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도 권력에서 내려와 보면 알게 될 거야

[리뷰] 바츨라프 하벨이 보내는 메시지, 연극 <리빙>

등록 2010.04.10 16:21수정 2010.04.13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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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어라, 바람아! 이 장면은 연극 <리빙>에서 세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완전히 그대로 옮겨놓은듯한 부분이다. 권좌에서 내려온 후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게 된 권력가의 참담함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인간사는 늘 이렇게 되풀이된다. ⓒ LG아트센터

▲ 불어라, 바람아! 이 장면은 연극 <리빙>에서 세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완전히 그대로 옮겨놓은듯한 부분이다. 권좌에서 내려온 후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게 된 권력가의 참담함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인간사는 늘 이렇게 되풀이된다. ⓒ LG아트센터

체코 초대 대통령 하벨, 권력을 떠나 극작가로 돌아오다

 

동구권을 대표하는 부조리극 작가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반체제 인사로, '벨벳혁명'을 이끈 국민적 영웅을 거쳐 체코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을 지낸 바츨라프 하벨. 그가 2008년 20년만에 발표한 자전적 신작 <리빙>(Leaving)이 지난 2일부터 4일까지 사흘간 국내 초연으로 LG아트센터 무대에 올랐다.

 

제목에서 말해주듯 연극 <리빙>은 떠나감, 특히 권력에서 떠나감으로 인해 생겨나는 상실감을 주인공 빌렘 리이게르를 통해 아주 절절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빌렘 리이게르가 총리직에서 물러나면서부터 이 연극은 시작되며 새로운 권력이 물러난 권력에 어떻게 대하는지, 물러난 권력을 대하는 언론의 태도는 어떠하며, 또한 물러난 권력의 측근들은 결국 어떤 길을 가게 되는지 등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이 연극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중 하나인 <리어왕>과 안톤 체홉의 <벚꽃동산>을 필연적으로 닮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아예 이 두 연극을 대놓고 패러디하고 있는데 특히 <리어왕>에서 가장 주요한 장면인 비바람 몰아치는 들판 속에 절규하는 장면은 대사까지 거의 그대로 옮겨놓고 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리어왕>과는 아주 본질적으로 다르다. 셰익스피어가 구전되거나 기록에 의한 역사적 자료에 기초해 작업을 한 데 비해 <리빙>은 작가 자신이 직접 경험한 자전적 내용에 그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보아도 극 중의 주인공이 작가 자신임을 추측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웬만해선 다루기 꺼려할 여성편력의 장면까지 그대로 집어넣은 탓에 사실적인 묘사가 훨씬 더 자연스러운 설득력을 가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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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에게 답하지 않으면 기자 스스로 답한다. 전직총리 빌렘 리이게르는 기자들과의 인터뷰에 성의를 다해 열심히 답하지만 정작 자신의 정치적 견해에 관한 내용은 하나도 실리지 않는다. 대체 이 기자들 왜 불렀냐는 빌렘의 물음에 빅또르가 답한다. "기자에게 답하지 않으면 기자 스스로 답한다"라고. ⓒ LG아트센터

▲ 기자에게 답하지 않으면 기자 스스로 답한다. 전직총리 빌렘 리이게르는 기자들과의 인터뷰에 성의를 다해 열심히 답하지만 정작 자신의 정치적 견해에 관한 내용은 하나도 실리지 않는다. 대체 이 기자들 왜 불렀냐는 빌렘의 물음에 빅또르가 답한다. "기자에게 답하지 않으면 기자 스스로 답한다"라고. ⓒ LG아트센터

 

퇴임한 전직 총리 빌렘에게 찾아온 손님들

 

퇴임한 총리 빌렘 리이게르에게 찾아온 첫번째 손님은 잭과 봅이라는 기자들이다. 빌렘은 이들에게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떠들어대지만 그들은 그냥 건성으로 들을 뿐, 오히려 그의 여성편력과 관련된 부분에 더욱 귀를 쫑긋거린다. 그리고선 마지막 질문. "면책특권을 잃는 것이 신경쓰이지 않느냐." 이건 마치 물러난 권력자에게 이젠 감옥에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협박처럼 들리는 대목이다. 그의 취재 목적이 어떠했는지는 극이 좀 더 진행되면 더욱 명확해진다. 이젠 이빨 빠진 사자에게서 대중들의 가장 통속적인 가십거리나 뽑아내어 한바탕 황색 저널리즘으로 놀아보겠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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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아의 방문 전직총리 빌렘 리이게르에게 정치학자이자 다문화사회심리학자, 그리고 인터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했다는 베아가 찾아와 빌렘의 자서전을 쓰고 싶다고 말한다. ⓒ LG아트센터

