(?)으로 둔 내게 일말의 도움을 주는 재능이기도 하다. 그 고리타분함을 견디기 위해선 '그를 현실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노력'이 필요한 법이다.

 

어떻든 이주노동자로 인해 탱고가 발전했다는 지루한 글을 읽으며 나름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페르도라는 가상의 인물을 떠올려 본다. 그는 탱고에 심취해서 그 후에 어떤 삶을 살았을까를 생각해 보니 어쩐지 서글퍼진다. 혹시 그 정열의 댄서에게 마음을 뺏겨서 고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금의 나처럼...

 

3학년이 되자 학교생활이 조금씩 지겨워졌다. 전공을 맡고 있는 노 교수는 오늘도 강의에 들어오지 않고, 각자 개인 작업을 하라는 뜻을 칠판에 적어두었다. 물론 과사무실 조교의 글씨다. 나는 오후 내내 난장판 속에 있다가 참지 못해 뛰쳐나왔다. 작업 앞치마를 푸는 것도 잊은 채 밖으로 내달려 오니 찬란한 햇빛 속에서 풀과 잔디의 내음이 저만치서 마주보며 달려왔다.

 

3시 30분.

젊음의 특권 중 하나는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지. 그 노교수가...

아, 페르도는 어찌 되었을까? 나는 도서관 창문에서 눈을 떼고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좀 더 적극적으로 그와의 만남을 시도해 보자. 내가 책속으로 들어가서 그를 만나야겠다. 몰입, 몰입을 해야 한다.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입(mouth)이라는 뜻의 La Boca는 아르헨티나의 유일한 항구로서, 탱고의 발상지로서 기억되고 있다. 싸구려 술집 골목이 즐비했던 그 곳이 지금은 자갈돌이 깔린 골목길이 되었고, 이곳의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이 일하던 조선소 등에서 쓰고 남은 페인트를 얻어와 집의 여기저기에 칠을 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얼룩덜룩한 원색의 테라스, 지붕, 외벽 등이 만들어진 것이다.

 

'아, 이제 제법 미끄러 들어온 기분인 걸?'

나는 제법 우쭐한 마음을 안고 보카 항구를 따라 이어진 돌길을 걷는다. 멀리 산 아래 시계탑에서 때마침 오후 4시의 종이 울린다. 그 시계탑을 중심으로 산뜻한 색감의 집들이 동화처럼 펼쳐져 있다. 어쩐지 낯설지 않은 풍경들에 끌려가는 기분이다.

 

'아르헨티나 미술은 길거리 벽화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군. 이건 기초 데생 실력이 좀 부족하지만 색감은 쓸만하고, 저건  나름대로 구성력이 돋보이는데? 남미의 강렬한 원색이 살아있는 그림이라...그나저나 페르도는 어디 있지?'

나는 두리번거리며 그 형형색색의 골목길을 헤맨다.

 

돌자갈이 깔린 골목에서 오줌 지린내가 습기와 함께 올라왔고, 취객이 쏟아놓은 배설물이 마티스의 추상화인양  벽마다 들러붙어 있다. 새까만 고양이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소리없이 따라오기에 돌을 던져서 내쫓아도 본다. 어느 집 창문 난간에 걸어둔 빨래가 바람을 타고 훅 하니 떨어져 내리는 바람에 '꺅!'하고 놀랐다. 몇 년은 묵었음직한 먼지가 공중으로 떠오르고, 햇살 속에서 그 먼지는 어쩐지 이 길을 친근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이런 곳에 사는 사람이니까 조금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을 거야. 저기 꼬맹이 하나가 오고 있군. 페르도를 아느냐고 물어보자.'

 

<계속>

덧붙이는 글 | 매일 연재 합니다.

2010.03.05 11:14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매일 연재 합니다.
#판타지 소설 #소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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