▲ 베아의 방문 전직총리 빌렘 리이게르에게 정치학자이자 다문화사회심리학자, 그리고 인터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했다는 베아가 찾아와 빌렘의 자서전을 쓰고 싶다고 말한다. ⓒ LG아트센터

 

빌렘에게 찾아온 두번째 손님은 자신을 정치학자이자 다문화 사회심리학자이며 인터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했다고 소개하는 베아라고 하는 여성이다. 그가 수년간 빌렘을 연구했기 때문에 오히려 빌렘 자신보다 빌렘을 더 잘 알 거라며 빌렘의 자서전을 쓰겠다고 제안한다. 이미 권좌에서 내려온 힘 없는 빌렘에게 있어 그는 매우 반가운 손님이지만 반대로 베아 입장에서 빌렘은 이제 바라만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 맘만 먹으면 어떤 형태로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활용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된 것이다. 이 부분은 극의 끝부분에 다다르면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다.

 

세번째 손님은 현재 빌렘의 위치를 가장 여실하게 드러내는 인물이다. 과거 자신의 부관을 했던 사람이며 현재 새로운 정권에서도 차관을 하고 있는 끌라인이다.  그는 빌렘에게 새 정권의 지도부를 지지하는 발언을 해 주면 현재 살고 있는 공관에서 쫓겨나지 않고 계속 살 수 있게 해 줄 거라며 이틀도 사흘도 아닌 딱 하루간의 말미를 준다. 결국 답을 주지 않은 빌렘은 상상했던 그 이상의 곤경에 처하게 된다. 사적인 서신 내용을 문제삼아 경찰에 끌려가 진술서에 서명을 강요받기도 하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옛 참모의 참모의 참모직을 수락하게끔 강요받는다. 이건 완벽한 굴욕을 의미한다.

 

베아라는 젊은 여성 정치학자와의 스캔들에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던 오랜 연인 이레나는 빌렘이 끌라인에게 굴복하고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꺾은 바로 그 시점에 결별을 선언하고 떠나버린다. 그가 여지껏 빌렘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던 것은 여전히 빌렘을 사랑하고 있거나 미련 때문이라기 보다는 정치인 빌렘의 신념과 의지, 정치적 견해에 대한 존경 때문이었음이 분명해진 것이다. 빌렘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계속 그의 곁을 지켜왔던 이레나는 끝내 자신의 부관이었던 끌라인에게 머리 숙인 빌렘은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권좌를 떠난 지 불과 얼마 되지 않은 빌렘은 자신의 오랜 연인이었던 이레나와 늘 그의 옆에 있어줄 것만 같았던 집사 오스발트 마저 떠나버리게 되어 한 없이 고독하고 외로운 존재가 되고 만다. 그의 재임시절 대체 얼마나 청렴했었기에 물러난 후에 머물 집조차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인지 한편으론 참 답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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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의 순간 그의 옛 참모의 참모의 참모가 되겠노라고 말하고 있는 전직총리 빌렘 리이게르. 새로운 권력의 힘 앞에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단 두가지 밖에 없다. 굴욕을 당하거나 조금 덜한 굴욕을 당하거나. 어쨌든 굴욕은 피할수 없다. ⓒ LG아트센터

▲ 굴욕의 순간 그의 옛 참모의 참모의 참모가 되겠노라고 말하고 있는 전직총리 빌렘 리이게르. 새로운 권력의 힘 앞에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단 두가지 밖에 없다. 굴욕을 당하거나 조금 덜한 굴욕을 당하거나. 어쨌든 굴욕은 피할수 없다. ⓒ LG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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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와 연인 권력을 떠난 빌렘 리이게르 옆에는 집사와 그의 오랜 연인 이레나가 있다. 하지만 이들도 곧 떠나간다. 아니, 떠나갈 수 밖에 없게 된다. 상황이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 LG아트센터

▲ 집사와 연인 권력을 떠난 빌렘 리이게르 옆에는 집사와 그의 오랜 연인 이레나가 있다. 하지만 이들도 곧 떠나간다. 아니, 떠나갈 수 밖에 없게 된다. 상황이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 LG아트센터

여성 정치학자 베아의 방문과 하늘로 솟구쳐 올라가는 벚꽃나무들의 의미

 

그런데 이 연극은 단순히 물러난 권력자 빌렘의 몰락만을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간다. 한때 빌렘의 부관이었으면서도 정권이 바뀌자마자 새로운 정권의 실세로 거듭나 그에게 최악의 굴욕을 선사하였던 끌라인 역시 때가 되어 물러나면 다시 그에게 자서전을 쓰려고 찾아오는 베아의 방문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

 

여기서 베아의 방문이 뜻하는 것은 곧 끌라인 그 역시도 빌렘이 거쳐간 그 길을 따라 걷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권력은 한때의 것일 뿐 항상 끝이 찾아오게 마련이라는 것, 현재 차디찬 칼날을 맘껏 누군가에게 휘두르고 있는 최고의 권력자도 반드시 그때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거다. 청렴했던 빌렘이나 부패했던 끌라인도.

 

마지막 장면을 보면 빌렘 뿐만 아니라 그 뒤에 권좌를 물러난 끌라인 역시 앞날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감할 수 있다. 청렴했던 빌렘이 단지 새로운 정권에 협력적이지 않았다 하여 갖은 방법으로 망신을 당했다면 5채의 빌라를 소유하고 재임중 대리인을 통해 카지노를 비롯한 대규모 상업센터 사업까지 했던 끌라인의 경우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극중 직접 작가 자신의 목소리로 틈만 나면 개입하면서 이것이 연극임을 일깨워주거나 때론 피터 브룩을 인용하며 텅빈무대라는 공간이 주는 상징성을 설파하는가 하면 마지막 끝장면엔 이렇게 하여 완결성을 추구하겠다는 등의 부연설명을 통해 다소 코믹하면서도 오히려 재미를 더하는 하벨 나름의 위트도 색다른 묘미를 선사한다.

 

거의 마지막 장면에서 빌렘의 저택이 철거되어지고 그의 동산 위에 심겨진 여러 그루의 벚꽃나무들이 모두 송두리째 위로 들려 올려져 하늘로 향하는 장면은 마치 체홉의 사라짐의 미학을 표현한듯 느껴진다. 마치 빌렘이 추구했던 모든 정치적 이상이나 질서, 체계, 업적 등이 그의 퇴임과 함께 뿌리채 송두리채 뽑혀져 나가는 것처럼. 딱 하나의 장면이 이토록 강력하고 효과적인 임팩트를 주기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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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렘의 부관이었던 끌라인 자신의 부관이었던 끌라인은 새 정부에서 중용되고 빌렘을 찾아와 새 정부를 지지하여 줄것을 압박한다. ⓒ LG아트센터

▲ 빌렘의 부관이었던 끌라인 자신의 부관이었던 끌라인은 새 정부에서 중용되고 빌렘을 찾아와 새 정부를 지지하여 줄것을 압박한다. ⓒ LG아트센터

 

한국과 비슷하다

 

바츨라프 하벨의 <리빙>이 흥미로운 것은 실제 체코 초대 대통령이라는 권력에서 물러난 전직 대통령 하벨이 다시 극작가로 돌아와 그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을 생생하게 우려냈다는 것이다. 이는 작년 서거한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후 겪어야 했던 수많은 사건들을 더욱 더 생생하게 떠올리게 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이명박 대통령이 걸어가게 될 미래에 대해서도 다양하게 생각할 거리를 준다. 

 

청렴한 대통령이건 부패한 대통령이건 권력을 내놓은 다음에 겪게 될 상실감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게다가 재임중 부정 부패를 저질렀거나 다수 국민들이 원치 않는 사업들을 무리하게 추진했다면 치러야 할 댓가의 차이는 훨씬 더 커질 것이다. 자신이 권력을 잡고 있는 동안은 주위의 모두가 최종 권력자인 그의 지시를 빌미로 움직이지만 권력이 떠난 그 순간부터는 저질러 놓은 모든 잘못에 대한 책임이 온전히 그의 책임으로 돌려지기 때문이다.

 

지난해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였을 때 많은 언론들이 다시는 이토록 불행한 대통령이 나와서는 안 된다고 떠들어댔지만 몇몇 누리꾼들은 꼭 한번은 더 나올것 같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전직 대통령이 불행해진다는 것은 국민들에게도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퇴임후에도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운, 그런 행복한 대통령이 나오기를 바라는 것이 실제 대다수 시민들의 바람일것이다.

 

이제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도 거의 절반이 지나가고 있다. 지난해 노무현 대통령과 그의 주변에 이루어졌던 먼지털기식 검찰수사, 한명숙 전 총리 수사 등이 연극<리빙>의 장면들과 참으로 유사하지는 않은지 자신의 임기 후에는 과연 어떠한 일들이 닥칠 수 있을지 찬찬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 대통령이 아마도 이 연극을 보진 못했겠지만 대본이라도 구해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제발 말이다.   

2010.04.10 16:21 ⓒ 2010 OhmyNews
#연극 리빙 #바츨라프 하벨 #체코 아르하극장 #LG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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